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⑳ 연합군의 영웅들
1951년 2월 경기도 양평의 지평리에서 격전을 치렀던 프랑스 대대원들이 재정비를 하던 중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미 2사단 23연대 전투단에 배속됐던 이들은 고립 상태에서 중공군 39군을 물리치고 반격의 전기를 마련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중공군은 개활지(開豁地:탁 트인 땅)에서는 승산(勝算)이 없어 보였던 모양이다. 1951년 2월 그들은 산악지대인 동쪽으로 공격해 왔다. 미 10군단이 맡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것도 무기와 보급이 약한 한국군을 주요 타깃으로 잡았다. 6·25전쟁에 참전하는 자국 병사들에게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이 내렸다는 지시가 있다고 들었다. “(화력이 좋은) 미군을 피하고 철저하게 한국군을 공략하라”는 내용이었다. 중공군은 이런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편이었다.
군 5개 사단 물리친 ‘지평리 대첩’… 두 명의 영웅 탄생
남한강 동쪽으로 북진했던 미 10군단은 미 2사단과 7사단에다 국군 5사단 및 8사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군단장은 1950년 크리스마스 공세 때 동부 전선을 지휘했던 에드워드 아몬드 소장이었다. 당시에는 미 8군의 월튼 워커 장군의 지휘를 받지 않았으나 1951년 2월에는 매슈 리지웨이 장군의 8군 예하에 들어와 있었다. 아몬드 소장은 횡성과 홍천을 잇는 공격로의 좌익에 국군 8사단(사단장 최영희 준장), 그 우익에는 국군 5사단(사단장 민기식 준장)을 앞에 세웠다. 미 2, 7사단은 국군 8, 5사단을 뒤에서 지원하도록 계획을 짰다. 폴 프리먼 대령의 미 23연대는 포병을 대폭 강화한 연대전투단(RCT)을 구성해 중앙선 철도를 따라 미 10군단의 가장 좌측을 담당했다. 낙동강 전선 다부동에서 국군 1사단에 배속돼 함께 싸웠고, 평안북도 운산 남쪽 군우리에서 중공군에 미 2사단이 당할 때 다행히 우회로를 선택해 다치지 않고 퇴각했던 부대다.
미군은 2월 15일 중공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계획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그에 앞선 2월 11일 선제 공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중공군 4개 사단에 포위된 국군 8사단은 횡성 서북쪽에서 크게 당했다. 국군 5사단과 지원부대로 왔던 국군 3사단(사단장 최석 준장) 역시 재편된 북한군 2, 5군단과 중공군의 공세에 말리면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아몬드 소장의 지휘 방식에는 문제가 있었다. 화력에서 뒤져 있는 국군 사단을 전면에 배치한 점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운산 전투 이후 한국군은 걸핏하면 중공군이 집중적으로 노리는 공격 대상이 됐다. 아무래도 대포와 전차 등에서 미군과는 큰 수준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아몬드 소장은 한국군을 전면에 내세우는 패착을 두었다.
51년도 미 10군단 지휘보고서에 따르면 국군 8사단은 장교 323명, 사병 7142명의 병력 손실을 본 것으로 나온다. 국군 5, 3사단 역시 부대원을 각각 3000명씩 잃었다. 한국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던 중공군이 공격로를 바꿨다. 이번에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砥平里)였다. 프리먼 대령의 23연대전투단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전투는 2월 13일부터 나흘 동안 격렬하게 벌어졌다.
여기서 두 사람의 전쟁영웅이 탄생한다. 주인공은 프리먼 대령과 그의 23연대를 도와 함께 작전을 펼쳤던 프랑스군의 랄프 몽클라 중령이다. 프리먼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군우리에서 미 2사단이 중공군에게 대패했을 때 천행으로 부대를 건진 인물이다. 몽클라 중령은 더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직접 겪은 역전의 용사였다. 원래 계급은 3성 장군인 중장이었다. 그러나 대대 규모의 프랑스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중령 계급장을 달고 한국전에 참전했다. 파견하는 병력이 대대급이어서 본인의 계급도 낮춰야 했다. 몽클라는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전쟁에 뛰어든 참군인이었다.
미 23연대전투단과 몽클라 중령의 프랑스 대대는 나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중공군에 대항했다. 전투는 처절했다. 둘레 1.6㎞에 이르는 원형의 진지 속에서 미군과 프랑스군은 끝까지 결전의 의지를 놓치지 않고 중공군과 사투를 벌였다. 진지를 넘어오는 중공군과 치열한 백병전까지 벌였다.
프리먼 대령은 전투가 시작된 뒤 부상했으나 후송을 거부하면서 처절하게 싸웠다. 부상이 깊어진 그는 전투가 종료되기 전에 결국 후송됐다. 중공군은 5개 사단에서 병력을 차출해 총공세를 펼쳤으나 결국 후방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온 마셜 크롬베즈 대령(미 1기병사단 5기병연대장)의 막강한 화력에 예기가 꺾이고 말았다. 애초 중공군은 지평리에서 전승을 거둬 이곳과 여주를 잇는 도로를 장악함으로써 아군을 동과 서로 분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거점 확보가 어려워져 크게 밀리게 된다.
지평리 전투는 연합군의 대승이자, 중공군에게는 씻을 수 없는 패배였다. 미 23연대전투단의 프리먼과 프랑스 대대의 몽클라는 격렬한 전장에서 태어난 영웅이었다. 지평리는 벼루처럼 평평한 지형이다. 개활지에서의 승리는 역시 화력과 기동력이 강한 미군과 연합군의 몫이었다. 이로써 리지웨이가 지휘하는 미 8군은 과감하고 폭넓은 북진의 기회를 맞이하게 됐다.
백선엽 장군
<계속>
[출처 :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⑳ 연합군의 영웅들
[전쟁사 돋보기] 프랑스 대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구축함 1척과 함께 지상군을 파견하기로 했다. 현역과 예비역에서 지원자를 뽑아 1개 대대를 편성했다. 해병대 출신 위주의 1중대, 파리경비대 출신의 2중대, 공수·외인 부대 출신의 3중대와 본부·지원 중대로 이뤄졌다. 인원은 400여 명. 그해 10월 25일 마르세유를 떠나 11월 29일 부산에 도착했다. 적응훈련을 거쳐 12월 중순 미 2사단 예하 23연대전투단(RCT)에 배속됐다.
해병대·공수·외인 혼성부대
400명 편성, 전투력 뛰어나
51년 1월 1일 강원도 횡성 북방에서 첫 전투에 참가했다. 주로 중부전선에서 격전을 치르면서 명성을 얻었다. 가장 유명한 게 지평리 전투다. 프랑스 대대는 상급부대인 23연대전투단과 함께 그해 2월 13일 지평리 전투에서 포위 공격을 해오는 중공군을 나흘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물리쳤다. 숨은 중공군을 이끌어내기 위한 미끼작전이었다. 여기서 패한 중공군은 북위 38도선 근처까지 후퇴해야 했다.
그해 5월 중공군 춘계공세 때도 강원도 홍천 북쪽에서 적에 포위됐지만 뚫고 나왔다. 그해 가을에는 ‘단장의 능선’ 전투에 투입돼 많은 희생을 치른 뒤 승리를 이끌어냈다. 휴전 때까지 연인원 3400여 명이 참전해 262명이 전사하고, 1008명이 부상했다. 규모는 작지만 용맹하고 전투력이 뛰어난 부대로 평가받는다.
채인택 기자
[출처: 중앙일보] [전쟁사 돋보기] 프랑스 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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