박현모의 역사 속 반면교사

[[1] 개혁의 기회 놓친 정조]

드무2 2026. 7. 19.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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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혁의 기회 놓친 정조]

 

 

 

일러스트 = 박상훈

 

 

 

국왕의 만기친람··· 신하들은 책임감 약해지고 허물 피하기 급급

 

 

 

올해는 정조 즉위 250주년

"혼자 천 칸의 집을 지키는 형편"

권한 위임 없이 다 챙기는 통치

개혁 여건이 성숙한 시기였지만

원칙과 행동 어긋나며 정국 소모

 

 

 

국가와 조직의 운명은 때로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이나 결단의 부재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된다. ‘역사 속 반면교사’ 는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 (critical moment)을 세밀히 살펴봄으로써, 지도자들이 놓친 기회와 그 후과를 리더십의 관점에서 되짚어 본다. ㅡ 편집자 주

 

 

 

“당나라 군대는 왜 싸우기만 하면 패했는가?”

왕위에 오른 지 1년 남짓 지난 1777년 2월, 조선후기의 국왕 정조 (正祖)가 신하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한 신하는 “임금이 장수를 의심했기 때문”이라고 답했고, 다른 신하는 “소인을 등용했기 때문” 이라고 했다. 정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당나라 군대가 거듭 패한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장수를 임명해 놓고도 끝내 신뢰하지 못한 점. 둘째, 현장의 지휘관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조정의 허락만 기다리다가 전투의 적기를 놓친 점. 셋째, 여러 곳에서 서로 다른 명령이 내려와 지휘 체계가 흔들린 점이다. 한마디로 사람을 제대로 뽑은 뒤에는 믿고 맡겨야 하며, 현장에 필요한 재량권을 주되, 조직 전체가 하나의 방향을 향해 움직이도록 해야 일이 성사된다는 게 정조의 생각이었다.

 

 

정조도 원칙 다 실천하지 못해

 

그렇다면 정조 자신은 이 원칙을 얼마나 실천했을까. 내가 보기에 첫 번째 원칙인 인재 선발과 신뢰는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정조는 “그가 나를 저버릴지라도 나는 그를 버리지 않겠다” 고 말할 만큼 사람을 믿고 썼다. 소론의 서명선, 남인의 채제공, 노론의 김종수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당파를 넘어 이들을 기용하고 협력하게 함으로써 정치적 안정과 개혁의 동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화성 행궁 내 정조를 기리는 사당인 화령전에 걸린 정조 어진. / 국가유산청

 

 

 

그러나 두 번째 원칙인 권한 위임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신하들은 ‘어진 이에게 맡겨 다스리는 정치’ 를 주장했지만, 정조는 국정을 직접 챙기는 방식을 더 선호했다. 그는 “앉아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고 해가 기울도록 밥 먹을 겨를도 없었던” 주공과 문왕의 사례를 들며 군주의 적극적인 통치를 강조했다. 물론 정조 자신도 만기친람의 부담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나 혼자서 천 칸의 집을 지키는 형편이라 마음의 노고가 크다” 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왕이 모든 일을 직접 챙기는 방식은 결국 신하들의 책임 의식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조정의 대신들은 일을 성취하는 것보다 허물을 피하기에 급급했고, 지방 수령들조차 소극적으로 업무를 처리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세 번째 원칙인 명령 체계의 일원화는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정조는 인사권을 휘두르던 이조전랑 (吏曹銓郞)과, 여론 형성에 큰 힘을 발휘하던 한림 (翰林 · 예문관 검열)의 특권을 약화시켰다. 또한 각 군영 대장들의 권한을 줄이는 대신 병조판서를 중심으로 군령 체계를 일원화했다. 그는 “망건의 윗부분을 팽팽하게 묶어야 아래가 펴진다” 고 하며, 국왕을 정점으로 한 관료의 위계와 명령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선을 떠받쳐 온 공론 정치의 기반도 함께 약화되었다. 언관들의 독립성과 면책 특권이 줄어들면서 면절 (面折 · 면전에서 왕의 잘못을 지적함)이나 절함 (折檻 · 난간을 부러뜨리며 간언함)의 전통도 쇠퇴하였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민생과 국정을 둘러싼 공론이 아니라, 이미 몰락한 인물을 공격하는 박격 (駁擊)과 권력의 뜻을 헤아리는 침묵과 동조였다.

 

 

즉위 250주년에 재조명되는 정조

 

올해는 정조 즉위 250주년이 되는 해다. 그의 시대 (1776 ~ 1800)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한 학술회의에서는 “정조가 없었다면 정약용도, 실학의 발전도, 수원화성도 없었을 것” 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만은 피하기 어렵다. 왜 정조가 추진한 개혁은 그의 사후에도 이어지지 못했을까 하는 물음이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1년 뒤인 1801년, 많은 인재가 종교를 이유로 정치적 박해를 받는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군제 개혁의 상징이었던 장용영도 이듬해인 1802년 혁파되었다. 무엇보다 이후 조선은 외척 세력이 어린 국왕을 앞세워 권력을 사적으로 운영하는 세도 정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정조가 정치 · 경제 · 군사 등의 목적으로 축성을 지시한 수원 화성의 정문 장안문. 임금이 한양에서 행차할 때 이 문을 통과했다. / 박현모 제공

 

 

 

이렇게 볼 때, 정조에게 가장 아쉬운 점은 개혁의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특히 1790년부터 1795년까지 약 6년은 ‘좌제공 우종수’ 로 상징되는 탕평 정국의 전성기였다. 남인의 영수 (領袖) 채제공과 노론의 지도자 김종수가 초당적으로 협력하며 국정을 이끌었고, 북인 계열의 인재들도 동참하기 시작했다. 신해통공 (1791년), 수원 화성 축성 (1794년), ‘통청 (通淸) 운동’ 이라 불린 신분 장벽 완화 요구 등 사회 곳곳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국가 개혁의 여건이 어느 때보다 성숙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바로 이 무렵부터 정조의 관심은 국정과 친인척 문제 사이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화성 축성과 초계문신제를 추진하며 개혁을 이끌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인척 문제에 깊이 개입하며 정국을 소모시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1794년의 은언군 문제다. 그해 4월, 정조는 강화도에 유배 중이던 자신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을 비밀리에 궁궐로 데려왔다. 신하들은 혈서까지 써 가며 반대했지만 왕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은언군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도록 금령 (禁令)을 내리고 관련 상소와 논의를 일절 차단했다.

 

 

개혁에 집중할 에너지 소모

 

이 시기 정조는 일종의 ‘이중 몰입 (competing commitment)’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 몰입이란 새로운 목표와 바람직한 행동 원칙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기존의 행동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 옳다고 믿는 원칙과 실제 행동이 서로 어긋나는 상황이다. 정조는 평소 신하들에게 사 (私)를 버리고 공 (公)을 따를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작 친인척 문제에서는 그 원칙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직언하는 신하가 없다고 탄식하면서도, 은언군 문제처럼 자신의 뜻이 정해진 사안에 대해서는 금령을 내려 논의를 차단했다. 간언을 구하면서도 그 말이 자신의 뜻과 어긋날 때에는 입을 막았던 것이다. 이러한 언행의 불일치는 정국을 끊임없이 ‘은언군 파동’ 속으로 몰아넣었다. 국가 개혁에 집중되어야 할 정치적 에너지는 친인척 문제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 소모되었고, 신하들 역시 민생과 국정보다는 국왕의 진의를 헤아리고 금령을 풀기 위해 더 많은 힘을 기울여야 했다.

‘6년의 기회’ (1790 ~ 1795)를 놓친 뒤 정조의 모습은 처참했다. 1797년 무렵부터 시력이 크게 떨어져 글을 읽기조차 힘들어졌고, 신하들을 접견하는 일도 버겁다고 토로했다. 1799년에는 중국에서 유입된 전염병으로 전국에서 12만8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개혁의 한 축이던 채제공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남인 세력은 급속히 위축되었고, 어렵게 구축한 탕평 체제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런 가운데 1800년 여름, 정조는 종기 치료를 받다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6개월의 ‘정조실록’ 에는 왕의 탄식과 근심, 그리고 자책의 말들이 자주 등장한다. 정조는 “반대하는 자들이 날로 늘어나 태평성대를 이루기 어렵겠다” 고 한탄했다. 한때 꿈틀대던 사회의 활력은 눈에 띄게 퇴조했고, 왕의 뜻도 예전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역사는 때때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지도자에게 내어준다. 그러나 그 기회는 늘 그렇듯 유한하다. 정조에게는 재위 중반의 6년이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그는 매우 뛰어난 비전과 역량을 갖춘 군주였지만, 가장 유리한 시기에 개혁의 성과를 제도와 정치문화로 정착시키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이 이야기가 수백 년 전 한 군주의 실패담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출처 : 조선일보 2026년 6월 24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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