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산 여행] 02
통일공원 조성 및 충현탑 건립 경위
제1사단은 6 · 25사변 당시 개성, 문산지역 전투에서 청사에 길이 빛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이 찬란한 전공을 위해 용전분투하다 호국의 상으로 장렬하게 산화한 당 사단 출신 2,385주의 호국영령에 대한 명복을 기원하고 그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영원히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1959년 2월 경기도 파주군 월룡면 위전리(CS055844)에 최초로 충현탑이 건립되었으니 통일로의 확장으로 일부 지역이 절단되었다. 당 사단이 4반 세기가 지난 1971년 3월에 다시 이 지역으로 돌아와서 미 제7보병 사단 예하 제79포병대대가 주둔했던 지난날의 격전지인 이곳에 총면적 12,558평에 달하는 통일공원 조성계획을 세워 1972년 4월 10일 착공, 연인원 5,230명, 담프추럭 265대, 도자 18대, 씨멘트 1,250포, 관상수 4,000여본 등 총 경비 500여 만원으로 통일공원을 완공함과 더불어 충현탑을 이전 개수 건립하고 6 · 25사변 23주년을 맞이하여 역대 사단장 및 연대장을 모시고 이에 개막식을 갖는다.
1973년 6월 25일
제21대 사단장 준장 박 학 선
호국 영웅께,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나라를 지켜주셔서
# 고맙습니다
대한민국특수임무유공자회 경기도지부 파주시지회
陸軍諜報部隊第一支隊戰功碑
지대본부 및 파견대장
첩보부대 제 1 지 대 장 육군 소령 김 동 석
보좌관 겸 제2파견대장 육군 중위 김 진 수
제1파견대장 육군 소위 전 진
제3파견대장 육군 상사 이 봉 옥
첩 보 원 한 홍
제5파견대장 첩 보 원 라 철 호
강화파견대장 문 관 김 경 녕
장단분견대장 육군 상사 강 권 식
지대본부 선임하사관 육군 상사 강 영 식
행정반장 육군 중사 서 현 호
공작반장 문 관 김 태 형
공작팀장 육군 상사 정 종 윤
공작팀장 육군 상사 이 태 길
공작팀장 육군 상사 전 용 학
지대본부원
박 용 대 김 동 녕 정 성 규
한 염 훈 최 충 국 송 정 명
박 성 환 김 병 균 강 연
김 동 욱 고 제 승 고 장 창
남 동 희
미 제3사단 파견대
1대 소대장 육군 소위 백 홍 구
2대 소대장 육군 소위 김 진 수
부 관 문 관 김 경 녕
제1 분대장 일등 중사 방 여 순
제2 분대장 이등 중사 김 홍 인
제3 분대장 이등 중사 허 만 구
관리번호 : 15 ㅡ 2 ㅡ 78
현충시설지정서
명 칭 : 육군첩보부대 제1지대 전공비
소재지 : 경기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360-1
내 용 : 비석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74조의 2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위와
같이 현충시설로 지정합니다.
2005년 5월 2일
국가보훈처장
국가유공자
김진수 백영필 김문희 박천보 한인수 김사범 황현성
박종호 김자성 최호영 방여순 김 홍 김은기 강병욱
윤영수 김종국 황낙연 유인주
수훈유공자
김동석 김진수 전 진 이태길 정종윤 허만구 김경녕
라철호 최충국 박용대 김도설 이영길 허지신 정석모
진양원 강 연 강권식 박태욱
건립자
육군첩보부대제1지대전우회
회장 김 진 수
운영위원
백 영 필 김 문 희 최 호 영 한 인 수
김 준 성 양 흥 모 백 경 묵 박 천 보
HID특수임무수행자국가유공자회
파주시 지회장 최 승 영
추진위원
한 영 봉 염 애 식 박 병 도 박 의 철
서 현 국 방 형 진 박 인 환 박 광 수
임 용 진 정 흥 배
강화파견대장 첩보원 김 홍
국가유공자 양 흥 모
전 사 자 백 흥 구 맹 승 열 이 익 남 정 성 모 최 희 순 홍 순 녀
황 임 선 강 병 욱 김 종 국 윤 영 수 황 낙 연
실 종 자 박 노 수 박 노 선 김 진 한 동 방 혁 곽 종 윤 민 치 운
부 상 자 송 영 민 백 경 순 신 영 선 신 달 천
전공비문
1950년 6월 25일 동란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국군이 낙동강까지 후퇴하여 국제 연합군의 지원으로 1950년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고 계속 부진을 거듭하여 통일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뜻밖에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인하여 1950년 12월 하순에는 중공군의 정월 대공세 작전으로 아군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두 번째로 1 · 4후퇴로 인하여 서울이 재차 함락하는 불리한 전세였을 때 육군첩보부대 제1지대는 문산지역에 지대본부를 설치하고 의정부, 동두천지역에는 미 제3사단 파견대를 비롯 6개 파견대로 편성되어 적 후방 깊숙이 침투하여 중공군 제63군, 제64군에 대한 주요작전 계획을 탐지보고하여 연합군의 3월 대반격작전(리타)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미 제8군으로부터 영웅부대로 인정받아 지대장을 역임한 김동석 대령이 영웅으로 추대되었으며 특히 문산파견대장인 김진수 중위는 휘하 무장공작대원들과 함께 대통령 특명으로 휴전회담을 방해 파괴하라는 특별지시를 받고 판문점 휴전회담장을 수차례에 걸쳐 기습작전을 지휘 감행하여 판문점 전시설 등을 파괴하여 회담을 지연시켰으며, 도평리 지역으로 새로 배치되는 중공군 8명 및 관측군관, 통신군관을 생포하여 아군 작전에 필요한 주요 기밀 첩보를 수집하였으며, 1951년 6월에 문산파견대를 비롯 전지대 파견대를 지휘하여 고랑포에 주둔 중이던 인민군 제4사단 사령부를 기습하여 기밀문서 수집과 싸이카 차량 등 다수의 군수물자를 획득하였으며, 대덕산에 주둔 중이던 인민군을 기습하여 수명을 생포하고 다량의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등, 수 많은 작전을 통하여 적군 포로 40여 명을 생포 또는 귀순시키는 전과를 올리는 와중에서 아측 동료들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여 그들의 빛나는 공적을 기리며 명복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 전공비를 세웁니다.
장하다 동지들이여, 고이 잠드시라!
첩보원
곽 순 덕 이 근 종 김 동 혁 공 승 엽 이 인 규 김 준 성 김 연 성
김 형 돈 김 성 곤 김 이 남 윤 선 병 진 교 봉 손 영 철 김 성 호
김 지 숙 강 진 수 이 신 영 김 도 설 이 종 율 김 석 진 우 영 섭
최 정 윤 이 봉 규 김 명 수 이 상 돈 홍 순 문 김 은 기 손 병 호
김 봉 남 김 봉 각 문 일 성 김 은 유 송 영 노 김 형 재 박 선 원
박 길 선 김 수 경 황 경 배 함 성 표 함 주 성 박 태 욱 이 희 섭
신 창 균 진 양 원 임 해 철 허 지 신 정 응 화 유 도 화 정 애 옥
홍 영 순 오 병 하 방 성 영 이 한 경 김 홍 이 종 원 김 선 재
김 성 수 김 윤 수 황 규 범 차 상 빈 곽 종 은 노 준 우 차 상 학
장 석 주 김 윤 배 이 소 환 김 중 수 김 기 수 차 상 복 차 상 철
우 두 영 소 원 준 김 윤 식 이 대 영 최 인 환 신 달 천 여 성 엽
이 종 철 김 학 명 조 영 환
후원자
파주시장, 보병제1사단장
한국자유총연맹파주시지부
서기 2004년 10월 30일 세움
육군첩보부대 제1지대 전공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15ㅡ2ㅡ78
관리자 : 대한민국HID제1지대특수요원전우회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360ㅡ1
1950년 6월 25일 동란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국군이 낙동강까지 후퇴하여 국제 연합군의 지원으로 1950년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고 계속 부진을 거듭하여 통일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뜻밖에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인하여 1950년 12월 하순에는 중공군의 정월 대공세 작전으로 아군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두 번째로 1 · 4후퇴로 인하여 서울이 재차 함락하는 불리한 전세였을 때 육군첩보부대 제1지대는 문산지역에 지대본부를 설치하고 의정부, 동두천지역에는 미 제3사단 파견대를 비롯 6개 파견대로 편성되어 적 후방 깊숙이 침투하여 중공군 제63군, 제64군에 대한 주요작전 계획을 탐지보고하여 연합군의 3월 대반격작전(리타)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미 제8군으로부터 영웅부대로 인정받아 지대장을 역임한 김동석 대령이 영웅으로 추대되었으며 특히 문산파견대장인 김진수 중위는 휘하 무장공작대원들과 함께 대통령 특명으로 휴전회담을 방해 파괴하라는 특별지시를 받고 판문점 휴전회담장을 수차례에 걸쳐 기습작전을 지휘 감행하여 판문점 전시설 등을 파괴하여 회담을 지연시켰으며, 도평리 지역으로 새로 배치되는 중공군 8명 및 관측군관, 통신군관을 생포하여 아군 작전에 필요한 주요 기밀 첩보를 수집하였으며, 1951년 6월에 문산파견대를 비롯 전지대 파견대를 지휘하여 고랑포에 주둔 중이던 인민군 제4사단 사령부를 기습하여 기밀문서 수집과 싸이카 차량 등 다수의 군수물자를 획득하였으며, 대덕산에 주둔 중이던 인민군을 기습하여 수명을 생포하고 다량의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등, 수 많은 작전을 통하여 적군 포로 40여 명을 생포 또는 귀순시키는 전과를 올리는 와중에서 아측 동료들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여 그들의 빛나는 공적을 기리며 명복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 전공비를 세웁니다.
한국전 순직종군기자 추념비
한국전 순직종군기자 추념비
○ 위치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통일공원"
○ 건립년월일 : 1977년 4월 27일
○ 건립자 : 한국기자협회
○ 규모 : 기단높이 : 1.4m 높이 10m
부지면적 : 25평
○ 건립개요 : 6 · 25 당시 종군기자들의 프레스센터였던 문산역의 「평화열차」가 내려다 보이는 유서깊은 취재현장에 세워
진 이 비는 한국전쟁을 전세계에 보도하다 희생된 국내외 기자 18명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전국 일선 기자들
의 성금과 사회 각계의 지원금에 의해 건립됐다. 이 비의 설계와 조각은 홍익대 최기원 교수가 맡았으며 비문은
유광열, 홍종인, 최석채, 윤종현 씨 등 4명의 언론인이 작성했다.
○ 비 모 양 : 이 비는 타자기 모양의 화강암으로 된 받침대 위에 저널리스트의 머리글자 「J」자를 딴 텔리타이프 종이가 높
이 솟아있으며 비 윗부분에는 승리의 월계수와 기자정신을 상징하는 펜을 쥔 손과 한국전쟁을 뜻하는 지구의가
조각돼 있다.
○ 초모행사 : 한국기자협회는 매년 추모비 건립일인 4월 27일 당시 종군기자들을 비롯한 언론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이 땅
에 고귀한 생명을 바친 국내외 종군기자 18명의 영령을 추모하고 그들의 기자정신을 기리고 있다.
순직 종군 기자 명단
한규호 HAN KYU HO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한국, 서울신문 1950. 6. 29
어니 필러 ERNIE PEELER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미국, PACIFIC STARS & STRIPES 1950. 7. 10
레이 리처즈 RAY RICHARDS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미국, INS 1950. 7. 10
윌슨 필더 WILSON FIELDER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미국, TIME & LIFE 1950. 7. 22
맥시밀리앵 필로넹코 MAXIMILIEN PHILONENKO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프랑스, AFP 1950. 7. 27
앨버트 힌튼 ALBERT HINTON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미국, JOURNAL & GUIDE 1950. 7. 27
스티븐 시몬즈 STEPHEN SIMMONS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영국, PICTURE POST 1950. 7. 27
제임즈 서플 JAMES D. SUPPLE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미국, CHICACO SUN TIMES 1950. 7. 27
윌리엄 무어 WILLIAM MOORE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미국, AP 1950. 7. 31
이안 모리슨 IAN MORRISON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영국, THE TIMES 1950. 8. 12
크리스토퍼 버클리 CHRISTOPHER BUCKLEY ㅡㅡㅡㅡㅡㅡ 영국, THE DAIRY TELEGRAPH 1950. 8. 12
찰즈 로제크란스 CHARLES ROSECRANS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미국, INS 1950. 9. 7
켄 이노우에 KEN INOUYE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미국, INS 1950. 9. 7
프랭크 에머리 FRANK EMERY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미국, INS 1950. 9. 7
장 마리 드 프르몽빌 JEAN MARIE DE PREMONVILLE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프랑스, AFP 1951. 2. 11
윌리엄 그래이엄 WILLIAM H. GRAHAM ㅡㅡㅡ 미국, NEW YORK JOURNAL OF COMMERCE 1951. 3. 3
데리크 퍼시 DEREK PEARCY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영국, REUTERS 1951. 5. 25
호르헤 테오도르 JORGE T. TEODORO ㅡㅡㅡㅡㅡㅡ 필리핀, UN DEPT. OF PUBLIC INFO 1952. 12. 27
여기는 보도의 명예와 승리가 서린 곳
공산군의 침략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인류의
자유가 위협 당했을 때
유엔군 용사와 더불어 필탄을 퍼붓다 젊음을
이 땅에 바친 여러 나라 펜의 기수 18명
먹물은 스러져도 기자의 얼은 푸르다
그 영광의 희생 길이 정의를 밝히리
전 언론인의 뜻을 모아 한국기자협회 건립
조각 최 기 원
1977년 4월 27일
殺身成仁塔
건립기
이 탑은 2000년 6월 27일 1사단 전방 비무장지대 수색작전 중 지뢰 폭발로 두 다리가 절단된 상황에서도 부하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보여준 이종명 중령과 설동섭 중령의 참된 군인정신을 모두의 귀감으로 삼고 그 뜻을 영원히 기리고자 길형보 육군참모총장의 발의로 육군 전 장병의 정성을 모아 건립되었음.
이 탑에 쓰인 돌은 송석구 동국대학교 총장이 불교병원에 세우려고 준비한 자연석을 두 대대장의 숭고한 정신을 기면하는 데 쓰이는 것이 더욱 뜻 깊다고 생각하시어 기증한 것임.
2000년 10월 19일
제 1 보 병 사 단 장 소 장 송 영 근
건립추진위원
추진위원장 사 단 장 소장 송 영 근
추진위원 행정부사단장 대령 장 진 화
작전부사단장 대령 성 영 민
참 모 장 대령 박 시 헌
11 연 대 장 대령 김 광 영
12 연 대 장 대령 김 요 환
15 연 대 장 대령 장 건 영
포 병 연 대 장 대령 방 동 환
기 무 연 대 장 중령 이 필 건
인 사 참 모 중령 이 상 기
공 병 대 대 장 중령 장 병 록
정훈 공보참모 소령 이 학 선
위험하니 내가 간다
작사 : 김정식
작곡 : 최영섭
1절 : 긴장 속의 최전선 밤낮없이 살피고
떠나는 그 날까지 땀 젖은 전투복
저기는 지뢰지대 위험하니 내가 간다
지휘관의 그 외침 부하위한 사랑이네
2절 : 눈부신 기백은 지축을 흔들었고
불꽃같은 정열로 온몸을 던졌네
여기는 지뢰지대 위험하니 오지 마라
비장한 그 목소리 우리들이 표상이네
후렴 : 고귀한 그 정신 길이길이 받들어
사나이 붉은 가습 나라위해 바치리
이 노래는 육군3사관학교 김정식 중령이 작사하고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자로 유명한 최영섭씨가 작곡하여 육군 장병에게 가장 독특한 군가임.
이 한 몸 祖國과
軍과 部下를
爲하여
작전참가자 명단
전임 수색대대장 중령 이 종 명
후임 수색대대장 중령 설 동 섭
수색3중대장 대위 박 영 훈
정 보 장 교 대위 박 기 범
2 소 대 장 중위 이 권 형
부 소 대 장 하사 이 철 형
수 색 병 병장 송 상 민
수 색 병 병장 이 정 훈
수 색 병 병장 최 재 우
통 신 병 상병 이 정 훈
K-201 사수 병장 홍 혁 의
지뢰탐지병 상병 정 종 근
통 신 병 상병 유 기 원
K-201 사수 상병 이 현 석
수 색 병 상병 최 용 환
통 신 병 일병 허 기 영
통 신 병 일병 최 성 록
K-3 사수 일병 정 진 환
K-3 부사수 일병 여 남 엽
수 색 병 이병 심 성 보
수 색 병 이병 조 정 태
살신성인탑
2000년 6월 27일 10 : 47분경, 육군 제1보병사단 수색대대장 이종명 중령(전임)과 설동섭 중령(후임)은 대대장 임무 인수인계차 DMZ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19명의 부대원과 함께 수색작전 중 미상의 지뢰폭발로 설중령이 두 다리를 잃게 되고 이 중령과 수색3중대장 박영훈 대위가 파편상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이 발생하자 이 중령은 자신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부상자들의 신속한 조치와 부하들의 안전을 고려하여 "너희들은 들어 오지 마라! 위험하니 내가 들어가겠다. 후송헬기를 신속히 요청하라!"며 다시 설중령을 구하기 위해 혼자서 들어가다가 자신도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게 되었다.
이렇게 두 다리가 모두 절단된 극한 상황에서도 두 대대장은 더 이상의 부하희생을 막기 위해 "위험하니 들어 오지 마라! 내가 기어 나가겠다"라고 부하들의 접근을 막았으며, 자신들의 피 묻은 총과 철모를 끌어안고 기어나오는 초인적인 희생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는 소총과 철모를 두고 나올 경우 부하들이 다시 들어가 장비를 회수할 때의 위험까지 고려한 것이다. 또한 두 대대장은 후송되는 동안에도 "부하들은 다친 사람이 없는가?". "부대에 누를 끼쳐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이며 의식을 잃었다.
이러한 이들의 행동은 평소부터 몸에 베어 있었던 군인정신과 부하 사랑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참 군인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육군은 이 뜻을 영원히 귀감으로 삼고자 이 탑을 세우고 「살신성인탑」으로 명명하였다.
2000년 10월 19일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충 현 탑
관리번호 15ㅡ2ㅡ23
건립자 : 육군 보병 제1사단
관리자 : 육군 보병 제1사단장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산42
6 · 25 당시 문산전투에서 산화한 육군 제3270부대 장병 2,385명에 대한 호국 영령들의 명복을 기원하고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1972년 12월 1일 육군 보병 제1사단에서 이 탑을 건립하였다.
[비 문]
"붉은 무리 탱크를 앞세우고 임진강을 넘어 오던 날 오직 죽음 하나로 지켰던 내 조국, 그 날 1사단이 4반세기의 성장 후에 주인으로 돌아와 통일의 지름길 위에 가신 님의 거룩한 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여기 통일공원에 단을 세우다."
붉은 무리 탱크를 앞세우고 임진강을 넘어 오던 날 오직 죽음 하나로 지켰던 내 조국, 그 날 1사단이 4반세기의 성장 후에 주인으로 돌아와 통일의 지름길 위에 가신 님의 거룩한 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여기 통일공원에 단을 세우다.
1972. 12. 1
보병 제1사단 장병일동
육군 보병제1사단 ㅡ 천하제일 전진부대
우리는 단 하나의 공비침투도
단 한 치의 땅도
결코 적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自由와 平和를 指向하는 우리 大韓民國에 以北傀儡集團은 檀紀 四二八三年 六月 二十五日 未明을 期하여 無慈悲하게 大兵力과 重裝備로써 不意의 不法南侵을 敢行하여 善良한 우리 國民의 生命과 貴重한 財産을 餘地없이 殺害剝奪하고 天人이 共怒할 蠻行을 恣行하여 自由大韓의 安寧秩序를 威脅하였을 뿐 아니라 自由世界의 平和를 攪亂케한 赤狗傀儡軍은 數萬餘名을 動員하여 이곳 汶山을 비롯해서 開城 · 長湍 · 高浪浦等方面으로부터 首都 서울을 目標로 来侵하는 것을 白善燁 准將 (現 陸軍大將)이 指揮하는 우리 國軍 第一師團 將兵의 崇高한 愛國心과 見敵必殺의 必勝精神으로 敵의 戰車와 對決하여 裝甲部隊의 接近을 沮止擊破하고 決死隊를 編成하여 敵의 尖兵部隊를 全滅시켜서 敵의 指揮系統을 痲痺시켰으며 局部的인 抵抗과 正面突破作戰을 展開하여 敵의 浸透의 遲延을 꾀하여 首都 서울 防衛에 至大한 功績을 남긴 우리 第一師團 勇士의 武功을 높이 讚揚하여 肉彈으로 祖國을 防禦하고 大韓의 守護神이 된 國軍將兵 二三八五柱 英靈 앞에 民族의 이름으로 그 冥福을 빌며 子孫萬代의 繁榮과 아울러 無窮花 이 江山에 滿發한 꽃송이를 千秋에 빛낼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이유중 대령 기념비
이 기념비는 천상천하 제1보병사단 12연대 3대대장 이유중 대령의 투철한 군인정신을 높이 찬양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고 이유중 대령은 1980년 겨울 DMZ에서 수색정찰작전을 수행하던 중 생명까지 위태로운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작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므로 병원에 가지 않고 부상당한 몸으로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더욱이 작전이 종료되었을 때 곧바로 병원에 갔어야 했으나 부대가 안전하게 복귀할 때까지 지휘하다가 치료의 시기를 놓쳐 순직하였다.
이는 평상시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 군인의 책임 정신, 솔선수범적 근무태도를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그는 항상 「是短劍一步前進」 (너의 칼이 짧으면 그만큼 한발 앞으로 나가라 / 어떠한 어려움도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다.)이라는 말을 가슴에 갖고서 부대를 지휘하였다.
고 이유중 대령이 보여준 숭고한 정신과 솔선수범적 태도는 모든 군인의 귀감이며, 국가와 군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영원히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1981년 12월 23일
李大領의 部隊指揮哲學
是 短 劍 一 步 前 進
여기
호국의 선봉으로
젊음을 다바친
이유중 대령의
전진 혼을 기린다
천하무적 제1사단 장병일동
이유중 대령 약력
1945년 4월 8일 경북 영덕군 남정면 도천리 190번지
이위황 씨의 차남으로 출생
1964년 경북고등학교 졸업
1968년 육군사관학교 24기 소위 임관
1969년 파월 백마소대장
1971년 32사단 수색중대장
1976년 55경비대대 부대대장
1979년 육군대학 24기 졸업 제1사단 작전처 보좌관 및 정보참모
1980년 7월 20일 12연대 3대대장
1980년 12월 29일 비무장지대 사계청소시
우하부 늑골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고도
애국 충정과 불굴의 군인정신으로 부대를 계속 지휘
1981년 5월 25일 수도통합병원 입원
조국 통일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81년 6월 21일 37세로 순직
유족으로는 장윤정 여사와 희승, 영주 두 딸이 있음
소위 김만술 상
소재지 : 파주시 봉서리 산 42번지
6 · 25 자유수호 전쟁 당시 1953년 7월 연천 북방의 베티고지에서 불과 1개 소대의 병력으로 중공군 2개 대대를 맞아 생사를 초월한 필승의 신념으로 최후까지 싸워 물리쳐 세계 전쟁사의 유래가 없는 대승을 거두어 국군의 용맹성을 유감없이 과시한 보병제1사단 11연대 2대대 6중대 김만술 소위의 베티 고지 혈전신화를 기념하고자 1996년 12월 4일 고 김만술 소위 흉상을 건립하였다.
김만술 소위
김만술 소위는 제1사단 제11연대 제6중대 제2소대장으로 1953년 7월 15일 중서부전선 당 부대 전초진지인 베티고지에서 불과 1개 소대 병력으로 13시간 동안 인해전술로써 파상 공격해오는 중공군 2개 대대를 수류탄과 백병전으로 격퇴시켜 사살 365명이라는 혁혁한 전과를 세워 금성태극무공훈장과 한국인으로서 최초 미국십자훈장을 수여 받은 전쟁 영웅
임광빈 중령 기념비
死必忠誠으로 꽃피운
軍人精神을 높이 기리고자
이 碑를 건립한다
천하제일 제1사단 장병일동
약력
1957. 10. 7 충남 당진 출생
1976. 1月 의정부공고 졸업
1978. 9. 8 육군 소위 임관(3사 15기)
1978 ㅡ 79 32사단 98연대 소대장
1979 ㅡ 80 62사단 108연대 작전장교
1981 ㅡ 83 39사단 117연대 중대장
1985 ㅡ 88 306보충대 군수과장
1989. 4. 3 보병제1사단 11연대 1대대 작전장교
1989. 8. 23 을지훈련기간 적 주력 섬멸 전투훈련 중 순직
유족으로는 김종예 여사와 준혁, 수정 두 자녀가 있음
임광빈 중령 기념비
소재지 : 경기도 파주군 파주읍 봉서리
고 임광빈 중령은 1989년 4월 24일 보병 제11연대 1대대 작전장교로 보직되어 우수하게 근무하던 중 동년 8월 22일 '89을지훈련기간 적 주력 섬멸 전투훈련 중 임진강에서 부대원을 안전하게 도하시킨 후 자신은 급류에 의해 순직하였다.
이에 고인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살신성인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1989년 12월 29일 여기에 기념비를 세웠다.
肉 彈 十 勇 士 忠 勇 塔
10용사의 영혼을 따라
시인 김광섭(金珖燮)
해방이 되자 四十년의 슬픔이 가고
서광이 비치던 날
강산에 검은 구름이 도니
38선상의 옥운이리라
왼 세계가 하늘이 주신 나라
민국을 공인하여
국위가 四해에 빛나며
옥운을 쓸어버리라는
독립의 새벽 밝어 오는데
반만 년 역사의 혈조에
누가 독을 부었느뇨?
독을 퍼져서 강토를 주고
정권을 얻어 민족의 살을 삼키려 할제
민족의 정기 장하다
예명같이 국군의 심장에 뫃여
피로 엉키고 뜻으로 뭉쳐
영생하는 무궁화 꽃을 피우려 하거늘
동족으로 위적같이 총검을 들고
어둠을 타서 살인과 방화를
꾀하는 불의의 무리 난동하는
단발마 앞에
국토의 안전을 보장하고
민족의 영예를 보존하며
민국의 역사를 보호하는 불멸의 영혼
그대 이름 10용사이니
아버님을 돌아보지 않고
어머님을 생각지 않고
목숨으로 나라를 지키랴는
단심 푸은 하늘을 우러러
가슴에 폭탄을 안고
몸과 함께 적진 속에서 폭발한
아! 그대들은 민족 최초의 감정의 표현이요
민족 최후의 정신의 화신이니
역사의 아버지와 어머님, 아들과 딸
또한 모든 미래의 장병들도
모다 그대의 뒤를 따라
끝없는 행진을 계속하리니
우리의 몸, 우리의 마음
영원토록 그대의 가슴속에서
그대의 피를 받아 이 강산 이 국토를 지키고
사랑하며 빛내리라.
2012. 5. 3
육탄10용사기념사업회
회장 윤 종 인 제작
육탄 10용사의 송악산 전사(戰史)
서기 1948년 11월 국군 제1사단(사단장 김석원 준장) 제11연대(연대장 최경록 대령)는 수원에서 문산으로 이동하여 미 제7사단 제32연대로부터 고랑포에서 청단에 이르는 38선 경비구역을 인수하였다.
292 고지, UN 고지, 155 고지, 바둘기 고지 등을 반원형으로 된 시가지를 이룬 지역을 껴안고 산줄기는 38선 북쪽으로 뻗어 있어 아군에게는 절대적으로불리한 지형이었다.
이즈음 북한지역에는 소련의 괴뢰정권이 수립되어 남한을 무력으로 공산화하려는 계획과 준비로 38선 전역에 병력을 증강하고 많은 군사장비를 도입, 배치하여 남침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지만 미군은 소극적인 경비책으로 송악산 일대를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고 오직 주요간선도로 요지에만 초소를 설치, 운용하다가 국군에게 인계하고 귀국하였기 때문에 피아간의 전력균형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군이 열세에 있었다.
문산에 본부를 둔 제11연대는 김종훈 소령의 제2대대를 38선 전면인 청단, 연안, 백천, 송악산 일대에 분산 배치하여 진지구축과 경비에 임하게 하고 제1대대는 연대 후방에서 신병교육을 전담, 제3대대는 인접 제15연대로 배속파견케 하였으며 하사관 교육대, 1개 중대가 연대 직할로 교육훈련 중에 있었다.
제2대대가 38선 전면의 불리한 지형과 적의 강력한 방해를 무릅쓰고 진지구축이 강행되고 경비임무가 점차 강화되자 적은 이를 저지하고 계속적인 우위를 유지함을 목적으로 마침내 아군지역을 점령, 탈취할 계획으로 1949년 4월 25일 남천점에서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 제1사단장은 제3연대 병력 약 1,000명을 송악산 후방 냉정리에 집결시키고 공격준비를 완료한 후 5월 3일 날이 샐 무렵 송악산 능선을 따라 일제히 기습 남침을 자행 38선 남방 100m 지점의 292 고지를 순식간에 유린하고 연이어 아군의 UN 고지, 155 고지, 비둘기 고지 등을 점령당했다.
급보를 접한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이를 즉시 보고함과 동시에 부대를 반격 태세로 전환하기 위해 훈련 중인 제1대대 예하 이승준 대위의 제3중대 채명신 대위의 제4중대를 제2대대에 증원시켜 5월 4일 날이 샐 무렵 UN 고지 전면을 공격하도록 하고 마침 행군훈련 중이던 김영직 대위의 하사관 교육대를 즉각 개성으로 복귀시켜 신관지서 후방에서 비둘기 고지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공격지역은 노출된 급경사와 하루밤 사이에 설치된 10개의 지붕이 있는 진지에서 중기관총 및 자동포로 공격을 해와 공격부대는 7부능선에서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희생자만 속출시키다가 부득이 공격을 중지하고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시 30분경 현지에서 재공격을 위한 긴급 작전회의가 열리고 실지 탈환에는 10개소의 지붕이 있는 진지를 파괴함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육탄공격만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회의 끝에 사단 공병장교인 박후준 소위의 고안으로 81㎜ 박격포탄에 폭약을 장치하여 이를 휴대하고 육탄공격을 감행하도록 준비가 되었다.
한편 이 소식에 접한 하사관 교육대의 김성훈 소위의 제1소대에서 소대장 자신을 비롯하여 전원이 특별공격에 가담하겠다고 자원해 나섰다. 그러나 공격조의 인원 제한 때문에 지원순으로 선발하여 서부덕 이등상사를 공격대장으로 하고 김종해, 윤승원, 이희복, 박평서, 황금재, 양용순, 윤옥춘, 오제룡 등 9명의 공격조가 선발되어 12시를 기해 목표지점을 향햐 출발했다.
특공용사들은 비둘기 고지, UN 고지 등 각각 분담된 목표를 향해 200m 지점까지 포복으로 접근케하고 우리 군인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서 대기공격부대의 모든 화력이 동원되었으며 영등포로부터 급거 개성에 도착한 노재현 대위가 포병 제6대대 105㎜포 15문과 57㎜ 대전차포 2개 중대를 통합 지휘하여 엄호사격을 가했다.
그 결과 공격조는 적의 완강한 저항과 기관총 사격으로 많은 총상을 무릅 쓰고 오직 불타는 구국일념 하나로 목표지점까지 기어히 접근하여 육신과 더불어 뛰어드니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은 폭음 포연과 함께 인민군의 지붕이 있는 진지가 일시에 날아가고 말았다.
이때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하사관 교육대가 비둘기 고지를 김종훈 소령의 공격 부대는 UN 고지를 각각 육박으로 공격을 감행함으로서 14시경에는 무난히 탈환하게 되었고 이는 특공용사들의 장열한 육탄 공격이 이루어진 결과이었다.
또한 이에 앞서 12시경 중화기 소대 분대장인 박창근 하사가 292 고지 동북방 160m 지점의 토치카를 파괴하기 위하여 단신으로 7개의 수류탄을 가지고 돌진하다가 전사하였기에 위의 9용사와 함께 육탄 10용사라 명명하게 되었으며 이 전투에서 제2대대장 김종훈 소령, 하사관 교육대장 김영직 대위, 제1소대장 김훈성 소위, 육탄 10용사 등 장병 39명이 전사하였다.
특히 육탄 10용사는 조국을 위한 거룩한 무훈은 호국의 영웅으로 청사에 영구불멸한 신화를 창조하였기 때문에 여기 전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여 후세에 남긴다.
2012. 5. 3
육탄10용사기념사업회
회장 유 종 인 제작
육탄십용사충용탑
소재지 :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1949년 5월 송악산 전투에서 박격포탄을 안고 적기관총 진지에 몸을 던져 장렬하게 산화함으로서 나라를 지킨 보병 제1사단 11연대 육탄10용사의 충혼을 위무하고 이 분들이 보여준 살신구국의 군인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육군 전하사관의 후원으로 1980년 5월 3일 건립하였다.
주차장
6 · 25 전쟁 전투현장 알림판
이 곳은 6 · 25 전쟁 당시 국군1사잔이 초기전투(1950. 6. 26. ~ 1950. 6. 27.), 신정공세(1 · 4후퇴 1951. 1. 1. ~ 1951. 1. 4.), 중공군 5차(4월) 공세 (1951. 4. 22. ~ 1951. 4. 25.)를 막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으로 2009 ~ 2019년까지 육군 제1군단에서 6 · 25 전사자 유해발굴을 실시한 결과 군단은 총 562구의 호국영웅을 발굴하였으며, 이 지역에서는 182구(노상리 77고지 22구, 일월봉 3구, 임진각 1구, 영평산 52구, 율곡리 4구, 금파리 72구, 두포리 22구, 당동리 1구, 운천리 2구, 백학산 1구, 봉암리 2구)의 유해와 유품 7,000여 점을 발굴하였습니다.
그래서 전사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명예를 고양시키며 유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풀어드리고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그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나라사람과 호국보훈의식을 함양케 하고자 국방부, 육군 제1군단 · 제1사단, 파주시가 함께 알림판을 설치하였습니다.
직도 수습되지 못한 호국용사들의 유해를 찾아 명예를 되찾아 드리는 것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영원한 책무임을 생각하고 마지막 한 분의 전사자 유해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바랍니다.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호국 영령들의 영전에 삼가 고개숙여 명복을 빕니다.
국방부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육군 제1군단
ROKA 1st Corps
제1사단
The 1st Infatry Division
파주시
PAJU City
1. 6 · 25 전쟁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이란?
6 · 25 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쳤으나 미처 수습되지 못한 채 아직도 이름 모를 산야에서 홀로 남겨진 12만 4천여 위 호국용사들의 유해를 찾아 국립현충원에 모시는 국가적 호국 보훈 사업입니다.
2. 6 · 25 전사자 유가족을 찾습니다.(직계 가족 친, 외가 8촌까지 1인 다수 채취가능)
전사자 유해는 2000년부터 발굴되고 있으나 아쉽게도 단서가 부족하여 유해와 유가족의 유전자(DNA)를 비교분석하여 유가족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에 따라 유가족의 DNA검사를 위한 시료채취가 (입 안의 분비물)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 단 한번의 참여로 돌아오지 못한 혈육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참여시 모료건강검진 및 기념품 제공 / 유가족 인정시 10만원 / 신원 확인시 1,000만 원 이하의 포상금 지급)
여러분의 사소한 제보가 전사자를 찾는데 결정적인 소중한 단서가 됩니다. (소정의 포상금 지급 20 ~ 70만 원) 국방부 유해발굴단 : 1577 ㅡ 5625(아! 육이오) 제1군단 : 031 ㅡ 940 ㅡ 5625(내선 1150 ~ 4) |
蓋馬高原 反共 遊擊隊 慰靈塔
蓋馬高原 自由義兵
一九七二年 七月 十日
大統領 朴 正 熙
개마고원 반공유격대 위령탑
1945년 8월 15일 일제치하에서 해방과 동시 국토의 절반인 38선 이북이 공산화되고 김일성의 학정이 날로 심해 인간의 기본권리인 자유마저 빼앗기게 되자 함경남도 풍산군에서 반공청년들이 서북광복동지회를 조직하고
1. 우리는 공산당을 타도한다.
2. 우리는 민주사회의 역군이 된다.
3. 우리는 자주독립을 쟁취한다.
는 강령 아래 개마고원 일대에서 대 공산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전력이 날로 강해지자 당황한 공산집단은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소탕전은 개시하였다. 이 전투로 희생된 투사의 수가 200여 명에 이르렀다. 투사들은 굴하지 아니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계속 항쟁하다가 1 · 4후퇴로 일부는 남하하고 일부는 공산치하에서 끝내 자유의 빛을 보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한민국정부는 이들의 투철한 반공사상과 애국심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 본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1987년 6월 24일 글 김 진 희
慰靈塔揮毫 國會議員 朴 權 欽
慰靈塔建立功勞者
國會議員 金 在 光
陸軍中將 崔 枰 旭
陸軍少將 金 東 鎭
坡州郡守 愼 重 大
慰靈塔建立協贊
財団法人 豊山奬學會 理事長 吳 昌 國
前 國會議員 申 東 寬
沿革碑建立者
金 海 洙, 崔 秉 屹, 鄭 尙 周, 李 春 根, 金 桂 木, 李 桂 浩
朴 景 華, 金 鷹 世, 金 桂 弘, 金 在 哲, 金 兪 光
횃불이어라
白頭의 영봉 우러러 보이는
蓋馬高原 줄기줄기 마다
正義의 횃불 훨훨 타오르고
공산학정에 저항하는
젊음의 義氣 하늘로 치솟다
一九四八년 그로부터 三년
오직 自由 자유를 위해
혹한과 눈보라 속
고독과 절망을 헤치면서
붉은 이리떼 무찔렀도다
하여 저 능선마다 골짜기마다
숱한 피 먹음었고
군번도 계급도 없이 쓰러져 간
自由義兵 그 수를
아 헤아릴 길 없구나
英雄들이시여
그대들 功勳 찬란히 빛나리니
언제까지 언제까지나
自由의 真實
만방에 떨치리라
朴慶錫 詩
高琳順 書
塔 說明文
塔名稱 : 蓋馬高原 反共 遊擊隊 慰靈塔
建立日 : 一九八七年 六月 二四日
塔높이 : 一二미터
座台面積 : 一一九제곱미터
塔높이 一二미터, 塔身의 크고 작은 三個, 八個의 날개 깃은 三八線을 意味하며 塔上段의 횃불은 遊擊隊 隊員들의 反共精神과 사라져간 隊員의 永生을 빛내기 위한 것이다.
設計者 · 京南建築
監理者 · 正仁建築
施工者 · 三悳公司
監 督 · 南 基 湜
韓國農民文學家協會
會長 月仁 李 昌 煥贈
國會副議長 金 在 光贈
1990. 10. 25.
建立記
一九四五년 八月 十五日 解放과 더불어 三八線 以北이 共産 治下가 되어 그 虐政에 抵抗 뜻있는 젊은이들이 모여 蓋馬高原 一帶에서 反共 遊擊戰을 벌이다.
하여, 鬪士들이 數없이 共産徒輩들의 총칼에 犧牲되었다. 後日 六 · 二五動亂으로 生存者 一部가 南下하여 當時 遊擊隊長이던 金峰이 뜻있는 이들을 모아 蓋馬高原 反共遊擊隊 記念 事業會를 設立, 國家의 支援으로 犧牲된 분들의 永生을 기리기 爲해 이곳에 塔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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