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⑦ 드러난 중공군의 얼굴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 13병단의 병사들이 1950년 10월 말쯤 평안북도 운산에서 국군 1사단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중공군 1차 공세’로 불리는 당시 공격으로 미군은 1개 대대 병력과 적잖은 무기를 잃었으나 국군 1사단은 비교적 온전하게 운산 지역을 빠져나왔다. [백선엽 장군 제공]
1950년 11월 초가 되면서 중공군의 1차 공세가 일단 주춤해졌다. 국군 1사단은 운산 남쪽의 입석(立石)이라는 곳으로 후퇴했다. 교전을 해보니 중공군의 실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생각보다 강했다.
중공군, 생각없이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군대 아니었다
중국에서 생활해 본 경험이 있는 나는 중공군의 습성을 대강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매복과 기습에 강했다. 정면으로 밀고 들어오는 전법은 별로 구사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우회와 매복, 기습을 노린다. 중국 공산당 팔로군(八路軍)이 항일전의 최대 승리라고 자랑하는 핑싱관(平型關) 전투가 대표적이다. 팔로군 115사 병력 6000여 명이 1937년 9월 산시(山西)성 핑싱관의 길고 깊은 계곡 안에서 일본군 5사단 등의 1만 병력을 매복 공격한 전투다.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도 다를 게 없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자신을 숨긴 채 공격을 가해왔다. 우리의 공포심을 유발하기 위해 깊은 밤, 어둠 속에서 피리를 불면서 접근해왔다. 야간전투를 싫어하는 미군들은 특히 중공군의 피리 소리에 진절머리를 냈다. 국군도 초기에는 이 피리 소리에 당황하면서 사기가 꺾이는 경우가 잦았다.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워 거침없이 정면을 공격해 오는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중공군의 특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내가 실제 상대해본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병력이 소진할 때까지 마구 밀어붙이는 그들의 전법을 ‘인해전술’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중공군은 야습·매복·포위·심리전 등 나름대로 체계와 노림수가 분명한 전술을 구사했다. 게다가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패주하면서 남기고 간 우수한 미국제 무기가 그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람 수로만 밀어붙이는 그런 군대는 분명히 아니었다.
재미난 것은 일단 포로로 잡힌 중공군들의 인상과 태도는 야밤을 틈타 맹렬한 공격을 퍼붓던 그런 전사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는 점이다. 이상할 정도로 유순했다. 낙천적인 기질도 보였다.
국군 1사단 12연대장을 맡아 늘 격렬한 전투의 선봉에 섰던 김점곤 대령(예비역 소장)은 흥미로운 얘기를 하나 들려줬다. 김 대령이 운산 전투에서 잡은 중공군 포로의 1차 심문을 끝내고 좀 더 깊이 있는 ‘전략 심문’을 하기 위해 후송할 즈음이었다. 그 포로는 “다른 물건은 다 압수해도 좋은데, 비싼 만년필은 꼭 돌려줘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원래 포로의 물품은 모두 압수하는 게 원칙이지만 김 대령은 ‘도대체 얼마나 귀중한 만년필이기에 그러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부하에게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문제의 만년필을 본 김 대령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잉크가 줄줄 새는 싸구려 만년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중공군 포로는 간절하면서도 완강하게 이를 원했다. 결국 만년필을 돌려준 김 대령은 중공군의 약점 하나를 간파했다. 그것은 궁핍함이었다. 품질이 조악한 만년필과 이를 애지중지하는 포로의 자세에서 볼 때 전투력 유지의 핵심인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중공군이 초기에는 화력이 강했지만 결국엔 보급 문제로 전력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는 관찰이었다.
유쾌한 포로도 있었다. 어느 전선에서 잡혔는지 기억이 불분명하지만 중공군 포로 한 명은 “내가 요리 하나는 잘한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주겠다”고 제의하는 여유를 보여 부대원들에게 웃음을 안겼다는 일화도 있다.
그래도 이들은 전투에 임하면 무서울 정도로 진격했다. 공산당의 강력한 규율이 그 뒤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4열 종대로 서서 물 밀듯이 밀려오는 중공군은 분명히 경계의 대상이었다. 김점곤 대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피리와 꽹과리 소리를 울리면서 깊은 밤에 공격해 오는 중공군은 늘 ‘심야의 무당 집에서 풍겨나는 굿판의 분위기’를 풍겼다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섬뜩하게 다가왔다.
운산에서 한바탕 전투를 치렀음에도 미군은 중공군의 실력을 아직 얕잡아 보고 있었다. 미군은 ‘성탄절은 집에서 맞는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1950년 11월 말 대공세를 준비했다. 이는 누군가의 표현대로 ‘재난으로 향하는 눈 먼 행군’이 될 운명이었다.
백선엽 장군
<계속>
[출처: 중앙일보]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⑦ 드러난 중공군의 얼굴
'6 · 25전쟁 60년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⑨ 전장에서 만난 영웅 (0) | 2021.05.26 |
---|---|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⑧ 달콤한 휴식 (0) | 2021.05.26 |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⑥ 미 8기병연대 3대대 (0) | 2021.05.26 |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⑤ 급박했던 후퇴 명령 (0) | 2021.05.25 |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④ 급박해진 후퇴 (0) | 2021.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