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⑧ 달콤한 휴식
운산 전투 며칠 뒤인 1950년 11월 초 연예인 위문단이 평양 북쪽의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에 주둔했던 국군 1사단을 찾아 공연을 하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우리는 미군의 희생을 뒤로하고 평안북도 운산에서 청천강 남쪽으로 내려왔다. 평양 북쪽의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立石: 영변 주변의 입석과는 다른 지역)이라는 곳에 도착해 재정비를 했다. 청천강 남쪽에는 반격을 위한 교두보가 만들어졌다. 청천강을 자연적인 방어선으로 설정한 것이다. 그곳에는 청천강을 건너 서북쪽인 신의주 방향으로 진격하다가 별다른 피해 없이 후퇴해 내려온 미 24사단, 평북 구성 방향으로 진출하다 역시 무사히 퇴각한 영국군 27여단이 방어막을 형성했다.
서울서 온 연예인 공연단, 중공군과 격전 치른 장병들 위로
중공군의 1차 공세를 무사히 겪어내고 남쪽으로 내려오던 길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착잡했다.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중공군 전력이 예상만큼 간단치 않았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더 많은 병력이 중국으로부터 한반도에 들어올 것이다. 과연 저들을 어떻게 막아내고 압록강까지 진출할 수 있을까.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내가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은 아주 의외의 대접을 받았다.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이 우리 사단을 군단의 ‘예비’로 조정했다. 전력 재정비 차원이었다. 나름의 배려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시작한 뒤 평양 입성, 운산 전투 등에서 쉼 없이 최전선을 담당했던 1사단에 모처럼의 휴식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평양 북방 안주평야에 있는 입석의 비행장에 주둔했다. 우리 사단은 운산 전투에서 500여 명의 사상자, 중(中) 박격포 2문 상실 등의 피해를 보았다. 그 상처를 치료하고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앞으로의 반격을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비행장 크기는 상당했다. 여의도 비행장 규모는 돼 보였다. 미군 수송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착륙했다. 전선으로 보내는 물자를 싣고서였다. 매일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바라보면서 안정적인 물자 보급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우리는 이때서야 동복(冬服)을 지급받았다. 탄약도 새로 챙길 수 있었다. 신병도 보충해야 했다. 모든 사안이 내가 직접 결재하고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대한민국 육군본부, 미 1군단 사령부와 늘 의견을 주고받았다. 피복과 신병 재충전은 육군본부와 연락하면서 해결해야 했다. 탄약과 다른 보급품들에 관한 사항은 미군과의 연락을 통해 처리해야 했다. 병사들의 훈련도 다시 시켜야 했다. 오랜만에 맞이한 달콤한 휴식 시간을 즐기고자 했던 장병이지만 그래도 전열은 침착하게 다시 다듬는 게 바람직하다.
그래도 병사들은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 코앞에 있지만 이때의 휴식 시간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었다. 이곳 안주평야에는 일제시대 때 대규모 전답을 개발한, ‘신전(新田)’ 개척지가 있다. 너른 평야에 논이 발달해 있었다. 마침 추수가 끝나 들녘에는 볏짚단이 여기저기 수북이 쌓여 있었다. 병사들은 이 볏짚을 사용해 임시 움막을 짓고 있었다. 아담한 크기의 볏짚 움막 수백 개가 비행장 주변의 들판에 만들어져 있어 눈길을 끈 기억이 난다. 푹신한 볏짚을 깔고 달콤한 잠을 이루는 병사들을 지켜보며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떠올렸다.
전쟁 중에 보는 위문 공연은 특별하다. 이때 서울에서 연예인들로 이뤄진 공연단이 왔다. 임시 가설 무대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춤과 노래는 전쟁에 지친 장병에게 특별한 위로를 주었음은 물론이다.
이틀인가, 사흘인가를 묵고 떠났던 연예인 공연단에는 코미디언 김희갑(1923~93)씨가 함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원래 그 쪽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이름을 제대로 알고 있는 연예인이 거의 없었다. 김희갑씨 정도는 알겠으나 다른 연예인들에 대한 기억은 그래서 없다. 참모 중의 한 사람이 “거, 왜 ‘홍도야 우지 마라’ 아시잖습니까. 그 가수도 와서 노래했습니다”라고 전해줬던 기억만이 있다.
나는 공연 첫날 대열 뒤쪽에서 선 채로 이들의 공연을 30분 남짓 지켜봤다. 병사들은 사단장인 내가 그들 속에 함께 섞여 있는 것도 모를 정도로 공연에 흠뻑 취해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연예인들의 춤과 노래가 펼쳐졌고, 병사들은 환호했다. 병사들이 이렇게라도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 감사했다.
그러나 나는 챙길 게 많았다. 우리는 새로 나타난 전선의 적들에게 왜 밀렸는가. 후퇴는 잘한 것인가. 중공군의 전력은 어느 정도로 강한 것일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다시 군화 끈을 조여 매야 하는 상황이었다. 10여 일 동안의 휴식 기간 동안 나는 달콤함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만큼 바빴다. 전투력이 강하고 끈질기면서 교란과 우회작전을 능수능란하게 펴는 적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계속>
[출처: 중앙일보]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⑧ 달콤한 휴식
'6 · 25전쟁 60년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⑩ 11월 말 공격 그리고 후퇴, 후퇴 (0) | 2021.05.28 |
---|---|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⑨ 전장에서 만난 영웅 (0) | 2021.05.26 |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⑦ 드러난 중공군의 얼굴 (0) | 2021.05.26 |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⑥ 미 8기병연대 3대대 (0) | 2021.05.26 |
[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⑤ 급박했던 후퇴 명령 (0) | 2021.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