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대 규모 김환기 회고전]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벽화 '여인들과 항아리'. 김환기 그림 중 최대 규모인 281.5 × 567㎝ 크기로, 이번에 발견된 김환기 수첩을 통해 제작 연도가 1960년으로 확인됐다. / 환기미술관
김환기의 수첩 보니··· 길이 5m 대작 그리며 "초조하고 괴롭다"
장녀 김영숙씨 집서 발견된 수첩
'여인들과 항아리' 작업 심경 적어
"달걀 두 개 먹고 제작" "죽고 싶다"
완성 후 "나대로의 그림 밀고가자"
1960년으로 제작연도 첫 확인도
용인 호암미술관서 오늘 개막
"오늘도 점심을 굶고 늦도록 벽화, 초조했던 저녁."
"어제도 오늘도 제작. 죽어버리고 싶은 날" ···.
대형 벽화를 의뢰받은 40대 화가는 끼니도 거르며 작업에 몰두했다. 어떤 날은 "11시에서 17시 30분까지 달걀 두 개 먹고 제작"하고, 어떤 날은 "제작에서 오는 희열"도 짜릿하게 맛본다. 몰입과 탈진, 만족과 불안을 오가며 이윽고 작품을 완성한 날, 그는 "벽화 완출 (完出) ! 나대로의 그림 그대로 밀고가자"라고 기쁨과 확신에 찬 문장을 수첩에 적었다. 1960년 1월 25일의 기록이다. 이 남자가 바로 훗날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132억원)를 기록하는 화가 김환기 (1913 ~ 1974). 이때 완성한 벽화가 2년전 이건희 컬렉션으로 기증돼 화제를 모았던 '여인들과 항아리'다.
김환기, '달과 나무', 1948. 73 × 61cm_캔버스에 유채. 1948년 신사실파 창립전에 출품된 작품으로, 김환기 특유의 한국적 추상의 서막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됐다. / 환기재단 · 환기미술관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18일 개막하는 '한 점 하늘 김환기'는 최고 경매가라는 기록에 가려진 김환기의 치열한 고뇌와 피땀 어린 노력, 강박에 가까운 집념을 보여준다. 호암미술관은 1년 반 동안의 리모델링을 마친 후 여는 첫 전시에서,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김환기의 예술 세계를 역대 최대 규모로 펼쳤다. 리움미술관 소장품, 국공립 미술관 소장품을 비롯해 알려지지 않은 소장가들의 희귀한 작품까지 한자리에 모았다.
김환기, '항아리', 1956, 캔버스에 유채. 국제무대를 꿈꾸며 1956년 파리로 건너간 김환기는 항아리와 산 등 한국적 소재를 더 파고드는 한편, 새로운 환경에서 조형의 변화를 시도했다. 이 작품은 이전처럼 달과 항아리의 직접적인 비유 대신 도자기 자체의 둥근 기형과 선반의 수평선을 조형 요소 삼아 화면을 구성했다. 자신의 애장 도자기를 빼곡히 보관하던 성북동집 작업실의 나무 선반을 연상케 한다. / 환기재단 · 환기미술관
김환기가 자신의 애장 도자기를 보관하던 나무 선반과 도자기들을 전시장 아카이브 공간에서 볼 수 있다. / 허윤희 기자
전시작 120점 중 유화만 88점. 도판으로만 확인되던 초기작과 미공개작을 선보이고, 김환기의 유품과 편지, 청년시절 사진과 스트랩북 등 자료 100건이 처음 공개됐다. 자료들은 김환기의 장녀이자 '한국 단색화의 선구자' 윤형근 (1928 ~ 2007) 화백의 아내인 김영숙이 자택에 보관하던 것으로, 이번 전시 준비 과정에서 발견됐다.
김환기가 홍익대 교수 시절 쓰던 수첩. 벽화를 제작하던 시기의 복잡미묘한 심경이 짧은 일기처럼 담겼다. 2층 전시장 아카이브 코너에서 볼 수 있다. / 환기재단 · 환기미술관
특히 김환기 그림 중 최대 규모인 '여인들과 항아리' (281.5 × 567㎝)가 1960년작이라는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태현선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은 "김환기가 홍익대 교수 시절 쓰던 수첩이 발견됐고, 그 안에 벽화 제작 기간의 복잡 미묘한 심경이 담겼다"며 "괴로워 죽겠다고 하고, 온종일 그림 그리고, 다음 날은 지쳐서 종일 자고, 다시 의지를 다지는 마음을 짧은 일기처럼 기록했다"고 했다.
김환기, '북서풍' 30–VIII–65, 1965. 178 x 127cm. 캔버스에 유채. 뉴욕 이주 이후 1965년부터 김환기의 작업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해, 이 작품처럼 달과 산 등 도식화된 풍경 요소들이 선과 점, 색면들로 대체된다. / 환기재단 · 환기미술관
전시는 1930년대 중반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70년대까지 40년 화업 여정을 따라간다. 달과 달항아리, 산, 구름, 새, 매화 등 한국의 자연과 전통 모티브가 그의 전형적인 추상 스타일로 정착돼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뉴욕으로 건너간 후엔 국제 무대에서 통할 새로운 추상 세계를 찾아 분투한다. 그 치열한 실험 끝에 다다른 세계가 수많은 점으로 가득한 점화 (點畵). 붉은색, 푸른색 사각형 화폭을 가득 채운 점들이 하늘을 유영하듯 찬란하게 빛난다.
김환기, '하늘과 땅' 24–Ⅸ–73 #320, 1973. 263.4 × 206.2cm. 캔버스에 유채. 화면을 구분하는 대지의 능선을 따라, 하늘의 축과 땅의 축을 따라 서로 다른 점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 즈음 그는 건강이 악화돼 작업의 힘겨움을 종종 토로했다. 이 작품 완성 날 일기에 "죽을 힘을 다해서 완성"이라고 기록돼 있다. / 환기재단 · 환기미술관
'하늘과 땅'은 전면 점화 중 처음으로 공간을 지칭하는 제목을 화가가 직접 붙인 작품이다. 푸른 점이 찍힌 하늘과 땅이, 화폭을 가로지르는 흰 선 하나로 능손을 통해 구분되고, 안정감과 동시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태 실장은 "점화를 아름답게 만드는 건 점을 품고 있는 선과 그 점을 구성하고 있는 면"이라며 "유려한 곡선을 느끼며 감상해 보시라" 고 했다.
김환기, '17-VI-74' #337, 1974. 캔버스에 유채. 86 x 121.5cm. 죽음을 예감하며 이 작품을 그린 작가는 1974년 7월 6일 생의 마지막 점화에 점을 찍고 7월 25일에 세상을 떠난다. / 환기재단 · 환기미술관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점화는 검게 변한다. "하루 열여섯 시간 서서 일하고, 침실에 가면 그냥 죽어버린다" 했을 정도로 몸을 혹사했던 그는 급격히 건강을 잃었다. 뉴욕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그의 나이 61세. 1974년 6월 16일 일기에서, 그는 "죽을 날도 가까워왔는데 무슨 생각을 해야 되나.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라고 시처럼 읊는다. 김환기가 일기에서 쓴 대로, 그가 찍은 점들은 "하늘 끝에 가 닿았을까". 극심한 고통 속에서 끝도 없이 점을 찍은 마지막 그림 앞에서 뭉클해진다. 전시는 9월 10일까지. 유료.
허윤희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23년 5월 18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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