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㉑ 전세 뒤집은 51년 2월 중순

드무2 2021. 5. 28.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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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㉑ 전세 뒤집은 51년 2월 중순

 

 

 

미 1기병사단 소속 전차가 1951년 2월 경기도 용인 양지면에서 다리를 건너다 무게 때문에 바닥이 기울어지자 멈춰서 있다. 공병들이 다리 아래에 버팀목을 대고 구난전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중공군의 4차 공세(1951년 2월 11~18일)는 이렇게 끝났다. 50년 12월 31일에 벌여 이듬해 1월 10일까지 이어진 공격이 3차 공세였다. 우리는 이 공세로 북위 37도까지 밀렸지만, 다음에 벌어진 중공군 4차 공세에서는 전세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중공군 기습 무력화시킨 ‘킬러 작전’ … “다시 서울이 보인다”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원 겸 정치위원’이라는 직함으로 중공군을 총지휘했던 펑더화이(彭德懷)는 51년 2월 말에 베이징(北京)을 1주일간 방문해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전황을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마오에게 “전쟁에 관한 확실한 방침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오의 질책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자신도 3차 전역(戰役·3차 공세를 말함)에 대해 “부대가 극도의 피로감에 젖었고 운송선이 길어져 보급 또한 불량했다. 부대 인원은 절반으로 줄었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4차 공세에 대해서도 “5개 군을 모아 적의 반격에 맞섰지만 이른 시간 내에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평가했다. 전세가 전체적으로 기울어졌음을 인정하는 내용이다.



매슈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이 작전지시를 내렸다. 신속한 반격을 내용으로 하는 ‘킬러 작전(Operation Killer)’이었다. 작전 개시일은 2월 21일. 작전명이 선뜻 내키지 않았던지 워싱턴의 펜타곤(미 국방부)에서 이의를 제기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리지웨이는 시큰둥했다. 강인한 그의 성격상 그런 이의가 달가웠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서부전선을 맡은 미 1군단의 25사단은 남한산성 쪽을 공격했다. 미 3사단은 의정부를 향하면서 지금의 광진교가 있는 한강 남안의 동쪽을 맡았다. 국군 1사단의 작전 담당 지역은 광범위했다. 미 3사단의 서쪽, 그러니까 광나루 다리 서쪽부터 김포의 애기봉에 이르는 넓은 구역이었다. 사단 본부는 시흥에 차렸다. 국무총리를 지냈던 장택상씨의 별장이었다.



중부 전선을 맡은 미 9군단과 10군단은 팔당과 양평, 횡성을 잇는 선으로 진격했다. 미 해병 1사단도 원주에 도착해 전투에 나섰다.



횡으로 강하게 연결된 아군이 공세를 벌이면서 한 걸음씩 북상하는 ‘킬러 작전’은 효과를 드러냈다. 속도는 비록 늦었지만 적의 반격과 기습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이 작전으로 중공군은 계속 북으로 밀려갔다.



국군 1사단이 김포반도로부터 한강의 넓은 작전지역을 지탱하고 있는 동안에 우익의 모든 아군도 한강 이남으로 바짝 다가왔다. 이제 서울 재탈환을 눈앞에 두고 있는 형국이다. 모질게 추웠던 겨울의 강이 봄기운을 맞아 생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그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또 지프 사고를 당했다. 그 직전에는 미 9군단장이었던 브라이언트 무어 소장이 헬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의 도로는 좋지 않았다. ‘강원도 운전수’라는 말이 있다. 전쟁을 전후해서 유행했던 말이다. 당시 기준으로 간선도로와 일제 때 닦아놓은 신작로(新作路)는 아주 좋은 길에 속했다. 지금 도로 형편에 비춰보면 별것 아니기도 하지만. 다른 길은 울퉁불퉁하고 비좁으면서도 위험했다. 그중에서도 강원도 길이 가장 험했다. 워낙 깊은 산이 많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차를 몰고 다녔던 ‘강원도 운전수’는 한국 최고 수준의 드라이버다. 그래서 강원도 출신으로 차를 몰았던 사람이 부대에서도 가장 신뢰 받는 운전수였다. 길이 너무 험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지휘관들은 험한 도로 사정 때문에 조금 먼 거리는 헬기와 경비행기로 이동했다. 무어 소장도 헬기 편으로 이동하다 불행하게 사고를 당했다. 나는 50년 10월 말 운산 전투를 지휘하다가 지프 사고를 당한 일이 있다. 그때는 차에 있던 기관총 받침대가 공간을 만들어줘 나를 살렸다. 이번에는 수원의 미 1군단 사령부로 가던 도중 트럭을 비키려다 차가 뒤집어졌다. 함께 탔던 신성모 국방장관과 사단 수석 고문관 헤이즈레트 대령은 무사했으나 나는 허리를 다치고 얼굴이 찢어졌다. 수원의 이동 외과병원에 입원했다. 허리 통증이 심했다. 군의관들은 나를 후송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소식을 듣고 달려온 리지웨이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지금은 일선 사령관이 반드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냉정했다. 평시였다면 그 말이 섭섭하게 들렸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옳았다. 중공군에게 밀려 37도 선까지 내려왔다가 어떻게 만들어 낸 반격의 기회였던가.



나는 하루 만에 부대에 복귀했다. 허리의 통증은 좀체 가시지 않았다. 누군가 웅담을 가져다 줬던 것 같다. 나를 괴롭혔던 허리 통증은 약 덕분인지 한 달 정도 지나자 말끔히 나았다.



백선엽 장군

 

 

<계속>



[출처 :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㉑ 전세 뒤집은 51년 2월 중순

 

 

 

[전쟁사 돋보기] H-13 헬기

 

 

 

 

 

 

 

6·25는 군용 헬리콥터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첫 전쟁이었다. 가장 많이 활약한 헬리콥터는 미 육군과 해병대가 보유했던 H-13이다. 인디언 부족에서 딴 ‘수(Sioux)’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민수용은 ‘벨(Bell) 47’로 불렸다. 둥근 골조로 이뤄진 조종석이 특징이다. 조종사의 시계가 넓어 복잡한 전장에서 운용하기에 편리했다. 미군은 기체 좌측에 후송용 침대를 달아 환자 후송용으로 썼다. 이 기종은 1950년 12월 말 미 해병 소속으로 한국에 처음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중공군 공세로 발생한 미군 사상자 후송에 집중 투입됐다. 51년 1월까지 500명 이상의 전상자를 후송했다.



H-13은 미국 벨사가 46년부터 생산해 미 육군과 영국 육군에서 처음 공급했다. 구조가 단순한 데다 고장이 적고 가격도 다른 헬기에 비해 싼 편이다. 5600대가 생산돼 1973년까지 전 세계에서 사용됐다.



6·25 때는 이 외에도 시코르스키의 H-19와 H-5 등이 사용됐다. 주로 환자 후송과 병력 투입, 항공모함에서 지상으로의 인원 수송에 사용했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출처: 중앙일보] [전쟁사 돋보기] H-13 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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