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청 시민청] 05
조선시대 2호 건물지 단면도
지형에 맞는 건축기술
2호 건물지 남동쪽 기초 단면이며 당시의 지형에 맞는 건축기법 및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지역은 지대가 낮으며, 정릉동천이라는 하천이 인접한 곳으로 뻘 층이 있는 저습지였다. 이 때문에 건물기초는 약한 지반을 보강하여 건물의 침하를 막기 위해서 전체적으로 나무말뚝 지정을 하였다.
뻘에서는 나무가 썩지 않기 때문에 나무말뚝이나 통나무를 깔아 기초를 하였다. 그 위에 3단의 적심석을 쌓고 그 사이는 모래로 채워 다진 후 방형 초석을 놓아 마무리하였다.
호안석축 물길의 흔적
호안석축 앞 물이 흘렀던 곳의 퇴적층 토층단면이다. 조선시대 문화층이 형성된 후, 근현대 문화층이 그 위에 퇴적되었다. 그 후 호안석축이 기능을 상실하면서 근현대 건축물이 조성되었다. 이 토층을 통해 조선 전기부터 20세기 초 근현대까지의 문화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6호, 6 ㅡ 1호 건물지
6호 건물지 : 'ㅡ'자형의 평면구조로 기둥기초인 초석과 벽의 기초인 고맥이가 확인되었다. 건물 내부에서 난방시설인 구들이 전혀 확인되지 않아 창고 등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6 ㅡ1호 건물지 : 6호 건물지 아래에서 확인된 건물지이다. 'ㄱ'자형 평면구조로 남서향의 건물로 보인다. 기둥 기초인 적심, 초석과 벽의 기초인 고맥이가 일부 확인되었고, 마루와 부엌 사이의 방에서 난방시설인 구들 일부가 확인되었다.
4호, 4 ㅡ 1호 건물지
4호 건물지 : 'ㄱ'자형의 평면구조로 북동쪽과 북서쪽에서 기단 일부만이 확인되었다. 4호 건물지 북동쪽 기단과 3호 건물지 남서쪽 기단 사이에 물이 흘렀던 흔적이 확인되었다. 건물지 내부에서 확인된 적심은 4호 건물지 이전 건물지인 4 ㅡ 1호 건물지의 적심이다.
4 ㅡ 1호 건물지 : 'ㄷ'자형의 평면구조의 건물지로, 기둥기초인 적심이 확인되었다. 4호 건물지 기단의 기초보다 더 낮은 면에서 적심들이 확인되어 4호 건물지 자리의 선대유구로 판단된다.
3호, 3 ㅡ 1호 건물지
3호 건물지 : 'ㅡ'자형 평면구조로 추정되며, 집터를 잡고 그 터보다 높게 쌓아 조성하는 기단 일부가 확인되었다.
3 ㅡ 1호 건물지 : 3 ㅡ 1호 건물지는 3호 건물지가 건축되기 이전 건물지이다. 3호 건물지의 30㎝ 아래에서 확인된 유구이다. 'ㅡ'자형 평면구조로 추정되며, 기둥기초인 적심과 초석 그리고 기단 일부가 확인되었다.
11호, 11 ㅡ 1호 건물지
11호 건물지 : 'ㄱ'자형의 평면구조로 남동향의 건물로 보인다. 기둥기초인 적심과 벽의 기초인 고맥이 그리고 대청마루와 부엌 사이의 방에서 난방시설인 구들 일부가 확인되었다.
11 ㅡ 1호 건물지 : 'ㅡ'자형의 평면구조로 서향의 건물로 보인다. 기둥기초인 초석과 적심 그리고 기와로 조성된 고맥이가 일부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유구
조선시대 유구는 호안석축 1기, 건물지 21동 등이며 화약무기 등을 비롯하여 자기, 철기, 목제품들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 유구들은 유물의 제작 및 사용시기 등을 볼 때 15 ~ 16세기의 유구들이다.
① 萬曆十三年乙酉五月 日次勝字重五斤九兩匠金○○ :
선조 18년 (1585년)에 5근 9량으로 김○○이라는 장인이 만들었음을 알 수 있으며 '勝字'라는 명문으로 보아 승자총통으로 추정된다.
② 勝字五斤八兩 :
5근 8량으로 제작되었으며 '勝字'라는 명문으로 보아 승자총통으로 추정된다.
승자총통
16세기 / 1호 건물지 출토
15점의 총통이 열과 압력으로 녹아 붙어 있다.
파손의 흔적이 있으며 명문으로 보아 대부분 승자총통으로 추정된다.
승자총통
16세기 / 1호 건물지 출토
장전과 휴대가 편리하도록 개량한 개인화기로 총통 여러 점이 녹아 붙어 있던 총통류 중 보존 처리 과정에서 분리되었다. 통신 일부가 없어진 상태이며 약실 부위에 다른 개체가 녹아 붙어 있다. 명문 '萬○○年四月日造'로 보아 만력○年 4월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총통
15 ~ 16세기 / 10호 건물지 출토
통신은 휘어져 있으며 1마디의 죽절이 남아 있다. 글자는 '大平'으로 추정된다.
영자총통
16세기 / 10호 건물지 출토
병부와 약실 편만 남아 있으며 명문 '盈字'가 확인되어 영자총통 (盈字銃筒)으로 추정된다.
군기시 보물, 불랑기자포
불랑기자포 (佛狼機子砲)란 불씨를 손으로 점화 · 발사시키는 화기로 조선시대 유일한 후장식 (後裝式 : 뒤에서 장전하는 방식) 화포이다. 자포에 실탄을 장전한 뒤 발사를 구실을 하는 불랑기모포 (母砲)에 삽입해 발사한다.
불랑기자포는 1호 건물지 도기 안에서 여러 점의 총통과 함께 출토되었다. 자포 푠면에는 '嘉靖癸亥 地筒重七十五斤 八兩 匠金石年'라고 되어 있어 명종 18년 (1563년)에 75근 8량으로 김석년이라는 장인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당시 모습>
화살촉더미
16세기 / 5ㅡ1호 건물지 출토
활 (弓)과 노 (弩 : 화살이나 돌을 여러 개 잇따라 쏠 수 있게 만든 큰 활)에 사용된 철촉 수천점이 열과 압력으로 인해 엉켜 붙어 있으며 사두형, 추형, 역자형 철촉 등이 보이며 사두형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2호 건물지
2호 건물지는 'ㄷ'자형의 평면구조로, 남서향의 건물로 추정된다. 건물의 남동쪽에는 난방시설인 구들이 확인된 방과 부엌이, 건물의 중앙에는 대청마루와 그 마루를 앞으로 확장한 퇴 (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기초부분에 나무말뚝을 박고 그 위에 기둥의 기초인 적심과 초석을 설치하였다. 초석 양쪽으로는 벽의 기초인 고맥이가 확인된다.
군기시터 출토 유물들
군기시터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화약과 화약무기이다.
불랑기자포 (佛狼機子砲), 총통 (銃筒), 철촉 (鐵鏃) 등이 출토되었는데, 불랑기자포와 승자총통에는 명문 (銘文)에 16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총통은 도기 (陶器) 안에 담겨서 출토되었는데 일부를 제외하고 녹아내리거나 터진 상태 또는 부러져 있는 상태였는데, 아마도 재활용을 위해 보관된 것으로 보인다. 수천점에 이르는 화살촉도 건물지에서 한꺼번에 출토되었다.
그밖에 자기, 기와, 목제품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장군전촉과 장군전 날개
16세기 / 12호 건물지 출토
자자총통에서 발사하는 장군전의 전촉과 장군전의 날개이다.
화약이 담긴 청동그릇
16세기 / 12호 건물지 출토
내부에 흑색 화약이 담겨 있었으며 5점이 포개진 형태로 출토되었다.
덩이쇠
16세기 / 2호 건물지 출토
철제 무기를 만들기 위한 1차 가공품으로 추정된다.
'軍上'명 철기
1546년 / 13호 건물지 출토
13호 건물지 내부에서 덩이쇠, 총통, 쇠사슬 등이 한 덩어리로 엉켜 출토되었다.
이 철기의 형태는 원통형이며 상단부에 명문이 확인된다.
명문내용은 '軍上嘉靖二十五年十二月○日造地○○十七斤九兩'이 남아 있어 명종 1년 (1546년) 17근 9량으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철환
16세기 / 1호 담장 출토 / 12호 건물지 출토
화포의 발사체로 둥근 모양이며 가운데 부분에 터져 깨진 부분이 있다.
조선시대 무기제조기관, 군기시
군기시 (軍器寺)는 고려 ~ 조선시대에 무기제조 등을 관장하던 곳이다. 고려 목종 대에 군기감 (軍器監)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어 고려 문종 대에 확충되었다. 충렬왕 34년 원나라의 간섭으로 폐지되었다가, 공민왕 대에 군기시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어 부활하게 된다. 이후 군기시는 조선시대 고종 21년 (1884)에 근대적 무기제조관청인 기기국 (機器局)이 설치될 때까지 중앙 무기제조소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경국대전 (經國大典)에는 군기시에 근무하는 장인만 600여 명이며, 무기제조기술 또한 수준급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불랑기자포, 총통 등의 무기들은 조선시대 우수한 무기제조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혼돈의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국방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최신 무기제조 및 관리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군기시는 바로 이 역할을 담당했던 핵심 관청이었다.
불랑기자포 및 총통
15 ~ 16세기 / 11호 건물지 출토
불랑기자포와 총통이 열과 압력으로 녹아 엉겨 붙어 있으며 새로 만들기 위해 열과 압력을 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군기시 유물갤러리
대장군전
대장군전은 조선 시대, 천자총통(天字銃筒)의 탄환으로 사용되던 쇠로 만든 만든 화살이다. 서울시청 신청사에서는 총통에서 발사하는 대형화살의 철촉과 철우가 출토되어 이 유물에 대한 이해를 돕시 위해 대장군전을 모형으로 제작하였다.
불랑기포
서울시청 신청사 1호 건물지에서 불랑기자포가 출토되었다.
불랑기자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불랑기모포와 불랑기자포가 결합된 불랑기포를 모형으로 제작하였다.
불랑기자포
1563년 / 1호 건물지 출토 / 보물 제861ㅡ2호
불랑기포의 도입시기와 관련하여 문헌상에는 임진왜란 때로 알려져 있으나 보물 861호 불랑기자포 3점 (육군박물관 소장)이 이미 발굴되었고, 서울 신청사 부지에서 같은 시기에 제작된 불랑기자포가 발굴됨에 따라 불랑기의 도입시기를 임진왜란 이전으로 앞당길 수 있는 유물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보물 제861ㅡ2호로 지정되었다.
유구이야기
시간의 기록, 토층
군기시유적의 토층은 자연 퇴적층ㅡ조선 전기 문화층ㅡ근 · 현대 문화층으로 나뉜다. 조선 전기 문화층에는 조선 건국 후 설치된 군기시와 관련된 유물과 유구가 확인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후기 문화층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일보사와 경성부청사가 건립되믄 과정에서 파괴되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 위로 숙위소 (고종황제 호위담당 시설), 경성부청사가 건립되었던 근현대문화층이 퇴적되어 있다.
세빛섬
200 × 108㎝, Inkjet print, 2019
태평홀
대평홀 건립과 등록문화재 등록
태평홀은 일제 강점기인 1926년 경성부청 (京城府廳)* 본관 뒤편에 회의실로 지어졌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르네상스 양식 건물로, 높이는 6m, 넓이는 378㎡이다. 이곳은 주로 서울시 의회격인 경성부 협의회의 회의장으로 사용되었다.
광복 이후 태평홀은 시장이 주재하는 주요 회의나 행사를 개최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대회의실'로 불리다가 2001년에 근처 도로의 이름인 태평로 (지금의 세종대로)에 착안하여 '태평홀'로 부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태평홀이 노후화하면서 과거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으면서도 첨단시설을 갖춘 다목적 회의실로 탈바꿈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2001년 4월 30일에 공사가 끝났고, 2003년 6월 30일에는 태평홀을 포함한 옛 서울특별시청 청사가 등록문화재** 제52호로 등록되었다.
* 경성부청 (京城府廳) : 일제 강점기에 서울 지역에 둔 행정구역의 청사. 경성부는 총독부령에 따라 1910년 한일 병합조약 체결 이후 조선과 대한 제국의 수도였던 한성부를 고친 것이다.
** 등록문화재 : 우리나라의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문화유산 중에서 보존 및 활용 등을 할 수 있도록 특별히 인정된 문화재.
1. 경성부청 전경 (맨 위) 2. 1959년 제1회 시 직원 기본훈련 교양강돠 (가운데) 3. 경성부청 3층 평면도 (맨 아래)
태평홀 철거와 현재의 모습
이후 서울시는 다양한 행정 수요 변화에 대응하여 업무공간뿐 아니라 시민문화공간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열린공간을 마련하고자 새로운 청사를 세우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옛 청사의 보존과 철거 범위를 두고 서울시와 문화재청 간의 갈등이 있었으나 본관 정면 외벽 원형보존, 중앙홀 보존 들을 내용으로 한 시청사 보존 안에 합의하여 2009년부터 옛 서울시청 청사가 철거되기 시작했다.
태평홀은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공간인 만큼 실측 정보와 도면을 참고하여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옛 청사의 태평홀과 같은 자리의 지하 2층으로 옮기고, 개방형 창을 만들어 위에서도 태평홀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했다. 이후 2013년 1월 12일 시민청이 개관하면서 태평홀에서는 시민토론회, 시민청 결혼식 등 다양한 시민 참여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4. 2009년 2월 철거가 진행중인 서울시청 본관 동 (왼쪽) 5. 2009년 2월 철거가 진행 중인 태평홀 (오른쪽)
6. 2018년 시민기획단 간담회 (왼쪽) 7. 2019년 196회 시민청 결혼식 (오른쪽)
8. 3 · 4층에 있던 태평홀을 본관 동 지하 2층으로 이전하여 복원함.
태평홀
태평홀 철거와 현재의 모습
태평홀과 옛 서울시청 건물이 등록문화재가 된 이후, 서울시는 서울시청 건물을 새로 짓기로 했다. 서울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을 맡아서 하는 서울시청이 더욱 소통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시민들의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시청을 새로 짓기로 한 이후, 옛 서울시청 건물을 무너뜨릴지 그대로 둘지에 대해 서울시와 문화재청* 사이에 서로 다른 의견이 오가기도 했다. 2009년,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옛 서울시청 건물에서 중요한 몇 개의 공간만 그대로 두고 나머지는 모두 무너뜨리기로 했다. 그렇게 옛 서울시청은 대부분 사라지고, 새로운 서울시청은 옛 서울시청 뒤에 지어졌다.
태평홀은 서울시의 오랜 역사를 담고 있는 중요한 공간이기에 원래의 크기, 모습 그대로 새로운 서울시청 지하로 자리를 옮겼다. 지하 2층이라는 위치까지도 그대로이다. 한가지 변화가 생겼다면, 태평홀 위쪽에 넓게 뚫린 창이다. 이 창으로 같은 건물 지하 1층에서도 태평홀 안을 내려다 볼 수 있다.
2013년 1월 12일, 서울시청 지하에 시민들을 위한 공간인 시민청이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시민청 안에 있는 태평홀에서는 토론회나 결혼식 등 시민이 참여하는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 문화재를 관리하거나 보호하는 일을 하는 국가기관
태평홀
태평홀이 지어지고 등록문화재가 되기까지
태평홀은 서울시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공간으로 1926년, 일본이 우리나라의 권리를 빼앗았던 '일제 강점기'에 처음 지어졌다. 이때 태평홀은 옛 서울시청 건물인 경성부청* 뒤에 있었다. 태평홀은 두꺼운 철 기둥을 사용하여 지어졌는데, 이는 500년 전 이탈리아의 건물들에서 자주 볼 수 잇었던 '르네상스 양식'이다.
태평홀을 지은 이유는 서울시를 관리 · 운영하는 일에 대해 회의를 할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상황에 따라 태평홀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달라졌을 뿐, 태평홀은 늘 회의나 행사를 하는 공간이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앗았을 때도, 일본으로부터 우리나라를 되찾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회의와 행사가 열리다보니 태평홀의 시설은 점점 낡아갔다. 2001년, 태평홀을 더 오래, 튼튼하게 사용하기 위해 공사를 시작했다. 태평홀을 모두 새롭게 바꾸기보다는 처음 지어졌을 때의 모습을 살리면서 조금 더 편리한 시설을 더하는 공사였다. 이때까지 태평홀의 이름은 '대회의실'로 불리다가 '태평홀'로 바뀌었다. 지금은 세종대로라고 불리는 서울시청 앞의 도로인 '태평로'에서 따온 이름이다.
태평홀은 원래 회의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공사를 한 다음에는 시민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져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울시와 함께 해 온 태평홀을 옛 서울시청 건물과 함께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52호가 되었다.
* 일제 강점기 때 서울 지역을 관리했던 곳
** 시간이 지나도 계속 사람들에게 전할 만큼 중요한 건물, 작품, 기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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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 108㎝, Inkjet print, 2020
<관계항 (RELATUM) ㅡ 만남의 탑> 1984 ~ 1985,
4m × 3.5m × 3.5m, 브론즈와 자연석
이우환 (李禹煥 1936 ~)은 한국과 일본,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는 현대미술의 거장이다.
경남 함안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재학 중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그는 서구의 미니멀리즘에 필적하는 동양 최초의 현대미술 운동인 '모노하 (物派)'의 이론과 실천을 주도하며 세계적 명성을 쌓았다.
이우환은 1970년대초부터 기존 회화의 틀을 깨는 명상적인 평면 작품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와 함께 <관계항>이라는 제목으로 철판과 돌을 주재료로 하는 조각 작품을 발표해 왔다.
철판은 인간 혹은 인간이 만든 문명의 부산물을, 돌은 자연을 각각 대신한다.
두 가지 사물이 한 공간에서 만남으로써 이뤄내는 관계의 미학을 형상화한 <관계항> 연작은 2014년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전시돼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으며 일본의 나오시마 이우환미술관, 부산 시립미술관의 이우환 공간 등에 소장돼 있다.
작품 (관계항ㅡ만남의 탑>은 1985년 11월 서울신문사와 한국방송광고공사 신사옥인 프레스센터 준공에 맞춰 주문 제작되어 이곳 중앙광장에 설치되었다.
묵직한 철판과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자연석이 조화로운 관계로 새롭게 탄생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우환의 예술관과 철학을 볼 수 있는 야외조각 설치 가운데 보기드문 대작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철판으로 된 굳건한 기반 위에서 공간을 나누는 네 날개가 한국은 구심점으로 세계를 향해 뻗어가는 위상을 느끼게 하는 작품은 한국과 세계, 인류 문명과 자연이 조화롭게 소통하는 미래지향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ㅡ 함혜리 서울신문 미술담당 선임기자
RELATUM (関係項) 李禹煥
꺾일지 언정 굽히지 않는다
이 땅에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공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투쟁해온 언론인들과 시민은 뜨거운 마음과 정성을 모아. 현대사에서 온갖 영욕이 교차한 이 역사적인 공간에 '굽히지 않는 펜' 상을 세운다.
도도하게 흘러가는 역사 속에 한낱 남루할 수도 있는 이 상징물은, 우리가 지켜온 자유언론에 대한 신념과 자부심을 기리는 동시에 미래를 위한 기념비이다. 또한 선배 동료 언론인이 겪은 쓰라린 희생과 좌절을 잊지 않기 위한 불망비이다.
긴세월 동안 독재정권과 이에 결탁한 언론사들은 언론의 신성한 사회적 사명과 책임을 배반하며 현대사를 불행으로 얼룩지게 했다. 이들에 의해 1천 명이 넘는 동료들은 펜과 마이크를 빼앗긴 거리의 언론인이 되어 떠돌아야 했고, 언론의 길에서 순교한 선배들도 있다. 이들의 복직이 길게는 10년이 넘게 계속되는 현실에 분노하면서, 부도덕한 역사의 광정을 단호히 요구한다.
고난과 희생 속에도 우리는 어기차게 일어나 자유언론을 지켜왔다.
지금 우리의 다짐을 돌과 쇠에 새겨 그 정신을 깊이 간직하려 함은, 이 산하에 살아갈 미래의 세대와 언론인에게 용기있는 표상이 되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그들에게 광명한 내일이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언론 동지여, 민주 시민이여,
지금 언론인이 지닌 열망과 그들이 겪고 있는 현실적 질곡을 직시해 주기 바란다.
우리에게는 더 추구해야 할 시대적 역할이 있다.
민주적 가치와 민족적 정의로움, 조국의 평화통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그것이다.
ㅜ리는 이 시대정신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부끼는 저 자유언론의 깃발을 결코 내리지 않을 것이다.
2019년 7월 16일
언론자유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
역사 앞에 거짓된 글을 쓸 수 없다
화천산천어축제 조형물
얼음나라 화천산천어축제
진짜 겨울은 화천이다
세계 최고의 겨울축제
화천산천어축제
2023. 1. 7 (토) ~ 1. 29 (일)
낙원순대할머니집
낙원악기상가 극장 간판
낙원순대국
나팔꽃 인생
작사 : 김병걸
작곡 : 신대성
노래 : 송 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일요일의 남자 송해 쏭
동서라 남북없이
발길 닿는대로
바람에 구름 가듯
떠도는 세월이 몇 해이던가
묻지마라 내 가는 길을
구수한 사투리에 이 마음이 머물면
나팔꽃 같은 내 인생 풍악소리
드높이고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우리 함께 노래 불러요
송해 선생
송해 길
'송해 길'의 도로명은 수표로 입니다.
송해 선생은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셨고, 험난했던 역사의 풍랑을 넘어 국민 희극인으로, 대중예술의 산증인으로, 오랜 세월 우리를 웃고 울게한 한국 연예계의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종로구 낙원동은 송해 선생이 50년 넘게 방송과 행사를 하시면서 생활의 근거지로 활동하였던 지역이며, 주민들과의 강한 유대감과 낙원동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실향민인 송해 선생의 제2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이에 종로구는 지욕주민들의 명예도로 지정 요청과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며, 전 국민을 사로잡은 대중 문화계 거목의 업적을 기려, 종로 2가에서 낙원상가 앞까지의 구간을 도로명주소위원회 심의를 거쳐 명예도로 '송해 길'로 지정하였습니다.
명예도로 '송해 길' 지정으로 이곳 수표로가 활력과 생기가 넘치는 아름다운 도로로 가꾸어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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