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⑨ 전장에서 만난 영웅

드무2 2021. 5. 26.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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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⑨ 전장에서 만난 영웅

 

 

 

1950년 10월 평양에 처음 입성한 국군 1사단의 공을 기려 프랭크 밀번 미1군단장(오른쪽)이 평양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백선엽 사단장에게 은성무공훈장을 걸어주고 있다. 백 사단장의 키는 1m75㎝ 남짓, 밀번 군단장이 5~6㎝ 정도 작아 보인다. [백선엽 장군 제공]

 

 

 

이 대목에서 미군의 한 지휘관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6·25전쟁 기간 중 미군의 제2차 세계대전 영웅들을 수없이 만났다. 더글러스 맥아더, 월턴 워커, 매튜 리지웨이, 제임스 밴 플리트, 맥스웰 테일러 등이다. 당대 최고 엘리트인 그들과 전쟁을 함께 치르면서 나는 미군의 뛰어난 시스템과 노하우, 지략을 배웠다.



군사 스승 밀번, 작전까지 바꿔 ‘한국군 첫 평양 입성’ 도와

 

 

그 가운데 내 기억 속에 가장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은 프랭크 밀번(1892~1962) 소장(당시 계급)이다. 위에 열거한 이들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밀번은 나의 군사적 스승이다. 적의 공격 앞에 궁지에 몰리다가 막 반격의 기회를 잡기 시작한 낙동강 전선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국군 1사단이 미 1군단에 배속되면서 나는 낙동강에서는 물론, 운산에서 적의 공세를 막아내며 후퇴할 때도 그의 지휘를 받았다.



그는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1914년 졸업생이다. 미 대통령을 지낸 아이젠하워, 8군사령관을 역임한 밴 플리트 장군이 그의 웨스트포인트 1년 후배다. 밀번 군단장은 1m70㎝에 조금 못 미치는 단신이다. 미국인으로는 상당히 작다. 목은 짧고 얼굴은 둥그런 편이다.



그는 매우 겸손했다. 하지만 싸울 때는 무척 용감하게 나선다. 전공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장을 누빈 여느 미군 전쟁영웅에 뒤지지 않는다. 포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터를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그의 별명은 ‘시림프(Shrimp·새우) 밀번’이다. 그는 웨스트포인트 재학 시절 아주 유명한 미식축구 공격수였다. 그가 미식축구 볼을 가슴에 안고 머리를 숙인 채 질주하는 장면이 새우를 연상케 했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그렇게 달리는 모습이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을 정도로 재미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와 친한 사람들은 밀번을 아예 ‘시림프’라고 불렀다.

 

 

 

 

 

 

그의 인상은 시골 노인네에 가까웠다. 1950년 여름,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에 대한 국군과 연합군의 총반격을 코앞에 두고 있을 때 대구의 한 과수원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이다. 그는 당시 강아지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장군이라기보다는 촌부(村夫)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는 모든 사항을 사전에 꼼꼼하게 점검했다. 이것저것 다 따져본 뒤 상대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면 그 뒤로는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 부하를 함부로 질책하지 않았고, 부하들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알았다.



그는 나에게 기적과 같은 승리였던 ‘평양 입성 제1호’의 명예를 안겨줬다. 애초 미 1기병사단과 미 24사단이 진격하기로 했던 작전계획을 변경까지 했다. 전쟁 통에 이미 완성했던 작전계획을 수정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 군대가 평양에 처음 입성하게 해달라”는 나의 간곡한 호소를 기꺼이 들어줬다.



원래의 작전계획에 나와 있는 국군 1사단의 공격로는 해주와 재령을 거쳐 진남포로 가는 것이었다. 평양은 없었다. 밀번 군단장이 미 24사단의 공격로인 경부축 우측로를 국군 1사단에 넘겨주도록 변경한 것이다. 국군 1사단이 밤낮을 걷고 달려 미 1기병사단보다 15분 앞서 평양에 먼저 도착한 얘기는 다음에 자세히 언급하겠다.



나는 그에게서 참는 것을 배웠다. 일선 사단을 최대한 지원하면서 부하의 건투를 침착하게, 그리고 끝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통해 부하의 창의성을 이끌어 낼 줄 알았던 사람이다. 그의 지휘 아래에서 부하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전투를 수행했다. 그가 없었다면 운산 전투는 아군의 더 참혹한 패배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는 일선에서 올라오는 정보에 귀를 기울였다. 중공군 공격력에 대해 신중하게 반응했다. 국군 1사단의 후퇴 건의를 그 어느 미국의 지휘관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전쟁은 일순간의 판단으로 승리와 패배로 갈린다. 운산에 진출한 아군이 실력을 가늠하기 어려운 중공군의 거센 공세에 놓였던 그 순간에 그는 부하에 대한 신뢰에 입각해 옳은 판단을 내렸다. 미 1군단은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1·4후퇴 이후까지 계속 적군에 밀리기는 했지만 나중에 대반격의 기틀을 잡은 것은 운산 전투에서 군단 건제(建制)를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6·25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51년 5월쯤 중장으로 승진했다가 그해 7월 미국으로 돌아가 예편했다. 그 뒤 고향에서 학생들에게 미식축구를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부지런했다. 학생들 앞에서도 분명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다녔을 것이다. 잔뜩 웅크린 채 뛰는 그의 ‘새우형 질주’를 보면서 젊은 친구들은 행복한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나의 군사 스승, 밀번 장군의 명복을 다시 빈다.



백선엽 장군

 

<계속>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⑨ 전장에서 만난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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