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여행ㅡ아내와 함께(1)]
수원역몰 11번 출입구
할로윈 데이
모든 성인 대축일 전 날인 10월 31일 밤을 기념하여 행해지는 영미권의 전통 행사.
한국어 국문 표기로 핼러윈이라고도 하지만 할로윈의 사용률이 압도적으로 많고 보편화되어 있다.
[출처 : 나무위키]
수원역 테마거리
회전 로터리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고등로85(고등동)
경기도의회
오월걸상 ㅡ 홍성담 作(2020. 5)
경기도청 앞 회전 로터리
경기도청 입구
孝園亭
장승과 정자
나의 아내
휴먼시티 수원
사람이 반갑습니다
소나무와 장승
거센 비 눈 바람 꿋꿋하게 이기고 휘어진 세월 속 소나무 꽃이 솔방울되어 부드럽게 단단히 늙어지고 늘 푸른 잎, 우리들을 향해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지요. 그리운 어머니의 따뜻한 품과 같습니다.
먼 옛날 조상님께서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겼던 장승(長栍)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그린 우리의 모습이지요.
여기에 나란히 서 있는 웃음 넘치는 3代 가족 일곱 장승은 우리들 가족의 행복과 건강을 늘 기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크게 웃습시다
하하 호호 깔깔"
시민회관
팔달산 산책로
위치표시
팔달 3ㅡ12
갑자기 헬기소리가
헬기가 왜 떴을까?
헬기가 지난 후 꺾어진 소나무 가지들
회차구간
팔달산 고양이
故 空軍勇士 髙聖祚 功勳之碑
단기 四二八四年 三月 七日 戰死
當 二十三才
父 髙仁煥
3200849
家族 関係
水原市 梅山路 一街 五九의 六
兄 聖德, 聖喆, 聖沢, 聖知
弟 聖善, 聖敎
妹 玉順
姪 英鍾
西紀 一九五一年 辛未 七月 日
空軍 偵察隊 建立
산책하는 여인들
수원화성 관광안내도
세계유산 화성(世界遺産 華城)
화성은 조선 시대 화성유수부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수원의 행정기구인 읍치를 팔달산 동쪽 아래로 옮기고, 1794년에 축성을 시작해 1796년에 완성했다. 전체 길이는 5.74㎞에 달한다. 4개의 성문을 비롯해 망루의 일종인 공심돈(空心墩), 대포를 둔 포루(砲樓), 요충지에 세운 누각인 각루(角樓), 군사 지휘소인 장대(將臺) 등을 두루 갖췄다.
화성은 지형을 살려 쌓는 조선의 축성 전통을 따르면서도, 새로운 방어 시설을 도입한 성곽이다. 실학자 정약용은 조선과 중국의 축성 방식을 총망라하여 성곽의 규모와 방어 시설, 재료를 계획했고, 자재를 쉽게 들어 올리는 거중기와 튼튼한 수레 유형거를 발명하여 공사 비용도 줄였다. 축성의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공사 보고서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건축도면과 축성기계의 그림, 사용한 재료의 치수와 수량까지 수록되어 있어 현재까지도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수리 보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화성은 동서양의 기술 교류를 보여 주는 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지형을 살린 우수한 군사 건축물로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화성은 성곽뿐 아니라 18세기 말에 만들어진 성곽도시이자 계획 신도시라는 점에서도 큰 가치가 잇다. 서울과 삼남 지방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에 자리 잡은 화성에는 경제적으로 부강한 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정조의 뜻과 실학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SNACK BAR와 수원화성안내소
진달래화장실
화성성곽
위치표시
팔달 2ㅡ15
소나무재선충병 예방주사 시행목
화성어차 통행로
서W12 서1치
西一雉 서1치는 서북각루와 서포루砲樓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치성은 보통 좌우방어 시설과 100m 이상 거리를 두고 만들었으나, 서1치는 서북각루에서 약 55m 떨어진 지점에 있다. 화서문에서 뻗은 성벽이 팔달산 정상을 향해 크게 꺾이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치성을 가깝게 설치한 것이다.
*용도 :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싸인 통로로 서남암문에서 서남각루에 이르는 길
「정리의궤」 치성외도(좌), 치성내도(우)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5년 수리
서북각루를 배경으로 찍은 아내 사진
서W13 서북각루
西北角樓 서북각루는 화성 서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서북각루는 팔달산으로 오르는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자리잡아 서북쪽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래층에는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면에 널빤지 문을 달고 구멍을 내서 적을 감시했다.
「정리의궤」 서북각루외도(좌), 서북각루내도(우)
● 1796년(정조 20) 창건
● 1975년 복원
화서문 방향
화성어차
화서공원
화서문(우)과 서북공심돈(좌)
행궁동
왕의 골목
코스안내
골목 하나 : 2.3㎞[1시간 소요] ㅡ 아기자기한 생태문화 체험코스
화성행궁(출발) ㅡ 신풍초(담벼락 갤러리) ㅡ 화령전 ㅡ 나혜석 생가터 골목전 ㅡ 생태교통마을 ㅡ 벽화골목(안녕하세요 길) 쌈지공원 ㅡ 수원전통문화관 ㅡ 장안문 ㅡ 화서문 ㅡ 나혜석 다전골목 ㅡ 화성행궁(해산)
코스안내도 ㅡ 골목 하나
골목 둘 : 2.1㎞[1시간 소요] ㅡ 아름다운 예술문화 체험코스
화성행궁(출발) ㅡ 신풍초(담벼락 갤러리) ㅡ 이아터 ㅡ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ㅡ 북수동성당 ㅡ 팔부자문구거리 ㅡ 대안공간 눈(봄) ㅡ 화홍문 ㅡ 방화수류정 ㅡ 무형문화재전수관 ㅡ 동신교회 ㅡ 아담스기념관 ㅡ 수원화성박물관 ㅡ 여민각 ㅡ 화성행궁(해산)
코스안내도 ㅡ 골목 둘
골목 셋 : 2.1㎞[1시간 소요] ㅡ 활기찬 상업과 생활체험코스
화성행궁(출발) ㅡ 아름다운 행궁길(공방거리) ㅡ 한데우물길 ㅡ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촬영지 ㅡ 남창초등학교(남지터) ㅡ 팔달사 ㅡ 팔달문 ㅡ 남문시장 ㅡ 유상박물관 ㅡ 남수문(순대타운) ㅡ 수원사(통닭거리) ㅡ 화성행궁(해산)
참여인원 : 5인 ~ 15인[해설사 1인 안내]
신청방법 : 시전 7일전 온라인 예약 www.swcf.or.kr
이용요금 : 무료
언 어 : 한국어, 영어, 중국어
문 의 처 : 수원문화재단 031ㅡ290ㅡ3564
북N01 서북공심돈
西北空心墩
서북공심돈은 화성 서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墩臺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서북공심돈은 서북쪽 성벽이 꺾이는 위치에 설치했다. 치성* 위에 벽돌로 3층의 망루를 세우고 꼭대기에는 단층의 누각을 올려 군사들이 감시할 수 있도록 하고, 외벽에는 화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어 공격 기능까지 갖추었다.
조선 정조 21년(1797) 정월, 완성된 화성을 둘러보던 정조는 서북공심돈 앞에 멈춰 "우리나라 성곽에서 처음 지은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화성에는 모두 세 곳에 공심돈을 세웠는데 서북공심돈 만이 축성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치성 :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
보물 | 1796년(정조 20) 창건 | 1934년 수리
「화성성역의궤」 서북공심돈 외도(좌), 서북공심돈 내도(우)
「정리의궤」 서북공심돈 외도(좌), 서북공심돈 내도(우)
「화성성역의궤」 서북공심돈 이도(좌), 「정리의궤」 서북공심돈 이도(우)
일제강점기 서북공심돈(좌), 1960년대 서북공심돈(우)
북N02 북포루
北舖樓 북포루는 북서포루砲樓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북포루는 화성에서 가장 평탄하고 시야가 트인 곳에 있어서 주둔하는 군사의 수도 많고 규모도 크다. '군포루'라고도 불렀다.
「정리의궤」 북포루 외도(좌), 북포루 내도(우)
● 1795년(정조 19) 창건
● 1975년 누각 복원
장안공원
화성기적비(華城紀蹟碑)
화성기적비는 1797년(정조 21) 1월 김종수(金鍾秀)가 화성 축성의 전반적 사실에 대하여 왕명을 받들어 지은 글을 새긴 비석이다. 정조대왕이 화성 축성을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추진하였으며 화성의 축성에 돌과 벽돌을 조화롭게 사용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거중기와 녹로 등의 이용은 정조대왕의 뜻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축성이 빠르고 튼튼하게 이루어졌음을 설명하고 있다. 화성기적비는 성역의 주역들이 바뀌면서 곧바로 세워지지 못하였다. 지금 비석은 1991년 11월 수원시에서 제작하여 장안공원에 건립한 것이다.
화성기적비(華城紀蹟碑)의 내용
상(上)의 13년 기유년(己酉年, 1789)에 우리 현륭원(顯隆園)을 수원부(水原府)의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그 읍치(邑治)를 유천(柳川)으로 옮겼다. 그 다음해 경술년(庚戌年, 1790)에 원자(元子)가 탄생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계축년(癸丑年, 1793)에 상께서 수원에 거동하시어 수원부(水原府)를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킬 것을 명령하여 체모(體貌)를 높였고 행궁(行宮)을 두어 우러러 의지할 뜻을 나타내었다. 또 수원부에 성을 쌓을 것을 의논하였으니, 그것은 원침(園寢)은 강(江)의 남쪽에 있고, 영부(營府)는 원(園)의 북쪽에 있어서 그것을 막아 지키는 방법으로 이 사업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규모(規模)와 제작(制作)은 모두 상의 뜻에서 나왔고, 계획(計劃)과 기율(紀律)도 모두 상의 결단을 따랐으니, 유사(有司)는 명령을 받들어 가르침을 따른데 불과할 뿐이었다. 상의 교서(敎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사업은 수원부가 기호(畿湖)의 요충지라고만 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5,000병마의 무리가 있다고 해서 하는 것만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선침(仙寢)을 위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행궁(行宮)을 위한 것이다. 마땅히 민심을 즐겁게 하고 민력을 덜어주는 것에 힘써야 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백성들을 괴롭히는데 가까운 일이 있다면 비록 공사가 하루를 못 가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본의는 아니다.”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일은 먼저 그 대체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성을 쌓는데 중요한 것은 형편에 따라서 기초를 정하되 둥글거나 모나게 하지 말며, 보기에 아름답게 꾸미지도 말고 이로움과 형세에 따라서 하라. 공사를 감독하는데 중요한 것은 운반을 편리하게 해 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옛 사람의 인중기(引重機)와 거중기(起重機)를 사용한 법을 강구해서 거행하도록 하라. 재물 모으는 방법은 그 조처하고 계획한 것이 있으니 스스로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경비를 걱정하지 말고 다른 기부금도 받지 말도록 하라. 모양을 꾸미는 방법으로는 위는 처마처럼 하고 아래는 돌층계처럼하여 지역에 따라서 쌓되, 멀리는 중국의 법을 모방하고 가까이는 고상(故相)의 논한 것을 취하라.”
위대하도다! 왕의 말이여. 한결같도다! 왕의 마음이여. 여기에서 모든 왕 중에 으뜸가는 효도와 백성들을 자식같이 여기는 인자함과 만물에 두루 베푸는 지혜를 볼 수 있다. 갑인년(甲寅年, 1794) 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병진년(丙辰年, 1796) 가을에 이르러서 공사를 끝마쳤으니, 그 기간이 모두 34개월이었지만 중간에 6개월을 쉬었으므로, 실지 공사에 소용된 기간은 겨우 28개월밖에 안 되었다. 아아, 3년 동안 공사하는 사이에 두루 수많은 화살을 막아낼 성곽을 쌓는데 성공하였으니 신의 도우심이 있었던 것 같으며, 이에 우리 성상(聖上)의 성의 둘레는 무릇 4600 보(步)이니, 도합 12리요, 성의 모양은 가로로 길게 비스듬하여 무르녹은 봄의 버들잎 형상 같으니, 그것은 유천(柳川)이란 지명에서 취한 것이다.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한 것은 원묘(園墓)가 화산(花山)에 있으므로 화(花)자와 화(華)자가 서로 통하는 데서 취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화봉(華封)사람의 축성(祝聖)한 듯도 포함한 것이니, 모두 성교(聖敎)를 받들어서 시행한 것이다. 성의 문은 4개가 있으니, 북쪽은 장안문(長安門)이요, 남쪽은 팔달문(八達門)이며, 동쪽은 창룡문(蒼龍門)이요, 서쪽은 화서문(華西門)인데, 장안문과 팔달문은 바로 우리 성상이 해마다 선침에 배알(拜謁)하기 위해 지나는 길로 한양성과의 거리가 70리이다. 산이 둥그스름하게 높이 솟아서 성의 진산(鎭山)이 된 것은 팔달산이다. 팔달산 정상에 장대(將臺)가 있는데, 그 위에 올라 보면 멀고 가까이에 산봉우리들이 둘러 있는 것이 마치 뭇 별들이 북극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과 같다. 산으로부터 내려와 창룡문(蒼龍門)을 지나서 다시 산에 올라 서쪽으로 가면 또 장대가 있고, 그 나머지로는 공심돈(空心墩), 각건대(角巾臺), 화양루(華陽樓), 포루(鋪樓), 각루(角樓), 암문(暗門), 용도(甬道), 옹성(甕城), 벽성, 노대(弩臺) 등이 있는데, 모두 그 지형의 형세를 따라 쌓은 것이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옛날에 이른바 용두(龍頭)의 위에 있는데, 용연(龍淵)이 그 북쪽에 있다. 이것이 성부(城府))의 대략이다. 재물이 80여 만금이나 들었고, 인부가 70여 만 명이나 들었는데, 이것은 모두 왕실의 사재에서 나온 것이니 특별히 계획한 것이요, 돈으로 군정(軍丁)을 사서 성역에 나가게 하여 번거롭게 조발(調發)하지 않았다. 또 무거운 것을 드는 기계와 유형거(遊衡車)를 사용한 것은 운반하기에 편리한 제도였기 때문이며,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농사짓고 호(壕)를 파서 지키게 한 것은 먼 날을 염려한 꾀였다. 겨울에는 옷을 주고 여름에는 약을 나누어 준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지극함이요, 혹시 흉년을 만나면 부역을 정지하도록 특별히 명령한 것은 깊이 백성을 걱정하신 것이다. 아아, 성왕(聖王)의 정치는 쓰기를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릇 시행할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국고(國庫)를 바탕으로 하고, 백성들이 수고로운 부역에 임하면 국가의 경비를 사용하는 것은 바로 나라와 백성이 있어온 이래로 밝고 의로운 임금들이 이미 행하여 왔던 것으로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이다. 오직 우리 전하는 지혜가 하늘과 같아서 비용은 쌓아 두었던 재물로 경영하였고, 인부는 모두 임금을 주고서 부리어, 국용은 한 오라기 터럭만큼도 허비됨이 없었으며, 백성들은 3일의 부역도 면하였다. 때에 알맞게 절제하였고, 멀리서 가져오고 가까이에서 도모하여 열리지 않은 지리(地利)를 일으켰으며, 함락되지 않을 금탕(金湯)을 만들어 놓았다. 이는 진실로 삼대(三代)의 융성할 적에도 없었던 일이요, 오늘날 처음으로 보는 것이다. 하물며 이 사업에 있어서 한 명령이라도 혹시 백성들의 뜻에 거스름이 있을까 염려하고, 한 일이라도 혹시 백성들의 힘을 해침이 있을까 두려워한 것은 진실로 과거에 우리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여 연로(輦路)의 곡식 싹도 밟지 않으신 뜻을 본받은 것이다. 비록 어리석고 어리석어서 미련하기가 마치 벌레와 같은 저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어찌 그 무궁하신 마음에 감동하여 눈물 흘리지 않겠는가. 뭇 장정들이 힘을 합하고 여러 공장(工匠)들이 앞서서 일하여 이 길고 넓은 우뚝한 성을 쌓아, 길이 억만년에 천지가 다하도록 선침(仙寢)을 호위하고 행궁(行宮)을 보호하며 서울의 날개가 되어 엄연히 기보(畿輔)의 큰 진(鎭)이 되게 하였으니, 이것은 한꺼번에 네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진 것이다. 어찌 위대하지 아니하며,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아아, 엄숙한 행궁(行宮)에 형상이 매우 가까이 보일 듯한지라, 어진(御眞)을 받들어 사모함을 나타내었으니, 이는 진실로 큰 성인의 무궁한 효도가 실로 국물만 보아도 모습이 보일 듯한 데서 나온 것이다. 상상컨대 백세(百世)의 뒤에도 전하의 효도에 감동하여 전하의 마음을 슬퍼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물며 시종(始終) 알아주심을 받은 늙고 천한 신(臣)처럼 그에 대한 감동이 아아, 하늘처럼 끝없는 자임에랴! 상의 21년 정사년(丁巳年, 1797) 정월 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원임 규장각제학 치사 봉조하(大匡輔國崇祿大夫 行判中樞府事 原任 奎章閣提學 致仕 奉朝賀臣) 김종수(金種秀)는 교서를 받들어 지음.
INTERNATIONAL HISTORIC CIVIL ENGINEERING
LANDMARK
HWASEONG FORTRESS
REPUBLIC OF KOREA
The Hwaseong Fortress was designed by the builder / scholar Jeong YakㅡYong and built from 1794 to 1796. Hwaseong Seongㅡyeokuigwe is a unique tenㅡvolume work that documents its construction. The rapid construction of the fortress, using paid labor, symbolizes the cultural and technological renaissance under King Jeonjo.
PRESENTED
BY THE
KORE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AND THE
AMERIC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AUGUST 2004
대한민국토목학회
미국토목학회
전 세계적으로 역사가치가 높은 토목공사의 표본
화성
대한민국
화성은 건축가이자 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여 1794년부터 1796년까지 축조되었습니다. 화성성역의궤는 화성의 축조 경위 및 역사를 기록한 서적으로 전10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유상 노역으로 신속하게 이루어진 최상이 축조는 정조시대 문화 및 기술 문예중흥의 기상을 잘 나타냅니다.
대한민국토목학회 및 미국토목학회가 2004년 8월 헌정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RL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
The World Heritage Committee
has inscribed
The Hwasong Fortree
on the World Heritage List
Inscription on this List confirms the exceotional
and universal value of a cultural or
natural site which requires protection for the benefit
of all humanity
DATE OF INSCRIPTION
6 December 1997
국제연합 교육 과학 문화 기구(유네스코)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
세계유산위원회는 화성을 세계유산 목록에 등록했습니다.
본 목록에 등록됨으로써 전 인류의 이익을 위해 보호해야 할,
뛰어나면서도 전 세계적인 문화 또는 자연유적으로 인정됩니다.
등록일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 사무국장
華城復元淨化紀念碑
擧重器全圖
수원성(화성) 복원 기념비
나라가 중흥할 때는 옛 일을 살피며 새로운 것을 만든다. 조선 왕조 정조때에 수원성(화성)을 새로 쌓은 일도 그러하였고 오늘 날 이 성을 다시 옛 모습대로 복원하는 일도 그러한 것이다. 수원성(화성)은 성으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갖추었으며 그 아름다움이 우리 나라 성곽의 꽃이라 일컬어진다. 본디 수원은 이곳에서 남쪽으로 이십리인 화산 아래에 자리하여 옛 이름은 물의 고을이란 뜻으로 맷골로 불리었고 통일신라 이후로 수성 또는 수주라고 불리다가 수원으로 바뀌었다. 정조는 생부 장헌세자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一七八九년 명당자리를 찾아 양주 배봉산의 현륭원을 화산으로 이장하게 되니 수원의 읍치와 민호를 이곳 팔달산 아래로 옮겨 새 수원이 생겼다. 옛 수원의 화산은 꽃산이요 팔달산 아래는 버드내 형국이라 새 수원은 꽃을 뜻하여 화성이라 이름하고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새 읍을 보호하고 서울을 강남에서 튼튼히 지킬 수원성(화성)의 역사는 一七九四년 二월 二十八일부터 시작되어 一七九六년 九월 十일 준공되었다. 수원성(화성)은 팔달산을 진산으로 삼고 전체 국면이 동쪽을 향하여 열리니 그 가운데로 큰 내가 흐르고 네 모퉁이가 모두 높아서 그 자연형세가 만세에 의지할 요충됨을 갖추었다. 성의 기초는 돌을 배열하고 흙과 자갈을 여러겹 다져넣어 빈틈없이 튼튼히 하였다. 높이 스무자 사천 육백 보 둘레의 네곳에 큰 문이 있었으니 북은 장안문 남은 팔달문 동은 창룡문 서는 화서문이다. 이들이 다 옹성을 갖추니 그 견고함은 서울도성을 앞지를 만 하였다. 암문 수문 노대 공심돈 포루와 성 안의 장대 행궁 사직단 방화수류정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동서의 두 장대는 성지기를 호령하기에 알맞고 사방의 각루와 포사 봉돈들이 모두 성을 지키기에 편리하도록 차려져 있었다. 성을 쌓을 때 쓰인 공구는 지게에서 거중기에 이르도록 우리나라 고유의 각종 기구가 동원되었으니 일하는 사람들은 적은 힘으로 큰 공을 이룰 수가 있었다. 이 성역의 계획은 실학자 류 형원과 정 약용 등의 경륜을 참작하고 우리 전통의 제도와 외국의 장점을 따 정조께서 손수 주략을 내리어 민폐가 없이 인화로 성을 쌓게 하였다. 그 자세한 내용은 화성성역의궤란 책으로 펴내어 오늘에도 그 때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상고할 수 있다. 수원성(화성)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옛 모습을 잃었고 六 · 二五 사변 때에도 큰 손상을 입었다. 박 정희 대통령께서는 국방 유적 정화의 일환으로 수원성(화성)의 복원을 분부하시기에 이르러 문화공보부와 경기도가 힘을 합쳐 수원성(화성)의 옛 모습을 다시 찾게 되었다. 이는 옛 것을 되찾는 일에 머므름이 아니요 우리의 새 의지를 나타내는 일이다.
一九七九년 九월 일
전면제자 대통령 박 정희 비문 최 영희 짓고 김 응현 쓰다
大車全圖
북N04 북서포루
北西砲樓 북서포루는 장안문 서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이 중 평탄한 곳에 지은 북서포루가 가장 높다. 포루는 뱍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는 안팎의 지붕 형태가 다르다. 이는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되어 있는 각 시설물 자재 목록을 바탕으로 복원된 것이다.
「화성성역의궤」 포루외도(좌), 포루내도(가운데), 포루이도(우)
● 1794년(정조 18) 창건
● 1975년 복원
장기 바둑을 두면서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
비둘기떼
북N05 북서적대
北西敵臺 북서적대는 장안문 서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 시설이다. 화성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 있다. 장안문 좌우 적대에는 현안* 세 줄을 설치한 반면 팔달문 적대에는 두 줄을 설치했다.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하도록 만든 시설이다. 적대는 우리 나라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다.
*현안 : 성벽의 바깥에 위에서 아래로 낸 홈.
「정리의궤」 장안문 외도(좌), 「화성성역의궤」 현안(우)
● 1795년(정조 19) 창건
● 1968년 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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