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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5

[김일성과 박헌영 서열 바꾼 스탈린의 모스크바 면접]

[김일성과 박헌영 서열 바꾼 스탈린의 모스크바 면접]     일러스트 = 한상엽    조선공산당 1인자 박헌영은 왜'수령' 이 되지 못했나   스탈린이 호통쳤다"인민은 땅을 파고결정은 우리가 하는 것" 朴, 가정 파탄나도공산당에 몸 바쳤지만소련군 출신 金에 밀려    1900년생 박헌영은 1912년생 김일성보다 열두 살 위였다. 해방 이전 공산당 관련 사건으로 세 차례에 걸쳐 10년 가까이 복역했다. 1927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을 때는 법정과 구치소에서 광인처럼 날뛰었고, 두 차례 자살 시도를 했다. “대변을 보고는 손에 쥐어 벽에 바르고 간수가 밥을 갖다주면 밥은 그대로 두고 변을···” (박갑동, ‘박헌영’)이라는 일화는 당대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병보석으로 석방되어서는 만삭 아내..

[6 · 25전쟁 : 세계자유수호전쟁] 01

[6 · 25전쟁 : 세계자유수호전쟁] 01 6 · 25 전쟁 : 세계 자유 수호 전쟁 Korean War : Protection of Freedom of the World 기네스북 세계 최고 기록 인증서 Certificate of Guinness World Records, September 3, 2010 6 · 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지원한 세계 67개국 67 Nations Which Helped the Republic of Korea during the Korean War 유엔파병 16개국 의무지원 5개국 물자지원 40개국 전후 복구지원 6개국 6 · 25 전쟁은 전세계에 독립국이 근 91개 뿐이었던 당시에 세계 67개 나라 (전투병 파병 찹전 16개국, 의무지원국 5개국, 물자지원과 전후복구 지..

[공화국 대한민국 ② 김일성을 조종한 소련군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의 일기]

[공화국 대한민국 ② 김일성을 조종한 소련군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의 일기]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미국 측 수석대표는 하지 (앞줄 맨 왼쪽) 중장, 소련 측 수석대표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군사위원 스티코프 (하지 중장 오른쪽) 중장.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설계도는 김일성이 아니라 스티코프가 만들었다. 스티코프가 쓴 일기에 따르면 소련군 대위 김일성은 일거수일투족을 스티코프에게 지시받았다. 김일성은 완벽한 꼭두각시였다. / 국사편찬위원회 소련 꼭두각시 김일성이 농락한 대한민국 건국 북한 정권 과정 기록한 스티코프 일기 "김일성은 '동의하며' 지시를 수행" 46. 9. 11 '反압제 항의집회 조직' 46. 9. 28 '요구 관철 때까지 총..

김구 신화 10. 1948년 남북협상의 불편한 진실, 김일성이 폭로한 김구의 정체

김구 신화 10. 1948년 남북협상의 불편한 진실, 김일성이 폭로한 김구의 정체 정안기 前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2021. 6. 28 방송 김구의 신화 (10) 1948년 남북협상의 불편한 진실 김일성이 폭로한 김구의 정체 2021. 6. 28 (월) 정안기 1. 1948년 남북협상 1944년 좌우합작 1948년 2월 16일 김구는 김일성과 김두봉 앞으로 남북합작을 제의하는 서신에서 1944년 중경에서 연안의 김두봉에게 좌우합작을 제안한 역사적 경험을 간곡하게 언급했다. 안우생에 따르면 김구는 김두봉과 별개로 김일성과도 합작을 모색한 바 있었다. "1944년 말이었다. 일제의 패망이 완연해지던 때라 백범 선생의 가슴속에서는 조바심이 부쩍 있었다. 광복의 최후 결전에 참가하여 당당하게 환국해야..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7) 김일성과 박헌영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7) 김일성과 박헌영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던 김일성(왼쪽)과 박헌영이 회의장 바깥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초기 북한 정권을 이끌었던 두 사람은 6·25전쟁을 일으킨 뒤 국군과 연합군이 반격을 시작하자 반목과 갈등에 휩싸였다. 박헌영은 휴전뒤 김일성에 의해 숙청됐다. [중앙포토] 이상하다면 이상한 인연이다. 나와 김일성, 그리고 한때 그 밑에서 북한의 2인자로 행세하던 박헌영과의 관계 말이다. 나는 김일성을 일찍 만났다. 1945년 광복 뒤였다. 나는 그때 스물다섯의 나이, 김은 나보다 여덟 살 위인 서른셋의 나이였다. 나는 당시 해방 정국의 민족지도자였던 고당 조만식 선생의 비서였다. 조만식 선생의 비서실에 그는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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