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책들/2021년

2021-002 노포에 머문 시간

드무2 2021. 5. 1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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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02 노포에 머문 시간

 

 

 

 

 

 

 

 

 

 

 

 

김성자 제2시집

2019, 가온

 

 

대야도서관

SB155531

 

 

811.7

김54ㄴ

 

 

가온문학상 수상 시집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무인 발급기

 

 

디딤돌

무인 발급기

광대

고추와 고추장 사이

비단 주머니

감자 뿔났다

먼 옷을 짓다

장이 익는다

자린고비

모깃불

오이지 독백

너의 이름은

도토리 키 재기

공식법의 반란

냉동고에선

 

 

 

제2부 잠시 생각한다

 

 

잠시 생각한다

사막을 걷다

무두질

어우러지다

폐차장 가는 날

어미 거미

그림자

흙집 무너지다

나비 날다

갈무리

길 위에서

때를 놓치면

길들여지다

문턱을 넘다

빈 뜨락

웃음과 눈물 사이에서

사막에서

 

 

 

제3부 게, 누구 없소

 

 

한 웅큼 달빛만 있다면

사진첩을 태우다

게, 누구요

몽당 빗자루

골목길의 대화

골목길 소리

해무와의 밤을

길동무

얼굴

너를 두고 갈 수 없어

소꿉동무

 

 

 

제4부 노포에 머문 시간

 

 

태백산 천제단에서

노포의 우녀(牛女)

한계령은 목마르다

주산지

갯골 이야기

종이금고 -통장

통장

잊혀진 이름 물고 -DMZ

새별오름

무학리 천년 은행나무

독도 연가

장승

 

 

 

제5부 민둥산 억새

 

 

겨울 그 약속의 꽃

자스민꽃

초봄

서러운 환희

풍란

달빛

산수유꽃

자작나무 숲

백자에 핀 모란

다육이

마냥 머무르고 싶은

목련꽃

민둥산 억새

 

 

 

제6부 시간을 구걸하다

 

 

가장의 실루엣

한마디 말에

그 나라에도 모란은 -기일

시간을 구걸하다

못을 먹는 콘도르

아버지 사진 들고 -혼의 노래

연(鳶)

그날 그 길에서

알아보시겠습니까

가장 예쁘고 싶은 이별

 

 

해설 · 이수정(문학박사)

 

 

 

무인 발급기

 

 

동사무소에 갔다

생경한 철재 도구에

엄지손가락을 댄다

외눈박이 인공지능

첨단의 잠자리 눈

아직 이목구비 화려한 초로의 나를

지문으로 면밀히 추행한다

단발머리부터 모자 안의 흰 수풀

뼛속까지 보인다며

빤히 쳐다본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속살

바닥 드러난 갯벌이다

지울 수도 그릴 수도 없는

나만의 선을 유린당했다

지극히 사무적인 녀석의 지능 속에서

적나라하게 스캔 되었을

모멸감이 슬쩍 스친다

 

나의 영과 혼 서너 푼을 훔쳐 간 녀석과

어느새 정이 들었나

돌아서는데 자꾸 눈을 껌벅인다.

 

 

 

고추와 고추장 사이

 

 

그래, 맞다

삼십 대 맵고 독한 년이다

햇덩이 껄껄대며 손을 내민다

신발 가지런히 놓고 빨개진 얼굴

되뇌고 싶지 않은 것 뽑아 맷돌에 간다

 

맵고 독한 건 꼿꼿한 거라고 말하는

함지박에 들어간다

못생긴 가슴에도 꽃은 핀다는

메주 뒤따라 들어오고

참고 살았더니 단내가 난다는 엿기름

불지옥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찹쌀죽이 함께 하잔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절벽을 뛰어내렸다는

물이라는 아이 한마디 한다

쓴맛도 함께하면 단맛 난다고

 

살 부비며 영혼과 체온을 나눈 걸쭉한 마당

응어리 풀어지고 무르익은 정이 차르르

맥 섞을 동안

 

십 년 간수 빼고 헛기침으로 걸어온 신안지도

소금 한 주먹 휙 뿌리며 하는 말

고년 독하네, 새빨간 꽃의 맛!

 

혀끝을 감기는 칼칼하고 끌리는 매운 본성이

앙다문 속내를 풀어낸다

매운 건 독한 년이 푸는 게야

고추와 고추장 사이 여든 고개 그림자가 깊다.

 

 

 

감자 뿔났다

 

 

무표정한 검정 비닐봉지 속에서

패러독스가 올라온다

헤어날 길 없는 이명의 소용돌이다

혈관을 떠도는 갈망은

뽀얀 속살 헤집어

깊이 잠든 씨방 흔들어 깨운다

자맥질의 푸른 꿈천의 배꼽 꼬집어 물어뜯고

앙칼진 뿔마다 검은 독을 바른다

저만치 홀로 선 자유

아직은 장막으로 흙빛인데

불끈거리는 힘줄 어이하랴

나를 묶어 놓고 간 그녀

기차를 타고 멀리 갔는지

사태진 언덕 너머 벼랑 끝이라도 붙들었는지

무소식이다 감감하다

마지막 숨비라도 튀어

퍼런 손바닥으로 하늘을 뚫고 싶다

뚝뚝 순질러

알몸이 될 때까지.

 

 

 

 

장이 익는다

 

 

투박해도 이치를 아는 항아리

고층 아파트 베란다도 낯설지 않다

오가는 햇살 다독여 매어놓고

헐벗은 바람에 전신을 내어준다

보름달이면, 눈썹 달인들 어떠랴

무시로 보듬으면 윤슬 내리는 것을

짭짤한 간기 껴안고

씁쓸한 시간 아우르면

주체할 수 없는 단맛 내는 것을

햇귀로 달아오른 둥근 몸 꽃으로 핀다

서두르지 않아도 속까지 익은 고향의 정

할머니 투박한 손이다

땀 절은 어머니의 짠한,

단내 나도록 익는다는 것

모두 내어주고 품어 안는다는 것

둥근 항아리 어머니의 속내다

가슴 열어둔 채 옆에 두면

꼭 닮은 항아리 옆에 두면

툭툭 마디 부풀며

장이 익는다.

 

 

 

모깃불

 

 

풀잎 한 소쿠리 드러눕는다

별을 따서 불을 지피는 어머니

여름밤을 태운다

 

푸른 몸 비운 자리

먹빛 묘향이 일어나면

윙윙 붉은 발톱 멀어져 간다

 

나는 멍석에 누워 별을 받아

치마폭 가득 담은 채 잠이 든다

 

부엉이 우는 소리 박달나무 흔들고

불꽃을 자랑 않는 모깃불

담장 안을 에돌다

추녀를 넘지 않는다

 

그윽하게 녹아버린 한 줌의 재

활활 타오름 없이

허물어져 버린 어머니다.

 

 

 

잠시 생각한다

 

 

아파트 베란다 한 평, 내게는 '빼앗긴 땅,

그들에겐 궁전이다

부리 맞대고 체온 나누는

 

창밖을 무연히 내다본다

 

쫓아내려 촘촘한 그물망 만든 후

비둘기 그는 오지 않는다

이제 통로는 막혔다

 

오지 않을 것 알면서도 습관처럼

기다려짐은

오지 못할 것의 헛된 그리움인가

 

미움 속 웅크리고 앉은

그리움의 중량은 얼마나 될까

 

내 작은 창이 큰 창살 옆에 머물러있다.

 

 

 

어미 거미

 

 

거역할 수 없는 먹이사슬

견디기 힘든 일상이다

 

몽환의 날선 발톱을 세워

물레질로 밤새워 실을 잣는다

끝없을 씨줄날줄 무형의 문양은

오장을 흔들어 뼈로 조각한

정교한 요람이다

 

등을 토닥인다

아가, 배고프지, 조금만 참아

허기를 챙기려 낮게 엎드린다

어디선가 자박자박

하루치의 양식 발길 닿으면

마지막 목숨을 건다

 

누군가의 비명 땅에 떨어지고

아가의 두툼한 아랫배 하품이 몰려오면

흐믓한 미소 감춘 어미

비워낸 만큼의 자색 옷고름

 

허공에 내어준 후에야

빈 껍질로 장송곡 하나

풀씨 날리며 먼 능선을 넘는다.

 

 

 

문턱을 넘다

 

 

그의 거처에 자신의 몸 보다 긴 가뭄을

몇 차례 견딘 후의 결정인 듯

깨진 화분 문턱에 붉으죽죽한 지렁이

기다랗게 몸을 부리고 있다

 

파르스름한 달빛 한 걸음 내딛는 밤

구름 밟는 소리에 꽃잎 떨어진다

갈 곳 있는 새는 허공을 닦아 넘어야 하고

고운 낙엽도 바람 발끝에 채여야 구른다

계곡의 물줄기 산굽이 돌아 강에 닿고

제왕 같은 태양도 어둠 골짜기 건너야 한다

 

아랫목에서 일어난 아기

기지개로 오늘을 한걸음 떼고

나의 입술을 넘은 다디단 밥알

또다시 내 안의 무수한 문턱을 넘어야 한다

보이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

힘겹게 발효될 때까지

부딪쳐 파도를 넘어야 하고 발목을 잡아도 뜨는 별

우주 공간의 숱한 문턱을 넘어야 한다

 

야윈 모서리에 숨은 낱말 한마디

오늘도 솟을대문을 넘으려 안간힘을 쓴다.

 

 

 

게, 누구요

 

 

어이할꼬

깊은 밤, 신들린 듯

가지마다 넘나드는

여유로움

갈바람에 익은 담홍색 감인가 했더니

환한 빛덩이 얼빠져 서성이네

입술만 들썩이는

저 한량의 창백한 얼굴

그윽한 눈짓

애잔한 숨결은 그대로인데

달빛인 듯 구름인 듯 가물가물 다가오다

와사사 부서져

휘청이는 나를 업고

시푸른 밤을 처연히 휘어 감고 노니는

게, 누구요.

 

 

 

노포의 우녀牛女

 

 

볏단같이 우직한 맛집에 가면

옛정이 몰고 온 손님 받기에

우녀의 보조개 날로 깊어진다

백 년 시렁에 앉은 새벽달

한 줌 떼어 빚은 밥상

먼 데서 날아온 호접 먼저와 간을 본다

 

식객의 너스레 흩어지고

말갛게 비워진 그릇에 땀방울이 대신 누워

 

소금기 서걱이는 행주치마 받아내면

쪼갤 수 없는 시간 뒤로

우녀의 마음

고향집으로 달려간다

 

와 와, 이랴이랴, 워어이,

고삐 쳐든 주인의 성화에 못 견뎌

코뚜레 꿴 소 멍에 메고 쟁기 끌며

진창이 제 길인 양 묵정밭 이랑을 간다

땀방울의 신음이 워낭 흔들고

 

긴 하루 모퉁이에서 퀭한 눈 끔벅이다

외양간 건초더미에 몸을 눕힌다

 

오금이 저려도 꺾이지 않는

다부진 우녀牛女

너는 움직이는 꽃이다.

 

 

 

한계령은 목마르다

 

 

헉헉

용의 흔적을 밟아가는

산 배암의 허리만큼이나 가늘어진

령은 목마르다

 

잎새 누워 지친 하늘바라기 높기만 한데

지문 짜내듯 흐르던 물줄기

앙상한 뼈를 드러낸다

버짐 먹은 큰 바위 신음에

개구리 등피에 말라붙은 족적

낯선 옛 날 기억하고는

갈증의 마른 울음 목울대 친다

 

북으로 이는 구새 먹은 바람 한 점

아득히

에돌아도

떪은 전설의 땡감 같은 타는 빈 덕장

허허로운 말뚝, 유리알 같은 눈물이다

이 끝에서 저 하늘 끝까지

아우성 없는 함성은

목마른 령의 젖은 기원이다

 

삼백예순날 마냥 태양을 부려

작달비 한 소쿠리 몰고 와

산 넘어 산 넘어 거기

마른 목 채워 줄 그런 날 꼭 있으랴.

 

 

 

통장

 

 

나는 종이 금고

가슴에 천근의 자물쇠 잠겨있는

 

어떤 이는 노예다

어떤 이는 제왕이라 하지만

친구 떠난 거리에선 슬픔을 찍는답니다

 

주인은 애써 태연한 척

바벨탑의 분신으로

가위눌린 백 년의 민낯으로 살지만

깃털을 달고 날아다니지요

 

얇다고요, 투명하다고요

제 몸에 암호로 박힌

허울과 여정과 번민을

숱한 기호들을 기억하거든요

자유의 유품, 밀밀한 행복 말이에요

 

무게를 줄인다구요

뼛속마저 비우진 마세요

속박의 해방구를

떠나야 할 시간 일지라도.

 

 

 

서러운 환희

 

 

10월 친구야

무더운 여름 투정했던 어리석음이

저리 빛 고운 꽃으로 올 줄이야

아직은 더불어 잇음이 미쁘다

술렁이는 바람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붉은 산

노을 치받아 차오르는 땅거미 짙다

달과 바람 뭉근히 배어

죽은 척 살은 척

족쇄도 곰삭으니 붉은 꽃이구나

풀기 사라진 참살이 꽃 더 곱다

청산의 달그림자 기울어도

또다시 새 언어로 피어나니

마지막 잎새 하얀 넋으로

남아 있을 이녁이다

하늘 시린 10월 친구야

세상은 온통 서러운 환희다

뜨거운 사랑 노래 한 소절 띄우는.

 

 

 

자작나무 숲

 

 

황금색 물결 흔들리는

그늘 가로 금세

새하얀 요정들이 흩어진다.

 

진하게 풍겨오는 젖내음

깊은 고요의 바다

소리 없는 울림으로

이파리마다 아릿한 물이 든다

 

가지 끝을 노 젓는 낮달

무시로 들고 나는

하얀 바람의 숲에

계절 잊은 미생의 발길이 머문다

 

하늘은 얼 하나 없는 물소리

산은 푸른 호흡이라

그곳에서 다리쉼 하면

나는 없고 모두만 있는

자작자작 걸어가는

반백의 내 그림자.

 

 

 

민둥산 억새

 

 

정상을 쉬이 내어 주지 않는

민둥산은

바람의 길을 아는 억새군을

품에 안는다

햇볕에 기대어 사각대는

살풀이 유혹에 끌려 산마루 오르면

꼿꼿한 옛날이 안개로 흩뿌려져

이음매 없는 길을 연다

이마에 손 얹고 빙그레 웃는 산등성이

야윈 목소리

나를 끌어당긴 그 짧은 시간

삼단 같은 밤을 몸 태워 불 밝힌

억새

눈먼 바람의 고삐를 잡고

오르는 이의 매듭 한 올씩 풀어낸다.

 

 

 

한마디 말에

 

 

나를 물들게 하는

주말 꽃의 노래가 다가오면

가벼워진 발걸음 곳간 문 절로 열린다

적막을 깨우는 도마의 찰진 소리

지글지글 양은 냄비 사랑 익는 냄새

맨발로 달려가 마중한다

 

문지방 넘나드는 까르르 웃음소리

식탁 위 넘나드면

고독한 의자 덩달아 춤을 추고

숟가락마저 흥겨워 장단 치는

초침도 멈춘 꽃들의 세상이다

 

어디선가 뚝 뚝 삐걱

닳고 닳은 무르팍의 고함인가

꼿꼿한 대들보 아직 정신 멀쩡한데

숭숭 뚫린 저 구멍 딱따구리가 쪼았나

 

자지러진 비명, 서까래 튕겨져 나오는데

보석 같은 눈망울 반짝이며

쪼르르 달려온 여섯 살배기

할머니!

기절할 만큼 맛있어요, 더 주세요

 

달달한 목소리에

구멍 난 서까래 뚜 뚜뚜 제자리로

맞물린 뼈 벌떡 일어선다.

 

 

 

시간을 구걸하다

 

 

인파로 물결치는 공항 라운지

구걸할 수 없는 시간 무섭게 질주한다

 

말을 조여 허리에 맨 엄마와 딸

손끝 헛웃음이 유리알로 떨린다

조금만 더, 더

지켜보던 초침, 주저앉는다

짧은 이별도 이별은 이별인 것을

건네는 찻잔의 젖은 눈 마름질하고

탯줄에 매달린 별 하나 떨어져 나간다

 

비행기 활주로 간격을 좁혀오고

게이트의 숨 가쁜 손짓의 소리

하늘에 시린 눈물 고인다

떠나야 하는 캐리어 바퀴의 짐승 같은 울음이

라운지 벽을 마구 흔들고

안녕이란 말을 삼킨 채 일분일초의

시린 시간을 구걸하는 발걸음이

무너질 빙판이다.

 

 

 

못을 먹는 콘도르

 

 

손 뻗으면 닿을 거리

하염없이 북녘 하늘 바라보던

그 남자의 육십 년 서러운 타향살이

봇짐 풀지 못한 채 까치발로

가슴의 쇳물 찍어 새만 그리다

부리 길어진 새 그예 떠났다

 

그어진 선 한 줄 철조망에 걸렸다

하늘과 땅을 찌른 녹슨 대못

실어증 앓는 DMZ 풀꽃들

줄기마다 새겨진 칫빛 멍울

몸부림마저 없다

 

아득하기만 한 어머니 집으로

날아간 콘도르

솟구치는 날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든다

긴 부리로 비원의 쇠못을 뽑는 소식

쨍한 하늘을 가르는 소리

장벽을 넘어 예까지 들린다.

 

 

 

연鳶

 

 

아득히

아주 먼 옛날에

멀리

아주 높이 날아갔는데

 

천년의 연緣을 새긴 듯

대저

바람마저 피해가는

저,

나뭇가지에 걸린 치맛자락

 

낮 달이라 한들

누가 무어라 할까만

평생 인연 놓지 못한다.

 

 

 

알아보시겠습니까

 

 

당신이

생의 막다른 골목 벗어나던 그날

담장 넘을까 울음을 잠갔습니다

반창고 붙여도 눈물 들판을 가로지르고

기척 없이 내리는 첫눈에 밟혀

질린 꽃상여 더 못 가고

배웅하듯 길섶의 들풀만 술렁거렸습니다

재를 넘지 못하는 먼 나라 소식이라 이제야 안부 묻습니다

짙은 눈썹 밑 사슴의 눈망울, 짓궂던 장난기,

낭랑한 목소리 지금도 여전한가요

 

무너진 하늘 아래서도 떠오르는 태양

단비 몰아온 바람에 마른 목축이고

풋 열매 붉디붉게 탐스럽습니다.

두레반 가 오순도순 삼대의 웃음소리

담장 넘어 동서남북 태평양 건너

구슬 꿰는 눈빛들 다디답니다

노을에 기대선 은발의 망부석

나무라지 마세요

달빛 시린 서른하고도 세 번의 겨울입니다

 

가슴에 매어둔 언약의 꽃송이 여전한데

그날인 양 오늘 첫눈 하얗게 내립니다

계절 홀로 저만치 앞서가고

내일 같은 후일 우리 다시 만나면

정녕 알아보시겠습니까

흰 국화 한 송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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