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경기도

[문산 여행] 01

드무2 2022. 9. 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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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 여행] 01

 

 

 

문산역

 

 

 

 

 

 

 

 

 

 

 

 

 

 

 

 

 

 

 

 

 

 

 

 

문산행복센터

 

 

 

문산역 건너 통일공원 가는 길

 

 

 

푸른 벼가 심어져 있는 논

 

 

 

 

 

 

빗물펌프장

 

 

 

 

 

 

국도 제1호선

국도 제1호선(목포 ~ 신의주선)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경기도 파주시를 잇는 일반국도이다.

남북이 분단되기 전까지는 전체 노선 약 1,068㎞, 판문점을 거쳐 평안북도 신의주시까지 이어주는 도로였다. 2012년 6월 29일 목포대교가 개통이 되어 국도1호선의 기점이 유달산우체국 부근에서 목포대교 종점인 고사도 ~ 허사도(신외항)로 변경되었다.

 

국도 제1호선의 일부 구간은 조선시대부터 주요 도로로 사용되고 있었다. 서울에서 수원까지의 구간은 조선 정조 시기 놓인 시흥대로, 경수대로와 겹치며, 서울에서 의주까지 이어지던 조선시대의 의주로는 중국과의 사신왕래에 사용되는 주요 도로였기 때문에 국가에서 관리하였으며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지금의 국도1호선과 겹친다. 의주로는 책문을 넘어 베이징까지 이어지기에 연행로라고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일본 제국은 목포에서 서울을 거쳐 신의주까지의 도로를 정비하여 국도1호선으로 명칭하였다. "신작로"라 불린 새 도로는 대부분 조선시대의 대로를 사용하였으나 여러 구간에서 이전의 도로망을 버리고 새로 조성하여 서울 이북 구간은 만주 침략의 이동로로 사용하였다.

 

통일로는 국도 제1호선의 일부이며 서울시 은평구 구파발동에서 경기도 파주시 문산의 임진각(臨津閣)에 이르는 고속화도로로 1971년 12월 착공하여 1972년 3월 완성되었으며 휴전선으로 남북이 분단된 현실에서 민족통일의 의지를 담아 상징적으로 이름 붙인 데서 통일로라고 명명하였다. 통일로는 원래 조선시대의 9대 간선로 중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육로인 의주로가 근간이 되어 이루어진 도로이다. 1984년 11월 7일 서울특별시 공고 제673호에 의해 통일로라는 가로명이 처음 붙여졌으며 통일로는 우리 민족사상 북방의 문화 · 문물이 전래되는 중심 교통로로서 이 길의 주위에는 역참 · 파발 등이 발달하였고 민족의 애환을 담고 있는 판문점과 임진각 외에 많은 문화재를 비롯한 관광지와 유원지가 분포하여 있다.

 

 

 

 

 

 

 

 

 

 

 

 

 

 

 

 

 

 

 

 

 

 

 

 

 

 

 

경의선(京義線)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복선철도로 길이 518.5㎞이며 1906년 4월 3일 용산 ~ 신의주간 철도가 완전 개통되었다.

 

1908년 4월 1일 부산 ~ 신의주 간 직통 급행열차인 융희호(隆熙號)가 운행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중 · 일전쟁을 계기로 복선화가 진행되었다.

경부선과 함께 한반도의 주요 종관철도(縱貫鐵道)로서 수많은 지선이 연결되어 운수교통량은 전국 철도중에서 가장 많아 교통상 대동맥을 이루었다. 1945년 서울 ~ 개성 간 74.8㎞ 구간으로 단축운행되다가 1951년6월 12일 운영이 중단되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린 후 경의선 복원사업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었고, 2003년 6월 14일 연결식이 군사분계선(MDL)에서 열렸으며, 2009년에는 서울역에서 문산까지 광역전철이 개통되었다.

 

경의선은 북한 내 여객의 60%, 화물수송의 90%를 담당하고 있어 복원이 완료되면 남북교류가 활발해지고 북한의 사회기반 시설을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남한은 중국으로 가는 물류비를 크게 줄일 수 있으며, 중국 · 러시아 · 유럽의 철도와 연결되면 그 기대효과는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판문점 / 공동경비구역

공동경비구역이란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상에 있는 구역으로 유엔사측과 공산측(북한, 중국)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원만히 운영하기 위해 1953년 10월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구역 군사분계선상(MDL)에 설치한 동서 800m, 남북 400m 장방형의 지대이며 서울에서 서북방으로 62㎞, 북한의 평양에서 남쪽으로 215㎞, 개성시로부터는 10㎞ 떨어져 있다.

 

판문점은 이 지역의 이름이며 공식 명칭은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이다.

 

판문점은 한국전쟁 전에는 널문이라는 지명으로, 초가집 몇 채만 있던 외딴 마을이었으나 1951 ~ 1953년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세계에 알려졌다. 처음 이곳에 천막을 치고 시작한 휴전회담은 장장 1년 9개월을 끌었고, 휴전회담을 마친 뒤 정정협정 조인을 위해 부근에 목조건물을 지었으며, 그 후 1㎞ 남쪽의 현재 위치로 다시 이전했다. 예전에는 주로 휴전을 관리하는 장소로 이용되었으나, 1971년 9월 20일 열린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을 계기로 군사정전위원회의 회담장소뿐 아니라 남 · 북한간 접촉과 회담을 위한 장소 및 남북을 왕래하는 통과지점으로도 활용되어 왔다.

 

공동경비구역(JSA)이 설치된 이후 쌍방 군정위 관계자들은 구역내에서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6년 8월 도끼만행사건 이후부터 양측간 충돌방지를 위해 군사분계선을 표시하여 경비병을 포함한 모든 군인들은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상대측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며 개인적으로 북한군 병사들과 말을 걸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판문점은 휴전선 155마일 중○○○(?) 한국군과 미군으로 구성된 유엔사 경비대대가 관할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남쪽 유일의 민간인 마을인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 위치하고, 북쪽으로 약 1.8㎞ 떨어진 곳에 북한의 '기정동 마을'이 있다.

 

 

 

 

 

 

자유의 다리

임진각 광장 앞 망배단 뒤편에 놓인 다리로, 1953년 한국전쟁 포로 12,773명이 자유를 찾아 돌아왔기 때문에 이름을 이와 같이 부르고 있다. 원래 경의선 철교는 상 · 하행 2개의 다리가 있었으나 폭격으로 파괴되어 다리의 기둥만 남아 있던 것을 전쟁 포로들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서쪽 다리 기둥 위에 철교를 복구하고 그 남쪽 끝에 이 임시 다리를 설치했다. 당시에는 포로들이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와서는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너왔다고 한다.

다리는 나무를 짜맞추어 만들었는데 특히 힘을 많이 받는 부분은 철재를 혼합하여 사용하였다. 임시로 설치한 다리이므로 건축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전쟁의 대표적인 유산이라 할 수 있다.

 

경의선 장단의 증기기관차

옛 장단역 남쪽 50여m 지점에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멈추어버린 증기기관차 화통이 30(?)년간을 멈춰선 채로 남아 있다. 이 증기기관차는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 군수 물자 수송을 위해 개성역에서 황해도 한포역까지 올라갔다 전세가 악화되어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 1950년 12월 31일 밤늦게 경의선 장단역(장단면 동장리)에서 피폭되면서 탈선하여 그 자리에 멈춰선 증기기관차다. 이 기관차는 검붉게 녹슬고 부식된 채로 반세기 넘게 비무장지대 안에 방치되어 잇었는데, 문화재청은 이를 남북분단의 뼈아픈 역사적 상징물로 보호 · 관리하기 위해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였고 2009년에 현재 위치하고 있는 임진각 관광지로 자리를 옮겨 일반인들에게 남북분단의 아픈 현실을 알리고 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 ~ 1584)는 중종 31년(1536)에 강릉 북평촌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과 함께 본가로 올라와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다. 명종 3년(1548) 13세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걸어졌다. 29세에 호조 좌랑에 처음 임명된 이후 황해감사, 대사헌, 대제학, 호조, 병조,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 실시와 사회제도의 개혁에 노력하였다. 학문에 잇어서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룬 유학자로 근본원리를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학문연구의 목표로 삼았으며, 학문을 이론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책으로 민생과 국가 재정문제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선생의 저서로는 「성리설」, 「성학집요」, 「격몽요결」 등이 있다.

 

현재 묘역은 법원읍 동문리 율곡 선생 유적지 내에 위치해 있는데 선생의 묘와 부인 곽산 노씨의 묘를 비롯해 어머니 신사임당, 아버지 이원수, 누이 매창 등의 가족묘가 조성되어 있다.

 

율곡선생유적지 :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

                            (파주시 법원읍 자운서원로 204)

 

화석정 :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 100-1

              (파주시 파평면 화석정로 152-72)

 

 

 

 

 

 

 

파주의 인물

 

방촌 황희(厖村 黃喜)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며 청백리의 표상인 방촌 황희(厖村 黃喜, 1363 ~ 1452) 선생은 자가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공민왕(恭愍王) 12년(1363)에 개성에서 출생하여 27세 때 문과에 급제 성균관 학록이 되었다.

 

1392년에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는데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추천으로 성균관학관으로 왕이 직접 벼슬을 내렸다. 이후 여러 요직을 역임하면서 조선 태종 대에 국가기반을 확립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세종대에는 20여년 동안 국정을 총리하는 의정부의 최고 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 개척,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하여 세종성세(世宗盛世)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탄현면에 위치한 묘역은 3단으로 넓게 조성되었고, 봉분 역시 규모가 크다. 봉분의 구조는 다른 묘의 형태와는 달리 전면을 ㄷ자 모양으로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하여 전방을 향해 3단의 호석(護石)을 쌓인 봉분과 연결시킨 특이한 구조이다. 묘역의 아래에 신도비가 있는데 연산군 11년(1505)에 세워졌으며 신숙주가 짓고 안침이 썼다. 비문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불가능하며 옆에 1945년에 다시 세운 신도비가 있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황희선생유적비 :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187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동 85번길 3)

 

황희선생묘 :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1

                     (파주시 탄현면 정승로88번길 23-83)

 

 

 

 

 

 

묵재 윤관(墨齋 尹瓘)

고려 예종(睿宗) 때 여진 정벌의 공을 세운 명장 윤관(? ~ 1111)은 본관이 파평(坡平)이며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으로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三韓功臣) 윤신달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을 지낸 윤집형의 아들이다.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정벌에 나섰으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패하고 임기응변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다. 그 후 특수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예종 2년(1107) 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비케 하였다.

 

윤관은 문무(文武)를 겸한 공신으로 예종 6년(1111)에 돌아가자 인종 8년(1130)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묘의 소재를 모르다가 1764년(영조 40) 윤관의 옛 비석의 파편이 발견된 후 영조가 봉분을 새로 조성하고 치제(致祭)하게 함으로써 윤관의 묘소임이 공인되었다. 현재 광탄면 분수리에 자리한 묘역은 크고 웅장하며 봉분과 석물이 단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다. 묘역 아래에는 윤관 장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여충사(麗忠祠)가 자리하고 있는데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윤관장군묘 : 파주시 광탄면 산 4-1

                     (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930)

 

상서대 : 파주시 법원읍 웅당리 330

 

 

 

 

 

 

통일교

 

 

 

 

 

 

 

 

 

총연장 74.0m 교폭 21.0m
설계하중 DB 24
공사기간 1999년 12월 ~ 2000년 12월 31일
발주자 의정부국도유지건설사무소 시공자 동일건설(주)
설계자 (주)동명기술공단 설계책임자 구자갑
감리자 (주)대한건설 ENG 책임감리원 권달중
현장대리인 김재옥 준공검사자 신영각

 

 

지방하천 동문천

 

 

 

 

 

 

 

 

 

밭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

 

 

 

 

 

 

도라지꽃

 

 

 

통일공원 앞 사거리

 

 

 

통일공원 정류장

 

 

 

위치 : 통일로 1592

 

 

 

정류장 번호 : 30534

 

노선버스 051A행복, 051B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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