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뜻을 세우다 나라를 세우다

드무2 2022. 4. 27.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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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세우다 나라를 세우다

 

 

 

 

 

 

2022년중랑망우공간 개관기념 특별기획전

2022 Jungnang Mang-u Space Special exhibition

 

건국훈장

The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장소 : 망우역사문화공원

전시기간 : 2022년 4월 1일 금요일~5월 31일 화요일

 

 

 

 

 

 

들어가며

 

중랑망우공간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첫 번째 특별기획전에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아울러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서울 동쪽 경계의 끝자락에 자리한 망우리는 태조 이성계의 근심을 덜어 '망우忘憂'라는 이름을 갖게 된 곳입니다. 1933년 공동묘지가 들어서 한때 민둥산에 무덤만 가득한 모습에서 1973년 폐장 이후 49년이 지난 지금은 완벽한 생명의 숲이 되었습니다. 망우산의 울창한 숲과 산책로는 조망이 가장 아름다운 서울둘레길이자 역사가 살아있는 공간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중랑망우공간의 개관기념 특별기획전 <뜻을 세우다, 나라를 세우다>는 조국의 독립과 건국을 위해 뜻을 굽히지 않고 헌신하다 망우리에 영면한 8인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학생, 종교인, 서화가, 교육자 또는 비밀결사 조직원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의 발전과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이 추서된 이들의 숭고한 헌신을 재조명합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의 참된 의미를 되짚어 이곳에 영면해 있는 위인들의 삶과 기억하고 추모하는 시간을 통해 과거와 오늘을 연결짓고 우리의 미래를 밝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중랑구청장

 

 

 

 

 

 

 

 

 

 

 

 

 

 

 

 

 

 

 

건국훈장 (建國勳章,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우리나라를 세우고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데 큰 일을 한 사람에게 주는 상입니다.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신 독립운동가들이 주로 받는 답니다.

 

 

 

1등급 :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

 

 

 

2등급 : 대통령장(大統領章)

 

대수로 된 정장을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가슴 아래에 두르며 부장은 왼쪽 가슴에 단다.

 

 

 

3등급 : 독립장(獨立章)

 

정장을 가슴 중앙에 오도록 중수를 목에 걸고 부장은 왼쪽 가슴에 단다.

 

 

 

4등급 : 애국장(愛國章)

 

 

 

5등급 : 애족장(愛族章)

 

왼쪽 가슴에 소수로 된 정장을 단다.

 

<출처>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건국훈장의 역사와 종류

건국훈장은 1949년 4월 27일에 「건국공로훈장령」이 공포되면서 처음 실시되었다. 몇 번의 개정을 거쳐 1990년 현재의 5등급,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으로 새롭게 정비되었다.

상훈법에 따르면 훈장 또는 포장은 대한민국에 뚜렷한 공적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된다.

우리나라의 최고훈장인 무궁화대훈장 다음이 대한민국의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과 건국을 위해 공헌하신 분들께 수여되는 건국훈장이다. 건국훈장 패용은 다른 훈장과 마찬가지로 당사자만 패용할 수 있으며, 유족은 훈장을 보존할 수 있다.

 

훈장의 패용

훈장은 정장, 부장, 약장, 금장으로 구성된다. 정장은 수에 연결되어 어깨를 두르는 대수, 목에 거는 중수, 가슴에 다는 소수로 된 정장으로 구분된다. 1등급 대한민국장과 2등급 대통령장은 대수로, 3등급 독립장은 중수이고, 4등급, 5등급인 애국장과 애족장은 소수이다. 약장과 금장은 옷깃이나 윗옷의 주머니에 다는 약식 훈장으로 약장은 등급에 따라 그 색깔의 배열이 다르다.

 

 

 

영면인사 묘역번호

 

 

 

독립운동의 역사와 건국훈장 수훈 8인

 

 

 

 

 

 

 

1899. 08. 17

대한국국제 반포

자주권과 독립권을 갖춘 제국으로써

대한국 황제명으로 대한국국제 제정 및 반포

 

 

 

1904. 02. 08

러일전쟁 발발

한국과 만주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교섭을 벌이던 중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

 

 

 

대한국국제

 

 

 

제물포 앞바다에서 침몰하는 러시아 함대

 

 

 

 

1905. 11. 17

을사조약 체결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일협상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

 

 

 

1910. 08. 29

경술국치

총리대신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 사이에

비밀리에 합병조약이 체결되고,

8월 29일 강제로 조칙이 공포되면서

한국은 국권을 상실

 

 

 

을사조약

 

 

 

한일합병조약

 

 

 

 

1912. 06. 20

조선총독부

'묘지 화장장 매장 급 화장 취체 규칙' 반포

한국인들에게 낯설었던 화장과 공동묘지 제도와 묘지 설치에

관한 다양한 규칙과 제한은 많은 한국인의 반발에 부딪힘

 

 

 

1919. 02. 08

2 · 8독립선언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 받은

일본 동경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민족의 독립을 요구

 

 

 

조선총독부 관보 '묘지화장장매장급화장취체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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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MB

 

 

 

2 · 8독립선언 주도자 기념사진

 

 

 

2 · 8독립선언서

 

 

 

 

1919. 03. 01

3 · 1운동 발발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의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파고다공원의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만세 시위 행렬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

 

 

 

1919. 04. 11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3 · 1운동 이후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됨.

중국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조직적인 독립운동과 정식정부를 준비하기

위한 통합기구를 수립

 

 

 

3 · 1운동 당시 광경

 

 

 

3 · 1독립선언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부

 

 

 

 

유관순 1902~1920

3 · 1운동에 참여하였고, 천안 아우내 만세 시위를

주도한 이유로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고문에 의해 순국.

 

 

 

 

 

 

 

 

1926. 06. 10

6 · 10만세운동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학생들이 격문을 뿌리며

시작되어 서울 각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

 

 

 

1927. 02.

신간회 설립

민족유일당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창립한 민족운동단체

 

 

 

 

신간회 강령 및 규약

 

 

 

1929.

광주학생항일운동

호남지방의 항일적 분위기 속에서 광주 지역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의 충돌을 계기로 광주 학생들의 투쟁이

전국으로 화산. 3 · 1운동 이후 최대의 대일민족항쟁

 

 

 

1931.

만주사변

일제의 만주 침략을 계기로 한중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이후 일제의 지속덕인 침략행위는 중일전쟁으로 확대

 

 

 

 

방정환 1899~1931

'어린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고

어린이날을 만든 아동문학과 소년소녀운동의 선구자.

동화구연과 강연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다 만 31세가 되던

1931년 생을 마감하고 망우리에 안장.

 

 

 

 

 

 

 

1933.

망우리 공동묘지 개원

경성부의 도시계획과 공동묘지 이장을 목적으로

1933년 9월 공동묘자를 개원한 망우산은

만장되는 1973년까지 격동의 근대사를 살아온

이들을 위한 이승의 마지막 장소가 되어 줌

 

 

 

 

유상규 1897~1936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 조사원이자

안창호의 비서로 활약. 귀국 후 의사로서 보건의료 발전에

이바지하였고, 환자를 돌보던 중 전염병에 감염되어 서거

 

 

 

 

 

 

 

안창호 1878~1938

해외의 한인동포사회를 결속하고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등 독립운동과 민족국가 수립에 기여

먼저 세상을 떠난 유상규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망우리에 안장

 

 

 

 

1945. 08. 15

광복

1945년 8월 6일 일본의 나가사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이함.

 

 

 

1948. 08. 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

7월 20일 초대 대통령 선거에 이어

내각이 구성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문일평 1888~1939

교육자이며 우리나라 역사의 올바른 이해와

연구에 매진한 민족주의 사학자.

신간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사후에 생전의 저작을 모은 『호암시화집』 『호암전집』이 간행됨

 

 

 

 

 

 

 

한용운 1879~1944

시집 『님의 침묵』으로 일제에 저항하고 불교 개혁을 주장.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낭독

1944년 영양실조로 입적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

 

 

 

 

 

 

 

오세창 1864~1953

『근역서화징』 『근역인수』 등을 편찬하고 우리 민족의

문화와 예술을 전승하기 위해 노력한 서예가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 서명 해방 후 민족대표로서

일본에 빼앗겼던 대한제국 옥새를 되돌려 받음

 

 

 

 

 

 

 

 

서동일 1893~1966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서동일을 국만당,

다물단에 가입하여 항일비밀결사운동을 펼침.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겪음.

서거 후에는 망우리의 부인묘에 합장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8인의 영웅들

 

 

 

 

만해                        萬海

한용운              韓龍雲

1879~1944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님의 침묵 중에서

 

 

 

충남 홍성군에서 출생한 한용운은 조선말기 불안한 정세 속에서 고향을 떠나 설악산에 입산하여 머무르면서 불교를 공부하고 출가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더 큰 세상을 알기 위해 러시아와 일본으로 떠난 한용운은 민족수탈의 실태를 알게 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를 계기로 일제의 민족종교 말살정책에 대항하여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1913년에는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행하여 유신운동을 통해 불교개혁과 현실을 마주하는 민족불교를 주장하였으며,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대표단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면서도 첫째, 변호사를 대지 말자, 둘째, 사식을 받지 말자, 셋째, 보석을 요구하지 말자 등 3대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항거했다. 또한 옥중에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작성하여 조선 독립의 정당한 논리와 목적을 알렸다. 출옥 후에는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하여 교육과 실력양성의 중요성을 알렸고, 1925년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시로써 우리민족에게 민족혼을 불어넣기도 했다.

 

1927년 신간회의 창립위원으로 활약하여 민족의 사상 통일을 도모하는 동시에 조선의 불교 개혁 운동과 대중화에 앞장섰다. 신간회가 해체된 후 만해는 성북동에 조선총독부를 등지는 북향으로 심우장을 짓고 여생을 보내다가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66세의 일기로 입적했다.

 

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에 안장되었고, 2012년 그의 묘역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08년 12월 10일          일제로부터 개인 소유 및 사찰 소유 토지 수호하기 위해
                                 서울에서 경선 명진 측량강습소 개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및 낭독 하고
                                 대한독립만세 삼창 후 일본경찰에 피체
1925년 8월 29일           『님의 침묵』 탈고
1927년 1월 19일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설립된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에 안장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유관순   柳寬順

1902~1920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은 고통만큼은

견딜 수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옥중 유언 中

 

 

 

충청남도 천안 병천면에서 출생한 유관순은 이화학당 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서울 시위운동과 3월 5일 학생단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이후 경성의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으로 내려가 4월 1일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와 함께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부모는 현장에서 순국하고, 체포된 유관순은 3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3 · 1운동 1주년이 되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서대문 감옥에서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그 해 9월 28일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유관순열사의 묘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도시개발 정책으로 이태원 공동묘지가 망우산으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무연고 묘로 처리되어 다른 28,000여 기의 무연고 묘와 함께 망우리에서 화장 후 합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추서되었고, 2019년 3월 1일 정부는 유관순 열사의 애국정신의 함양과 국민통합에 기여하였음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추서하였다.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와 중랑구는 매년 9월 28일 유관순열사의 순국일을 맞아 이태원무연분묘합장비 앞에서 추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3 · 1운동 발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유관순은 학교 담을 넘어 서울 시위운동에 참여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숙부, 유중무 등과
                                함께 만세시위 주도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서대문 감옥에서 옥중 만세시위 주도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모진 고문으로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
1920년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이 치러진 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
1936년                      이태원 공동묘지의 무연분묘를 망우리오 이전하여 화장 및 합장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도산                  島山

안창호         安昌浩

1878~1938

 

내 직업은 독립운동가다.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일본경찰의                         

'당신의 직업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안창호의 대답     

 

 

 

안창호는 고향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7세가 되던 1895년 상경하여 미러학당에서 신학문을 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 활동을 통해 민족의 실력양성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는 이후 우리나라 각지에 학교를 설립히여 근대교육과 실력양성에 힘썼다.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한인들의 권익과 생활개선을 위해 미주 한인 최초의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각지에 지회를 설립하여 한인동포사회의 결속과 항일민족운동을 지속하였다.

 

을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후에는 귀국하여 1907년 국내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결성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3 · 1운동 후 상해로 옮겨가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 · 국무총리대리에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독립을 위한 민족을 대표하는 최고 기관으로써 기능할 수 있도록 했다.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건강 악화로 보석되었으나 1938년 3월 10일 60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연을 맺어 아들같이 여겼던 유상규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유상규의 무덤 위쪽에 안장되었다.

 

1973년 강남구 신사동에 새롭게 조성된 도산공원에 도산과 부인 이혜련 여사의 유해가 망우리에서 이장되었다가 2005년 도산의 묘비가 망우리 옛 묘지터로 옮겨와 본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 가입
                                 평양에서 만민공동회 관서지부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 개최
1905년 4월 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공립협회 창립
1907년                        귀국 후 서울에서 비밀결사 신민회 창립
                                 평양에 대성학교, 평양 · 서울 · 대구에 태극서관을,
                                 평양 마산동 자기회사(磁器會社) 설립
1913년                        민족의 자주독립과 실력양성을 위해 미국 센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 조직
1919년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취임,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 발간
1938년 3월 10일            경성대학 부속 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서거. 망우리에 안장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위창                 葦滄

오세창        吳世昌

1864~1953

 

글과 그림이 대대로 일어나

끝내 사람에게서

없어지지 않는 것은

사람이 본디 가지고 있는

성품이 비슷하고

사물의 근원이 있었던 까닭이다.

 

오세창 선생 연보비 글귀 중에서

 

 

 

조선 말기 개화파를 대표하는 역관 오경석의 아들로 태어난 오세창은 1879년 역과에 합격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고, 1894년 군국기무처의 총재비서관이 되었다. 1897년 일본 문부성의 초성으로 동경 외국어학교의 조선어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만난 손병희와 함께 동학을 천도교로 개창하였고 천도교의 기관지 <만세보>를 발간하는 만세보사의 사장을 역임, 손병희 사후에는 천도교의 신구파 갈등 수습과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3 · 1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옥고를 치렀다. 스스로 당대의 위대한 서화가인 동시에 감식에 일가견이 있었던 오세창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가 단체인 서화협회를 결성하였다. 우리나라 서화가들의 가계와 행적을 담은 『근역서화징』, 조선시대부터 근대기 서화가 · 문인들의 인장을 모은 『근역인수』 등을 편찬함으로써 방대한 자료와 기록으로 민족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해방 후 1948년 8월 15일 광복 1주년 기념식에서는 민족대표로 일본에 빼앗겼던 옥새를 인수받는 등 민족지도자로 활동하였다. 6 · 25전쟁 중이던 1953년 4월 피난지 대구에서 서거하여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17년 망우리 묘역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886년                        박문국 주사로서 <한성순보> 기자생활
1906년                        천도교 기관지 <만세보>사의 사장 취임
1918년                        근대적 미술가 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 발기인으로 참여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대한독립만세 삼창 후 일본경찰에 피체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식에서 민족대표로서 일본에 빼앗겼던
                                대한제국 옥새를 되돌려 받음
1953년 4월 16일          6 · 25전쟁으로 대구에서 피난생활 중 서거하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호암                湖岩

문일평       文一平

1888~1939

 

조선 독립은

 

민족이 요구하는

 

정의 인도로서

 

대세 필연의 공리요 철칙이다.

 

문일평 선생 연보비 글귀 중에서

 

 

 

평북 의주의 무관가문에서 출생한 문일평은 고향에 설립된 교회를 통해서 서영문화를 접하였고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190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낫다. 일본 동경에서 서북지방 출신 유학생들의 친목단체인 태극학회에서 활동하고, 귀국 후에는 평양 대성학교, 의주 양실학교, 서울 경신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계몽운동을 펼쳤다.

 

1912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신규식, 박은식과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와 교유하며 독립운동단체 '동제사' 결성에 참여, 동제사에서 설립한 박달학원의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귀국 후에는 1919년 3월 12일 종로 보신각에서 그가 작성한 독립선언서 '애원서' 낭독으로 체포되어 8개월간 복역하였다.

 

1927년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설림된 신간회에, 1934년에는 한국학 연구를 위한 진단학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33년부터 1939년 4월 별세할 때까지 조선일보사의 편집고문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사에 대한 그의 사설, 수필 등을 실으면서 민족의 계몽과 우리나라 역사의 올바른 서술과 조선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의 사후에 생전의 저작을 모은 『호암사화집』, 『호암전집』이 간행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2017년 망우리 묘역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12년 7월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조직된 동제사에 참여
1919년 3월 12일          서울 보신각에서 시위군중에게 그가 작성한 새로운 독립선언서 낭독
1927년 2월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설림된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
1934년 5월                 한국의 역사와 언어를 연구하기 위해 조직된 진단학회 발기인으로 참여
1939년 4월 3일            급성단독으로 서거 후 망우리에 안장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소파                   小波

방정환          方定煥

1899~1931

 

문간에 검정말이 모는

 

검은 마차가

 

나를 데리러 왔으니 가야겠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방정환 선생 유언 중에서

 

 

 

1899년 서울 야주개에서 태어난 방정환은 어린 시절부터 소년들이 모여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거나 대운동회를 개최하는 '소년입지회'에서 활동하였고, 1918년에는 청년단체 경성청년구락부를 결성하는 등 민족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경성청년구락부 결성 이듬해에는 기관지이자 문예동인지인 <신청년>을 발행하였다. 1917년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섹째 딸 용화와 결혼하면서 천도교 활동을 시작한 그는 천도교의 기관지 <개벽>의 동경 특파원으로도 활동했다.

 

1919년에는 3 · 1운동으로 <조선독립신문>의 발행이 중단되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배부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기도 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강연과 동화 구연 활동을 펼치던 방정환은 1920년 <개벽> 3호에 「어린이 노래」를 번역하여 소개하면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1922년 '어린이날'의 제정하여 1923년 5월 1일부터 제1회 어린이날 행사가 시작되었다. 일제의 감시와 검열에도 불구하고 방정환은 소년소녀운동을 통하여 민족정신 고취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1931년 7월 23일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난 그는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된 후 5년을 유골로 남아 있다가 1936년 망우리에 안장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2017년 망우리 묘역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18년 7월 7일                  경성청년구락부 결성
1919년                             3월 1일자를 마지막으로 못 나오게 된 <조선독립신문>을 집에서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배부하고, <독립선언서>를 돌리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문 받음
1920년 8월 25일                 필명 '잔물'로 '어린이 노래 : 불켜는 이'를 번안하여 <개벽>3호에 발표
                                      이때부터 소파는 '어린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
1922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 창립 1주년 기념으로 제1회 '어린이의 날' 제정
1931년 7월 23일                민족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던 중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서거
1936년 7월 23일                홍제동 화장터에서 5년을 보관되어 있던 유골을 망우리에 안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춘파                     春波

서동일           徐東日

1893~1966

 

물(多勿)이란

옛 땅을

회복한다는 뜻으로

용감(勇敢), 전진(前進),

쾌단(快斷) 등의 뜻과 함께

불언실행(不言實行)을

의미한다.

 

서동일 선생이 조직이 참여한

 다물단의 의미                    

 

 

 

경북 경산 출신으로 1923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였던 서동일은 대구, 경북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남형우, 배천택 등이 조직한 항일무장단체 국민당에 가입하여 재무부장이 되었다. 1924년 군자금 모집 특파원으로 국내로 잠입하여 경산군, 청도군을 거치며 모두 1400원이라는 당시로서는 거금을 모았고, 군자금 모집을 위해 재차 북경과 국내를 오갔다. 그리고 1925년 국민당 간부들과 함께 보다 직접적인 항일투쟁을 위해서 비밀운동단체인 다물단을 조직하였다. 용감, 전진, 쾌단의 뜻을 가지고, 자주독립, 공개처형, 약소민족의 해방이라는 '다물'의 이념을 바탕으로 친일파 암살과 군자금 모집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이어 나갔다.

 

ㅓ나 같은 해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을 하던 중 체포되어 1926년 대구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이 사건에 대한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600-700명의 방청객이 몰려들고, 서동일과 동료들에 대한 선고가 내려지자 방청석에서 만세를 외치는 일이 일어났다. 하니, 다물단 활동의 중요성과 당시 민중들의 인식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출옥 후에는 제주도로 귀양 보내져 거주제한 조치를 받았다.

 

1965년에 사망한 서동일은 망우리의 부인묘에 합장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017년 망우리 묘역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23년 3월                  중국 상해에서 국민당에 가입하여 재정 부장으로 활동
1924년 1월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여 경상북도 대구 일대에서 군자금
                                 1,300여 원을 모집하여 북경에 전달
1925년 4월                  북경 마사묘에서 다물단 조직
1925년 5월 22일           다물단의 선언서를 가지고 북경을 출발하여 경산군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중 경찰에 피체
1965년 4월 26일           서거 후 망우리에 안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태허                         太虛

유상규              劉相奎

1897~1936

 

도산의 우정을 그대로

배운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상규였다.

유상규는 상해에서 도산을 위하여

도산의 아들 모양으로 헌신적으로

힘을 썼다.

 

그는 귀국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

강사로 외과에 있는 동안 사퇴 후의

모든 시간을 남을 돕기에 바쳤다.

 

도산 안창호 흥사단 발행 중에서

유상규 선생 연보비                 

 

 

 

일찍이 근대 문물과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인 평북 강계 출신의 유상규는 고향에서 이름난 한의사였던 할아버지 유신진의 영향을 받아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제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의학도로써 교육을 받던 유상규는 4학년 진급을 앞둔 1919년 3 · 1운동 학생 집회에 참가하였고,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여서 안창호와 연을 맺고 비서로 활약하면서 귀국할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 조사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교통국은 임시정부의 통신연락 상설기구로써, 연락망 구축과 자금 모집 및 조달 업무로 독립운동의 중심 사업을 수행했다.

 

1920년에는 민족부흥을 위한 인재양성을 목표로 하는 흥사단에 가입하였고, 1924년 귀국하여서도 흥사단의 서울지부인 수양동우회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뒤에는 모교에서 교육자이자 외과의사로 재직하면서 1930년 조선의사협회 창립에 참여하는 등 민족의 보건의료 계몽에 힘썼다. 1936년 환자를 치료하던 중 급성전염병에 감염되어 사망하였고, 그를 아들같이 여겼던 안창호의 주관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상해 임시정부와 흥사단 활동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2017년 망우리 묘역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19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유상규는 3 · 1운동 참여로 정학처분을
                                 받은 후 학업을 중단하고 상해로 망명
1919년 11월                 중국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 조사원의 평북 강계 지역 책임자로
                                 임명 및 활동
1920년 9월 9일             상해에서 조직된 흥사단 원동지부에 입단
1930년 2월                  조선의사협회 창립
1936년                       환자를 치료하던 중 단독에 감염되어 서거.
                                경성의학전문학교장으로 장례 후 망우리에 안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3 · 1운동, 임시정부 활동, 국 · 내외 항일운동 등 다양한 독립운동 계열로 분류되어 있는 건국훈장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운동 및 사건의 파급력과 대상자의 지위 또는 영향력 등을 기준으로 포상의 등급이 나뉜다. 유관순의 경우처럼 과거에 훈장을 추서 받은 후 그 영향력이 인정되어 훈격이 승격되는 경우도 잇다. 그러나 훈장의 등급이 독립운동가의 위계에 차이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망우리가 바로 그 증거이다. 일제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순국열사, 격변기를 지나 해방을 맞이한 애국지사, 그리고 이 시기를 지나온 소시민 모두가 망우리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잠들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곳에 영면해 있는 모두가 우리의 현재를 만들기 위해 건국훈장에 버금가는 각자의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라를 되찾고자 굳건하게 이어온 선대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망우리가 우리에게 더 소중히 다가오는 이유이다.

 

 

 

모니터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한일신협약, 1910년 한일합병 등 잇따른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는 민족운동이 이어지던 중, 3 · 1운동은 기폭제가 되어 전 국민이 한 명의 열사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1920~1940년대에 걸쳐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 4700여 명에 이르는 한국인이 감시대상으로 등록되었고 일제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우리에 영면한 독립운동가들은 비밀결사를 통해 군자금 모금을 하고, 집필 · 연구 활동으로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말살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생애를 바쳤다.

 

 

 

 

 

 

유상규, <일본 옥중 친필 일기 - 감방기 초고본> (복제)

1924년, 각 20.2 × 14.7cm, 독립기념관 제공, 중랑문화재단 소장

 

 

 

<국민당밀사(國民黨密使)로 전후(前後)에 삼차(三次) - 서동일 사건의 진상>

1925년 6월 25일, 동아닷컴

 

 

 

문일평, <호암사화집>

1939년, 종이, 15.1 × 10.9cm, 중랑문화재단 소장

 

 

 

오세창, <근역인수>

1968년, 종이, 26.5 × 19.2cm, 중랑문화재단 소장

 

 

 

오세창, <근역인수>

 

 

 

 

 

 

오세창, <근역서화징>

1928년, 종이, 22 × 15.5cm, 중랑문화재단 소장

 

 

 

오세창, <근역서화징>

 

 

 

<안창호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복제)

1937년, 종이, 9.8 × 15cm, 등록문화재 제730호,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 중랑문화재단 소장

 

 

 

안창호가 병보석으로 출감했다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된 1937년 만들어진 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안창호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복제)

 

 

 

안창호가 1932년 상하이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고 나서 제작된 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안창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훈장증> (복제)

1962년, 종이, 36.4 × 52cm, 독립기념관 제공 · 중랑문화재단 소장

 

 

 

 

건국공로훈장증

 

대한민국 정부는 우리나라 자주독립에 이바지한바 많은 고 안창호 선열에게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추서하여 길이 표창함

 

대통령 윤보선

一九六二년 三월 一일

내각수반 송요찬

 

이 증을 제二○호로서 건국공로훈장증 장부에 기입함

내각 사무처장 김병삼

 

 

 

<유관순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복제)

1919년, 종이, 10.8 × 15.3cm, 등록문화재 제730호,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 중랑문화재단 소장

 

 

 

유관순 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유관순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훈장증> (복제)

2019년, 종이, 29.7 × 21cm, 천안시 유관순열사기념관 제공 · 중랑문화재단 소장

 

 

 

<한용운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복제)

1929년, 종이, 10.3 × 14.9cm, 등록문화재 제730호,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 중랑문화재단 소장

 

 

 

한용운 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한용운, <님의 침묵>

1926년, 종이, 19.4 × 13.4cm, 중랑문화재단 소장

 

 

 

한용운, <님의 침묵>

 

 

 

한용운,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 (복제)

1919년, 종이, 40 × 57cm, 만해기념관 제공 · 중랑문화재단 소장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

 

 

 

<3 · 1독립선언서(보성사판)> (복제)

1919년, 종이, 20.5 × 44.9cm, 독립기념관 제공 · 중랑문화재단 소장

 

 

 

<3 · 1독립선언서(보성사판)>

 

 

 

 

 

 

팜플렛

 

 

 

카드

 

 

 

 

 

 

 

 

 

 

 

 

 

 

 

 

 

 

그 밖에 망우리의 건국훈장 추서 영면인사

 

 

 

오기만

(1905~1937) 묘번 : 204390

건국훈장 애국장

 

황해도 연백에서 출생한 오기만은 좌우합작 모임인 신간회의 백천지회 설립 준비를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상해로 건너가 여러 개의 예명으로 공산당원 활동을 하면서 조봉암, 구연흠 등과 교류하였고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상해한인청년동맹 집행위원장으로 비밀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중병으로 출옥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서거하였다. 망우리의 가족묘에 안장되어 있으며, 2017년 망우리 묘역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경아 서광조

(1897~1964) 묘번 : 108919

건국훈장 애족장

 

전남 목포 출생의 서광조는 1915년 평양에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조선국민회에 참여하여 전라도 지역 책임자로 활동했다. 조선국민회 활동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에는 제주도에서 거주제한 조치를 받았다. 조선국민회는 일제강점기 초기의 독립운동단체로써 이 단체의 회원들이 1919년 4월 8일 목포지역 만세운동의 주축이 되었으며, 서광조의 아버지 서상봉이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서광조는 1964년에 서거허여 망우리에 안장되었고, 2017년 망우리 묘역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준영 오재영

(1897~1948) 묘번 : 103570

건국훈장 애족장

 

부산 출생의 오재영은 부산공립상업학교 시절 박재혁, 최천택 등을 만나 교우관계를 맺었다. 이들과 1913년 항일투쟁을 목표로 구세단이라는 비밀결사단을 주직하여 활동하며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으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고문을 당하고 구세단을 해체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1920년에는 박재혁이 의열단의 지령을 받고 부산경찰서에 폭탄 투척할 때에 조력하여 공동혐의자로 체포되었다. 1927년 신간회 부산지회 창립시 선전부의 간부로 참여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2017년 망우리 묘역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남파 박찬익

(1884~1949) 묘번 : 204934

건국훈장 독립장

 

경기도 파주에서 출생한 박찬익은 대종교에 가입한 후 1910년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단체 중광단에서 대종교 포교와 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에는 대한독립의군부 창설과 민족대표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조소앙이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서 발표에 참가했다. 한성임시정부 조질에 참여하였고, 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길림통신부에서 근무하면서 중국과의 외교 실무자로 활약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현재는 현충원으로 이장되어 망우역사문화공원에는 비석이 남아있다.

 

 

 

계산 김승민

(1872~1931) 묘번 : 205189

건국훈장 애국장

 

함경남도 함주 출신의 김승민은 고종 재위기에 비서감으로 재직하다가 1906년 항일의병과 내통했다는 밀칙사건으로 2년간, 1909년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다시 6개월간 복역하였다. 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1920년 무장독립운동단체 광복단을 조직하고 항일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 1925년 대동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현재는 현충원으로 이장되어 비석이 남아있다.

 

 

 

명재 이   탁

(1898~1967)

건국훈장 애족장

 

경기도 양평 출신의 이탁은 경신학교에서 장지영으로부터 조선어문법 강의를 들었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북로군정서 사관양성소를 졸업하고 청산리전투에 참가했다. 대종교에서 발행된 민족 역사서인 『신단민사』를 보급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귀향하여 정주 오산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국어학을 가르치며 한글발음과 맞춤법을 연구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1992년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송암 서병호

(1885~1972) 묘번 : 204370

건국훈장 애족장

 

황해도 장연 출신인 서병호는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로교 최초 목사 중 한 명인 그의 아버지 서경조가 설림한 해서제일학교,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 대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내무위원으로 활동했다. 상해에서 남화학원을 설립하고 인성학교의 이사장을 지냈으며, 광복 후에는 귀국하여 새문안교회 장로, 서울 중앙기독청년회 이사를 역임하면서 교육과 사회복지 분야에 이바지하였다. 1972년 서거하여 망우리에 안장된 그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박원희

(1898~1928) 묘번 : 109677

건국훈장 애족장

 

충청남도 대전에서 출생한 박원희는 철원보통학교 교사로 재임하던 중 김사국을 만나 함께 간도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간도 용정에 동양학교원을 설립하고 항일선전문을 배포하였다. 1924년 귀국 후에는 여성동우회, 근우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사회단체와 여성단체에서 민중계몽과 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병으로 순국하였고,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34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현충원에 이장되어 남편 김사국과 합장되어 있다.

 

 

 

지기 문명훤

(1892~1958) 묘번 : 204082

건국훈장 애족장

 

평양에서 출생한 문명훤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하여 191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3 · 1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내무부 서기를 지냈고,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동포를 돕기 위해 활발히 활동하였다. 귀국 후에는 수양 동우회에 가입하였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글을 배포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58년 서거 후에 망우리에 안장되었고, 현재는 현충원으로 이장되어 본래의 묘터에 비석이 남아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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