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㉒ 서울 탈환 작전

드무2 2021. 5. 28.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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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㉒ 서울 탈환 작전

 

 

 

저기 멀리 한강이 보였다. 경기도 시흥의 국군 1사단 사령부를 떠나 북상하면서 점차 내 앞으로 다가온 파란 물결이 바로 한강이었다. 이제 저곳을 넘으면 대한민국의 심장인 서울이다. 전쟁 기간 동안 그곳을 두 차례 적의 수중에 내줬다. 개전 초기의 북한군과 1951년 1·4 후퇴를 있게 했던 중공군에게 한 번씩 점령됐다.



“서울로 진격” 한강 도하 상륙정 오르니 뜨거운 눈물이 …

 

 

국군과 미군·연합군의 공세는 더 강해졌다. 전선(戰線)을 38도선까지 밀고 올라가는 작전이 시작됐다. 이번 작전명은 ‘톱(Ripper)’이었다. 과감한 톱질이 필요하다는 뜻이었을까. 어쨌든 일차적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북상하는 게 일이었다. 한강 남안에 진출해 있던 미 25사단이 먼저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기 직전, 미군은 강 너머로 격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성공적으로 강을 건넌 사단은 포천 방향으로 진격했다. 이어 그 서쪽의 미 3사단이 광나루를 건넜다. 그리고 의정부를 향해 진격했다. 다시 그 서쪽부터 김포 애기봉까지 넓은 지역을 담당한 국군 1사단의 차례였다. 그러나 매슈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은 진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한강 너머로 서울을 보고 있는 심정은 답답했다. 언제 강을 건널까.

 

 

 

중공군에 내줬던 수도 서울을 1951년 3월 15일 국군이 다시 탈환했다.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 15연대 병력이 상륙주정을 타고 마포 쪽 모래사장에 도착한 뒤 시내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리지웨이 사령관은 나름대로의 계산을 하고 있었다. 섣불리 들어갔다가 남아 있는 적들에게 공격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자칫 시가전이라도 벌어지면 아군의 희생이 커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미 25사단과 3사단이 서울 북쪽을 향해 진군하면 서울 시내는 자동으로 포위되는 국면. 그런 상황에서는 적이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계산이었다. 좀 더 기다렸다가 적이 물러나는 추세를 보이면 진격하라는 뜻이었다.



나에겐 적의 눈앞에서 도하작전을 반복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한강을 건너는 척 상륙정을 발진시켜 건너편에 거의 접근했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를 계속했다. 이른바 양동(陽動) 작전이다. 서해안에 있던 유엔군의 해군 함정들까지 가세했다. 이들 함정은 평안남도 진남포 앞바다에 진출해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상륙을 가장한 작전도 구사했다. 서울과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중공군의 주력 부대 병력을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위장 전술이었다.

 

 

 

 

 

 

미 1군단 부군단장인 토머스 해럴드 준장이 찾아 왔다. 나와 함께 김포반도 북단에 올라가 적정을 살폈다. 지프를 타고 언덕에 오르자 강 건너편에서 뭔가 반짝거렸다. 적의 총구에서 내뿜는 불꽃이었다. 적의 총탄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두 사람은 급히 몸을 피했다. 좀 더 지체했다가는 적의 총탄에 맞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적들이 한강 맞은편에 포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미군은 3월 10일쯤 도하장비를 국군 1사단에 보내기 시작했다. 우리 사단은 대대 규모의 수륙양용차와 고무보트 등 장비를 받아 도하 및 시가전 훈련을 계속했다. 소규모 수색대를 서울로 보내 직접 적정을 탐색하기도 했다. 안성에 주둔했을 때 임시로 편성한 화교 수색대는 이때에도 실력을 발휘했다. 작전 중에 전사한 화교 청년도 있었다. 이들은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1951년 3월 14일 밤에 올라온 수색대 보고가 눈에 띄었다. 적이 철수 중이라는 것이다. 경춘선(京春線) 철도를 미군이 이미 차단했고 홍천 지역이 우리 쪽으로 넘어 온 시점이었다. 후방을 포위당한 중공군이 철수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나는 즉시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에게 보고했다.



그의 입에서 “고 어헤드(Go ahead: 진격하라)”라는 짧고 굵은 명령이 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마포 맞은편 한강 남안에 리지웨이 8군 사령관, 밀번 군단장, 신성모 국방장관, 그리고 내가 섰다. 국군 가운데 가장 먼저 1사단 15연대가 도하하는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상륙정에 올라탄 병력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눈물을 잘 흘려 ‘낙루(落淚) 장관’이라 불렸던 신성모 장관이 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를 잡고서다. 감격에 겨웠던 모양이다. 좀체 눈물을 흘리지 않는 나도 가슴이 뛰고 있었다. 장관의 눈물에 전염된 모양이다. 내 눈가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도 이어 지프에 탄 채로 강가에 접안 중이던 상륙정에 올라갔다. 문이 닫혔다. “부르릉-” 하는 힘찬 엔진 소리가 울렸다. 배가 움직여 강 저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약 3개월 적의 군화에 짓밟혔던 대한민국의 심장, 서울을 탈환하는 순간이다. 공산 치하에 두 번 넘겨진 서울이다. 이제 두 번째로 그곳을 되찾으러 나아가는 길이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 이곳을 우리는 왜 잃었고, 왜 다시 찾아 감격하는 것일까.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무량(無量)의 감개가 어느덧 내 가슴에 벅차오르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계속>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㉒ 서울 탈환 작전

 

 

 

[전쟁사 돋보기] LCM(상륙주정)

 

 

 

LCM(사진)은 ‘Landing Craft Mechanized’ 또는 ‘Landing Craft Mechanical’의 약자다. 기계로 움직이는 상륙용 선박이란 뜻이다. 큰 선박에서 병사와 장비를 해안까지 옮기거나 도하작전을 할 때 주로 이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처음 등장해 미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노르웨이 상륙작전, 이오지마 상륙작전, 라인강 도하작전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상륙이나 도강 작전 때 사용했다. 6·25전쟁 때도 한강 도강 작전 등에 투입했다.



상륙 · 도하 작전 때 이용
전차 1대+병력 60명 실어

 

 

여러 가지 디자인이 있다. 통상 3m 전후의 넓이에 11~14m 길이의 길쭉한 모양이다. 앞부분에 병사나 물자 수송 칸이 있고, 뒤쪽에 엔진이 있다. 뒷부분에 자체 방어용 기관총을 부착한다. 속도는 시속 13.6~15.7㎞로 느린 편이다.



적재 능력은 종류에 따라 24~64t에 이른다. 통상 100명 정도의 병사를 실을 수 있다. 전차 한 대에 60명 정도의 병력을 실을 수 있는 종류도 있다. 튼튼한 금속 선체는 물 위를 이동하는 동안 적의 사격으로부터 병사와 장비를 보호한다

[출처: 중앙일보] [전쟁사 돋보기] LCM(상륙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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