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4 한국 사람 만들기 I (제2부 친중위정척사파<2>)
함재봉 지음
2017, 아산서원
능곡도서관
SF085708
309.111
함73ㅎ
함재봉(咸在鳳)
함재봉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이사장 겸 원장이다. 미국 칼튼대학교(Carleton College)에서 경제학 학사학위(1980), 존스홉킨스대학교(Johns Hopkins University)에서 정치학 석사 및 박사학위(1992)를 취득한 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1992~2005),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UNESCO) 본부 사회과학 국장(2003~2005),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 한국학연구소 소장 겸 국제관계학부 및 정치학과 교수(2005~2007),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 선임 정치학자(2007~2010) 등을 역임했다.
제4장
천주교의 도전
서광계
아담 샬과 순치제를 그린 당시 서양의 그림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가 그린 동아시아 지도(1602)
『기하원본』 표지의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
페르비스트
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
우르시스의 『태서수법』
지금 생각건대 애유략(艾儒略, 알레니)의 『직방외기』에 의하면 대서양은 아주 넓고 끝이 없기 때문에 서양에서도 대서양 밖에 대지가 있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100여 년 전에 대신 각룡(閣龍, 콜럼버스)이 동양 땅에 도달하고 묵와란(墨瓦蘭, 마젤란)은 동양으로부터 중국 대지를 거쳐 (지구를) 일주했다고 한다. 자사(子思, 공자의 수제자)가 지적한 것이 이로써 확실해졌다. 서사(西士)가 세계를 주항하는 구세(求世)의 뜻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익, 『성호전집』 55권, 「발직방외기」 ; 위의 책, p. 105에서 재인용.
지구는 둥근 하늘 가운데 있어서 오르고 내리지 못한다. 하늘은 하루에 한 번 왼쪽으로 도는데 그 주위의 크기가 얼마나 되냐 하면 12시간에 걸쳐서 돈다. 그 움직임은 이와 같이 아주 빠르다. 따라서 하늘 안에 있는 것은 그 세력이 한가운데를 향해 모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의 둥근 물건 안에 물건을 넣고 기구를 이용하여 회전시키면 물건이 언제나 한가운데에 밀려져 모여 멈추는 것은 실험으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땅은 밑으로 꺼지지 않고 위로도 솟구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한다. 상하 사방은 모두 땅을 밑으로 하고 하늘을 위로 한다. 만약 땅 밑의 하늘에 물건을 떨어뜨려도 언제나 땅에 떨어진다. 바다가 땅을 덮고 있는 곳도 몸을 두르고 있는 의대와 같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서양인이 서쪽 끝으로 항해해 가봤더니 동양이 나왔다. 그들이 항해를 계속하면서 별자리를 관측해 보았더니 천정(天頂)이 각각 차이가 있어서 이로써 지구 밑에 있는 바다도 역시 지구 위에 잇는 바다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익, 『성호전집』 55권, 「발직방외기」 ; 위의 책, p. 106에서 재인용.
『천주실의』는 이마두(利瑪竇, Matteo Ricci)가 저술한 것이다. 이마두는 바로 구라파(歐羅巴) 사람인데, 그곳은 중국에서 8만여 리나 떨어져 있어서 개벽한 이래로 통교한 적이 없다.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야소회(耶蘇會) 동료인 디아스(Diaz Emmanuel, 중국명 : 양마낙(陽瑪諾), 1574~1659), 애유락, 삼비아시(Sambiasi Franciscus, 중국명 : 필방제(畢方濟), 1582~1649), 웅삼발(熊三拔 Sabbathin de Ursis), 방적아(龐迪我 Diego de Pantoja) 등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찾아와 3년 만에 비로소 도착하였다. 그 학문은 오로지 천주(天主)를 지존(至尊)으로 삼는데, 천주란 곧 유가의 상제(上帝)와 같지만 공경히 섬기고 두려워하며 믿는 것으로 말하자면 불가(佛家)의 석가(釋迦)와 같다. 천당과 지옥으로 권선징악을 삼고 널리 인도하여 구제하는 것으로 야소(耶蘇)라 하니, 야소는 서방 나라의 세상을 구원하는 자의 칭호이다. 스스로 야소라는 이름을 말한 것은 또한 중고(中古) 때부터이다. 순박한 이들이 점차 물들고 성현(聖賢)이 죽고 떠나자 욕심을 따르는 이는 날로 많아지고 이치를 따르는 이는 날로 적어졌다. 이에 천주가 크게 자비를 베풀어 직접 와서 세상을 구원하고자 정녀(貞女)를 택하여 어미로 삼아서 남녀의 교감 없이 동정녀의 태(胎)를 빌려 여덕아국(如德亞國, Judea)에서 태어났는데, 이름을 야소라고 하였다. 몸소 가르침을 세워서 서토(西土)에 교화를 널리 편 지 33년 만에 다시 승천(昇天)하여 돌아갔는데, 그 가르침이 마침내 구라파 여러 나라까지 유포되었다. 대개 천하의 대륙이 5개인데 중간에 아세아(亞細亞)가 있고 서쪽에 구라파가 있으니, 지금 중국은 아세아 중 10분의 1을 차지하고 있고, 유태(猶太)는 또한 아시아 서쪽 나라 중의 하나이다.
『성호전집』 55권, 「발천주실의」.
그 학문(천주교)은 오로지 천주를 숭상하는데 천주란 유교에서 말하는 상제(上帝)이다. 공경해서 섬기고 두려워해서 믿는 것이 불교의 석가와 같다. 천당지옥으로써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하며 두루 인도하여 교화하는 것이 야소(耶蘇, 예수)이다. 야소란 서양에서의 구세의 칭호다.
『성호전집』 55권, 「발천주실의」 ; 강재언, 위의 책, p. 110에서 재인용.
(그들은)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 책을 읽어서 그 저서가 수천 종에 이른다. 그 앙관(仰觀, 천문), 부찰(俯察, 지리), 추산(推算, 수학), 수시(授時, 역법)의 묘법은 중국에도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 멀리 떨어져 있는 외국의 대신들이 큰 바다를 건너와 중국의 학사(學士), 대부(大夫)들과 어울려 배운다. 사대부들도 옷깃을 여미어 이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들은 또 호걸스런 선비라 하겠다. 그러나 축건(竺乾, 인도)의 종교(불교)를 배척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그들도 환망에 귀착한다는 것을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
『성호전집』 55권, 「발천주실의」 ; 강재언, 위의 책, pp. 110~111에서 재인용.
우리 선비들에게 절실한 공부는 오직 형이하학(形而下學)인데 이에 대해 그대의 형과 깊이 강론하였습니다. 그 실천의 공부는 본디 따라서 할 만한 순서가 있으므로 나의 말이 필요 없을 것이고, 오랫동안 수렴을 하면 저절로 숱한 의리가 목전(目前)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는 입으로 전수할 수 없고 도시 차근차근 힘을 기울여 진위(眞僞)를 경험해 보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안으로는 은미(隱微)한 심술(心術)과 밖으로는 모든 행동거지가 일상생활을 하는 사이에 반드시 엄폐할 수 없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안정복, 『순암집』 8권 (민족문화추진회, 1996), p. 90.
의관을 바르게 하고, 눈매를 존엄하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가지고 잇기를 마치 상제(上帝)를 대하듯 하라. 발가짐[足容]은 반드시 무겁게 할 것이며, 손가짐[手容]은 반드시 공손하게 하여야 하니, 땅은 가려서 밟아, 개미집 두덩(蟻封)까지도 (밟지 말고) 돌아서 가라. 문을 나설 때는 손님을 뵙듯 해야 하며, 일할 때[承事]는 제사를 지내듯 조심조심하여, 혹시라도 안이하게 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입다물기[守口]를 병마개 막듯이 하고, 잡념 막기[防意]를 성곽과 같이 하여, 성실하고 진실하여 조금도 경솔히 함이 없도록 하라. 동쪽을 가지고 서쪽으로 가지 말고, 북쪽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지 말며, 일을 당하여서는 그 일에만 마음을 두어, 그 마음 씀이 다른 데로 가지 않도록 하라. 두 가지, 세 가지 일로 마음을 두 갈래 세 갈래 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오직 마음이 하나가 되도록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피도록 하라. 이러한 것을 그치지 않고 일삼아 하는 것을 곧 '경(敬)을 유지함', 즉 '지경'(持敬)이라 하니, 동(動)할 때나 정(靜)할 때나 어그러짐이 없고, 겉과 속이 서로 바로잡아 주도록 하라. 잠시라도 틈이 벌어지면 사욕이 만 가지나 일어나 불꽃도 없이 뜨거워지고 얼음 없이 차가워지느니라.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자리를 바꾸고 삼강(三綱)이 멸하여지고 구법(九法) 또한 못 쓰게 될 것이다. 아! 아이들이여! 깊이 마음에 새겨 두고 공경할지어다. 먹을 갈아 경계하는 글을 씀으로써 감히 영대(靈臺)에 고하노라.
『퇴계선집』, 윤사순 옮김 (서울 : 현암사, 1982), pp. 356~357.
경재 잠도
무릇 사람이 가장 억제하기 어려운 것은 색(色)이 중점을 차지하고 먹는 것이 그 다음이다. 아름다운 찬(饌)이 있는 데가 잇으면 반드시 구하고야 마는데 하물며 그 앞에 당했다면 반드시 먹고야 만다. 한 번 먹고 두 번 먹어보면 탐내는 마음이 점점 불어나서 마치 무성한 풀에다가 또 거름을 더한 것과 마찬가지로 된다. 성인은 기욕이 본성을 상실하게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절제하는 것을 주로 삼았다. 그래서 그 "자른 것이 바르지 않다. 그 장을 얻지 못했다. "하는 것은 바로 그 방한(防限)이었다. 이 방한을 준수하여 감히 넘어감이 없으면 기욕이 날로 깎여짐과 동시에 모든 정욕의 치달음도 또한 점차로 감퇴하는 것이다. 대개 나날이 아침저녁으로 빼버려서는 안될 것은 오직 밥이지만 자기를 극복하는 것은 모름지기 친근한 데서 시작되기 때문에 식을 조절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는다. 성인은 구(矩)를 넘지 아니하므로, 이와 같이 힘을 쓴다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거지가 준승(準繩)이 아닌 것이 없으나 다만 그 이치가 이와 같기에 성인이 따른 것이다.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침처(寢處)에 있어 방을 달리 정하는 것이 색욕을 억제하는 길이요, 밥은 한 그릇을 다 먹지 않는 것이 기욕을 억제하는 길이라 했다. 한 그릇을 다 먹는다 해서 해가 있다는 말은 아니고 장차 이에서 익히고자 함이다.
이익, 『성호사설』 26권, 경사문, 절식.
지난번에, '경서 얘기하고 예문 논하고 하는 일을 말끔히 치워버리자.'고 하신 서신을 받고 저도 모르게 가슴이 덜컹했습니다. 전일에 실지 소득은 없이 공연한 문의(文義)에만 얽매여 큰 죄를 짓고 말앗으니, 저 자신으로서는 조석으로 허물을 고치기에도 겨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무슨 논설을 감히 또 하겠습니까. 그리하여 그동안 저의 미욱한 소견을 기록해 두었던 것을 전부 찢어버리고, 이제 죽기 전까지 오직 입을 다물고 자신의 수양이나 하면서 대악(大惡)에 빠지지 않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순암집』 6권, p. 314.
그들이 명색은 비록 구세(救世)를 한다지만 내용은 오로지 개인의 사욕을 위한 것으로 도교나 불교와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구세란 성인의 명덕(明德), 신민(新民)의 일과는 공사(公私), 대소(大小)의 차이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
『순암집』 6권, p. 321.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응당 현세의 일에 힘을 다하여 그 최선을 추구할 따름이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후세의 복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져서야 되겠습니까. 그들의 학으로 들어가는 문로(門路)는 우리 유학과 크게 달라서 그 뜻이 전적으로 한 사람 개인의 사적인 욕망에서 나온 것이니, 우리 유자의 공정한 학문이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순암집』 17권, p. 249.
성인의 가르침은, 독실히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죽기로써 지키고 도(道)를 선(善)히 함에 있다. 선가(禪家)의 학(學)이 어긋나고 도가 그릇된 데 대해서는 아직 그만두고, 다만 그 마음 둠[存心]이 십분 독실한 것을 보라. 그들의 잘못된 점은 치지(致知)가 마땅치 않은 데 불과할 뿐 성의(誠意)의 공부는 조금의 겨를도 방과하지 않는데 세상의 유술(儒術)을 살펴보면 어찌 일찍이 여기에 미쳤던가? 그 까닭은 무엇인가? 공명(功名)과 기욕(嗜欲) 등 허다한 사의(私意)가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바른길이 앞에 있지만 곁길이 모두 사람의 마음을 현혹해 문득 전일하지 못하게 한다. 마음이 전일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실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유술을 하는 자들이 말끝마다 이단을 배척하지만, 그 마음이 과연 이것은 붙들어야 하고 저것은 배척해야 하는 것을 밝게 아는지 알 수 없다. 만일 도(道)를 보기를 밝게 하지 못하면 믿기를 독실히 하지 못한다. 나는 이 도를 믿어 지키기를, 불문에서 그 스승 높이듯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 식견을 가지고 장차 어떻게 정밀하고 전일한 독학(篤學)을 배척하겠다는 것인가? 우습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다. 나는 속유(俗儒)들이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바가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스승을 높이고 도를 믿는 것이 한 가지요, 안일(安逸)한 마음이 없는 것이 두 가지요. 식색(食色)을 끊는 것이 세 가지요. 대중을 사랑하는 것이 네 가지다. 식색과 사랑에 대해서는 혹 중도(中道)에 지나친 바가 있지만, 속유들의 정을 방자히 하고 욕심을 극도로 하는 것에 비교하면 과연 어떠한가? 내가 일찍이 절간에 있었는데, 치도(緇徒, '중'을 이름)들이 대사부(大士夫)보다 나은 점에 대해 탄식한 바 있다.
『성호사설』 13권, 인사문, 「속유척불」.
『칠극』은 서양(西洋) 사람 방적아(龐迪我)의 저술로 곧 우리 유교(儒敎)의 극기(克己)의 논설과 같다. 그 말에 "인생(人生)의 백 가지 일은 악(惡)을 사르고 선(善)을 쌓는 두 가지 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므로, 성현의 훈계는 모두 악을 사르고 선을 쌓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무릇 악이 욕심에서 생겨나기는 하나 욕심이 곧 악은 아니다. 이 몸을 보호하고 영신(靈神)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욕인데, 사람이 오직 사욕에만 빠지므로 비로소 허물이 생겨나고 여러 가지 악이 뿌리박는 것이다. 이 악의 뿌리가 마음 속에 도사려, 부(富)하고자 하고, 귀하고자 하며, 일락(逸樂)하고자 하는 이 세 가지의 큰 줄기가 밖에 나타나고 줄기에서 또 가지가 생겨, 부하고자 하면 탐심(貪心)이 생기고, 귀하고자 하면 오만(傲慢)이 생기며, 일락하고자 하면 탐욕(貪慾)과 음탕(淫蕩)과 태만이 생기고, 혹 부귀와 일락이 나보다 나은 자가 있으면 곧 질투심이 생기고, 내 것을 탈취당하면 곧 분심(忿心)이 생기는 것이 바로 칠지(七枝)인 것이다. 탐심이 돌과 같이 굳거든 은혜로써 풀고, 오만함이 사자(獅子)와 같이 사납거든 겸손으로써 억제하며 탐욕이 구렁[壑]과 같이 크거든 절제(節制)로써 막고, 음심(淫心)이 물과 같이 넘치거든 정절(貞節)로써 제지(制止)하며, 게으름이 지친 말과 같거든 부지런함으로써 채찍질하고, 질투심이 파도와 같이 일어나거든 너그러움으로써 평정시키고, 분심이 불과 같이 일어나거든 참는 것으로써 지식(止熄)시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칠지 가운데에는 다시 절목(節目)이 많고 조관(條款)이 순서가 잇으며 비유하는 것이 절실하여 간혹 우리 유교에서 밝히지 못하였던 것도 있으니, 그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공정(功程)에 도움이 크다고 하겠으나, 다만 천주(天主)와 마귀의 논설이 섞여 있는 것만이 해괴할 따름이니, 만약 그 잡설을 제거하고 명론(名論)만을 채택한다면, 바로 유가자류(儒家者流)라고 하겠다.
『성호사설』 11권, 인사문, 「칠극」.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근래의 이른바 천학이라는 것이 옛날에도 있었습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있었다."고 하였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위대하신 상제(上帝)께서 지상의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를 내리셨으니, 그 변함없는 본성을 따라서 그 올바른 도리를 실천한다면' 하였으며,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문왕(文王)께서는 삼가고 조심하여 상제를 잘 섬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이 유업(遺業)을 보전하리라' 하였으며, 공자(孔子)는 '천명(天命)을 두려워한다' 하였고, 자사(子思)는 '하늘이 명한 것을 일러 성(性)이라 한다' 하였으며, 맹자(孟子)는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本性)을 배양하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일이다' 하였다. 우리 유자(儒者)의 학문 또한 하늘을 섬기는 것에 불과하다. 동중서(董仲舒)가 이른바 '도(道)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것이 이것이다"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유자의 학문이 진정 하늘을 섬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대가 서양 사람들의 학문을 배척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이른바 하늘을 섬기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이쪽은 정당하고 저쪽은 사특하다. 그래서 내가 배척하는 것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저 서사(西士)가 동정(童貞)의 몸으로 수행을 하는 것은 중국의 행실이 독실한 자들도 능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또 지식과 이해가 뛰어나서 하늘의 도수를 관측하고 역법(曆法)을 계산하며 기계와 기구를 만들기까지 하였는데, 아홉 겹의 하늘을 환히 꿰뚫어보는 기구와 80리까지 날아가는 화포(火炮) 따위는 어찌 신비스럽고 놀랍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 인조 때 사신 정두원(鄭斗元)이 장계하기를, '서양 사람 육약한(陸若漢, Johannes Rodorigue)이 화기(火器)를 만드는 데, 80리 떨어진 곳까지 날아가는 화포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였다. 약한은 바로 이마두(利瑪竇)의 친구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또 능히 온 세계를 두루 다니는데, 어느 나라에 들어가면 얼마 안 되어 능히 그 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통달하고, 하늘의 도수를 측량하면 하나하나가 부합하니, 이는 실로 신성한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이미 신성하다면 왜 믿을 수 없단 말입니까?" 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그것은 과연 그렇다. 그러나 천지의 대세(大勢)를 가지고 말한다면, 서역은 곤륜산(崑崙山) 아래에 터를 잡고 잇어서 천하의 중앙이 된다. 그래서 풍기(風氣)가 돈후하고 인물의 체격이 크며 진기한 보물들이 생산된다. 이것은 사람의 배 안의 장부(臟腑)에 혈맥이 모여 있고 음식이 모여서 사람을 살게 하는 근본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중국으로 말하면 천하의 동남쪽에 위치하여 양명(陽明)함이 모여 드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런 기운을 받고 태어난 자는 과연 신성한 사람이니, 요(堯) · 순(舜) · 우(禹) · 탕(湯) · 문(文) · 무(武) · 주공(周公) · 공자(孔子) 같은 분들이 이들이다. 이것은 사람의 심장이 가슴속에 잇으면서 신명(神明)의 집이 되어 온갖 조화가 거기서 나오는 것과 같다. 이를 미루어 말한다면 중국의 성학(聖學)은 올바른 것이며, 서국(西國)의 천학은 그들이 말하는 진도(眞道)와 성교(聖敎)일지는 몰라도 우리가 말하는 바의 성학은 아닌 것이다" 하였다.
『순암선생님』 17권, 잡저, 「천학문답」.
이익의 친필
내가 듣기론 사람은 형기가 있기에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어도 실수를 실수를 안할 수 없다. 성인과 광인은 단지 회인(悔吝, 후회하고 맘에 계속 걸려 있는 것)으로 구별한다. 그러므로 이윤(伊尹)이 말하기를 광인을 생각하면 성인이 될 수가 있고, 성인이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이 된다고 했다. 생각한다는 것은 즉 회개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한테 몇 년 시간만 더 준다면 끝내 주역을 공부하여 큰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주공이나 공자와 같은 성인들은 후회할 만한 과오가 없겠지만 그들도 이와 같이 말했는데 하물며 평범한 사람들이야 어떻겠는가? 주역은 과오를 회개하는 책이다. 성인은 우환이 있으면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도 않으며 오직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다. 그러므로 문왕이 유리(羑里)에 갇혔을 때에 주역을 완성하였고,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재앙을 당했을 때에 십익(十翼)을 지었다. 64괘 중 다수의 괘가 회인으로 괘상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어찌 회개가 없겠는가? 만약 성인이라고 회개가 없다면 이미 성인은 우리와 같은 존재가 아닐 것이다. 그럼 무엇으로 그들을 사모하겠는가? 안자(顔子, 안회)가 인으로 칭하는 이유는 그가 같은 과오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기 때문이고, 자로가 용으로 칭하는 이유는 그는 자신의 과오를 알아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회개한다면 그의 과오가 허물이 될 수가 없다. 둘째 형이 재실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도 그의 지향이 어찌 크지 않을 수가 잇을 것인가? 회개에도 역시 도(道)가 있다. 만약 혹자가 구름이 자나가는 듯이, 한 끼 식사만큼의 짧은 순간에 분노하고 뉘우친다면 이것이 어찌 회개의 도가 될 수 잇을 것인가? 작은 과오가 생기면 개선하고 비록 잊어버려도 된다지만, 큰 과오가 생기면 비록 개선한다 하더라도 하루도 그 후 죄책감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후회와 회개가 마음을 기름지게 하는 것은, 마치 거름이 논을 기름지게 한 것과 같다. 거름은 부패하고 더럽지만 논을 기름지게 하고 곡식을 잘 자라게 한다. 뉘우침은 죄책감과 과오에서 온 것이고, 이를 잘 함양한다면 덕이 생기게 된다. 즉 이는 같은 이치이다.
丁若鏞 (정약용), 『與猶堂全書(여유당전서)』 第一集, 第十三卷, 記(기), 每心齋記(매심재기) ; 人有是形氣 雖上智不能無過 其聖其狂 唯悔吝是爭 故伊尹之言曰惟狂克念作聖 惟聖罔念作狂 念者悔之云也 孔子曰雖以周公之才之美 驕且吝 其餘無足觀 吝者不悔之云也 孔子曰假我數年 卒以學易 庶無大過矣 夫以周公孔子之聖 宜若無過之可悔 而其言若此 矧凡人哉 周易悔過之書也 聖人之有憂患也 不怨天不尤人 惟過之自悔 故文王拘於羑里 實始演易 孔子厄於陳蔡 厥有十翼 而六十四卦多以悔吝立象 由是觀之 聖人其無悔者邪 若聖人而無悔 則聖人者非吾類也 何慕焉 顏子之所以爲仁 不貳過也 子路之所以爲勇 喜聞過也 誠悔之 不以過爲咎也 仲氏之名其齋者 其志豈不弘哉 顧悔之亦有道 若勃然憤悱於一飯之頃 旣而若 浮雲之過空者 豈悔之道哉 有小過焉 苟改之 雖忘之可也 有大過焉 雖改之 不可一日而忘其悔也 悔之養心 如糞之壅苗 糞以腐穢 而壅之爲嘉穀 悔由罪過 而養之爲德性 其理一也 진탁 옮김.
다산 정약용
중국 선비가 말한다 : "이와 같다면, 그런 '자기 완성'은 천주를 위한 것이지, '자기를 위함'[爲己]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기) 밖의 것을 위한 배움'[外學]이 아닐런지요?"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 "어찌 '자기 완성'이 '자기를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천주를 위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 자기를 완성하는 '소이'(所以)가 되는 것입니다. (···) 의도함이 더욱 높으면 배우려는 것도 더욱 높아지는 것입니다. 만약 배우려는 사람의 의도가 (자기) 한 몸에 그친다면, 어찌 높다고 하겠습니까? '천주를 위함'에 이르면, 그 존귀한 뜻은 바로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을 것입니다. 누가 천박하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성인(聖人)으로 되게 하는 학문[聖學]은 우리[인간]들의 '본성' 안에 있으니, 천주께서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 주셨기에, 근원적으로 파괴될 수가 없습니다. 선비님의 나라[중국]의 유교 경전에서 말하는 '덕을 명백히 터득함'[明德], '천명(天命)을 명백히 터득함'[明命]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테오 리치, 송영배 옮김, 『천주실의』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pp. 357~358 ; 中士曰 如是 則其成己爲天主也 非爲己也 則母柰外學也 西士曰 鳥有成己而非爲己者乎 基爲天主也 正其所以成也 (···) 意益高者 學益尊 如學者之意 止於一己 何高之有 至干爲天主 其尊乃不可加矣 孰以爲賤乎 聖學在吾性內 天主銘之人心 原不能壤 貴邦儒經所謂明德明命是也.
승훈이 계묘년(1783)에 부친을 따라 베이징에 가게 되었다. 이벽이 비밀리에 부탁하며 말하기를 베이징에는 천주당이 있고, 천주당에는 서양 전도사가 있을 것이네. 자네가 방문해서 신경(信經) 한 부를 달라고 하고 세례 받기를 청하면, 전도사는 아주 사랑해줄 것일세. 진귀한 물건을 많이 받아 필히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네.
황사영, 「황사영 백서」 ; 강재언, 위의 책, p. 128에서 재인용.
우리는 신의 영광을 입었을 한 남성의 개종 사실을 위안의 말로 보고한다. 그 남성의 나라는 아직 선교사가 방문한 적이 없는 조선이라는 곳인데 중국 동쪽에 있는 반도이다. 이 나라는 매년 종주국인 중국에 사절을 파견한다. (···) 작년 말에 사절이 입경했는데 일행이 우리를 방문했기에 포교서를 나누어주었다. 일행 중 대관의 자식으로 아주 학식 있고 쾌활한 27세의 그 청년은 정말 마음으로부터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세례 전에 우리는 그가 만족할 때까지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또 우리는 국왕이 그의 행위를 죄악시하여 국법에 저촉된다고 하였을 경우의 결심을 확인했는데, 그는 결연히 진리라고 확신하는 종교를 위해서는 어떠한 고통도 죽음도 참고 견디겠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종법의 순결을 설명하고 다처제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는데, 그는 한 명의 정부인만을 두고 앞으로는 첩을 두는 일을 결코 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결국 귀국 직전에 교부의 허가를 얻어 그라몽 사제가 대부가 되고 베드로라는 성명을 주어 세례를 마쳤다.
山口正之(야마구치), 『朝鮮西敎史(조선서교사)』, pp. 73~74 ; 위의 책, p. 133에서 재인용.
교황 클레멘트 11세
이 포고령을 읽고 보니 이 야만스러운 서양인들이 어떻게 중국의 위대한 철학적, 도덕적 원칙들에 대해 감히 언급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 그들의 주장과 논리는 우스꽝스럽다. 이 포고령을 보니 나는 이들의 교리가 불교나 도교와 같이 형편없는 이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 이들은 너무나도 앞뒤가 안 맞는다. 나는 지금부터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교리를 중국 내에서 선교하는 것을 금한다. 그래야 앞으로 골치 아픈 일들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Jacques Gernet, China and the Christian Impact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p. 186.
강희제
볼테르
우리는 저 방대한 제국의 정치체제를 무신론으로 비난하는 바로 그 행위와 함께 그들을 우상숭배로 비난함 만큼 경박했다. 이것은 자체 모순이다. 중국인들의 전례에 대한 커다란 오해는 우리 자신의 관습을 기준으로 그들의 관습을 판단함으로써 야기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편견과 언쟁하기 좋아하는 정신을 가지고서 극동에까지 갔다. 중국인들 사이에 일상적인 인사인, 무릎 꿇고 하는 절을 우리는 경배 행위로 간주한다.
Voltaire, Essai sur les moeurs et l'esprit des nations vol. I (Charleston : Nabu Press, 2011) p. 186 ; 송태현, 「볼테르와 중국 : 전례논쟁에 대한 볼테르의 견해」, 『외국문학연구』 제48호 (2012), p. 174에서 재인용.
조선 교회에서는 지난 1790년 자신들이 궁금해 하는 여러 가지 의문점들과 질문사항들을 저에게 보내왔는데, 그 중에는 조상들의 신주를 만들어 모셔도 되는지 또한 이미 모시고 있던 조상들의 신주들을 계속 모셔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는 교황 베네딕토의 칙서인 '엑스 쿠오'(Ex quo)와 교황 클레멘스의 칙서인 '엑스 일라 디에'(Ex illa die)를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하여 아주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더랬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 대답은 조선의 많은 양반 계급 천주교 신자들이 배교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그들의 의문점에 대해 답하면서 조상들의 신주를 모시는 것을 비롯한 여러 의식을 교황청에서는 미신이라고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가 보낸 사목 서한을 통해 알렸더니,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는 자기네 나라의 관습이나 그릇된 풍습을 끊어 버리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들이 참된 종교라고 깨달았던 종교를 저버리려는 쪽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윤민구,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가 사천 대리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서울 : 가톨릭출판사, 2000), pp. 123~124.
서양의 간특한 설이 언제부터 나왔으며 누구를 통해 전해진 것인지 모르겠으나,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속이며 윤리와 강상을 없애고 어지럽히는 것이 어찌 진산의 원상연 윤지충 양적과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제사를 폐지하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위패를 불태우고 조문을 거절하는 것으로도 그치지 않고 그 부모의 시신을 내버렸으니, 그 죄악을 따져보자면 어찌 하루라도 이 하늘과 땅 사이에 그대로 용납해 둘 수 있겠습니까?
『정조실록』 정조 15년(1791) 10월 23일(갑자) 1번째 기사.
천주(天主)를 큰 부모로 여기는 이상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코 공경하고 높이는 뜻이 못됩니다. 그런데 사대부 집안의 목주(木主)는 천주교(天主敎)에서 금하는 것이니, 차라리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집안에 땅을 파고 신주를 묻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 앞에 술잔을 올리고 음식을 올리는 것도 천주교에서 금지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서민(庶民)들이 신주를 세우지 않는 것은 나라에서 엄히 금지하는 일이 없고, 곤궁한 선비가 제향을 차리지 못하는 것도 엄하게 막는 예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주도 세우지 않고 제향도 차리지 않았던 것인데 이는 단지 천주의 가르침을 위한 것일 뿐으로서 나라의 금법을 범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
『정조실록』 정조 15년(1791) 11월 7일(무인) 2번째 기사.
천하의 변괴가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마는, 윤 · 권 두 사람처럼 극도로 흉악한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시신을 버렸다는 것은 비록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낙착되었지만, 그 위패를 태워버린 것은 그자도 역시 실토하였습니다. 아, 이 두 사람은 모두 사족(士族)입니다. 그리고 지충으로 말하면 약간이나마 문자를 알고 또 일찍이 상상(上庠)의 유생이었으니, 민간의 부지스러운 무리와는 조금 다른데, 사설(邪說)을 혹신(酷信)하여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버린 채 단지 천주가 있는 것만 알 뿐 군친(君親)이 있는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나아가 평소 살아계신 부모나 조부모처럼 섬겨야 할 신주를 한 조각 쓸모 없는 나무라 하여 태워 없애면서도 이마에 진땀 하나 흘리지 않았으니, 정말 흉악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제사를 폐지한 것 등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에 속합니다. 더구나 형문을 당할 때, 하나하나 따지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사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
『정조실록』 정조 15년(1791) 11월 7일(무인) 2번째 기사.
나의 생각에는 우리 도[吾道]와 정학(正學)을 크게 천명한다면 이런 사설(邪說)은 일어났다가도 저절로 없어질 것으로 본다. 그러니 그것을 믿는 자들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전환시키고 그 책을 불살라 버린다면 금지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저 좌도(左道)를 가지고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키는 것이 어찌 서학뿐이겠는가. 중국의 경우 육학(陸學) · 왕학(王學), 불도(佛道) · 노도(老道)의 유가 있었지만 언제 금령을 설치한 적이 있었던가. 그 근본을 따져보면 오로지 유생들이 글을 읽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일일 뿐이다.
『정조실록』 정조 12년(1788) 8월 3일(임진) 1번째 기사.
승지 정약용이 상소하기를, "신이 이른바 서양의 사설(邪說)에 대하여 일찍이 그 글을 보고 기뻐하면서 사모하였고 거론하며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였으니, 그 본원인 심술(心術)의 바탕에 있어서는 대체로 기름이 퍼짐에 물이 오염되고 부리가 견고함에 가지가 얽히는 것과 같은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이미 한번 이와 같이 되었으니 이는 바로 맹자(孟子) 문하에 묵자(墨者)인 격이며 정자(程子) 문하에 선파(禪派)인 격으로 큰 바탕이 이지러졌으며 본령이 그릇된 것으로, 그 빠졌던 정도의 천심이나 변했던 정도의 지속은 논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내가 올바른 것을 얻고서 죽겠다."고 하였으니, 신 또한 올바른 것을 얻고서 죽으려 합니다.
신이 이 책을 얻어다 본 것은 대체로 약관의 초기였습니다. 이때에는 원래 일종의 풍기(風氣)가 있었는데, 천문(天文) · 역상(曆象) 분야, 농정(農政) · 수리(水利)에 관한 기구, 측량하고 실험하는 방법 등에 대하여 잘 말하는 자가 있었으며, 유속(流俗)에서 서로 전하면서 해박하다고 했으므로 신이 어린 나이에 마음속으로 이를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질이 조급하고 경솔하여 무릇 어렵고 교묘한 데 속하는 글들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탐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찌꺼기나 비슷한 것마저 얻은 바가 없이, 도리어 생사(生死)에 관한 설에 얽히고 남을 이기려 하거나 자랑하지 말라는 경계에 쏠리고 지리 · 기이 · 달변 · 해박한 글에 미혹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유문(儒門)의 별파(別派)나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문원(文垣)의 기이한 구경거리나 되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과 담론하면서 꺼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비난이나 배격을 당하면 그의 문견(聞見)이 적고 비루한가 의심하였으니, 그 근본 뜻을 캐어보면 대체로 이문(異聞)을 넓히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본래 지업(志業)으로 삼은 것은 단지 영달하는 데 있었습니다. 상상(上庠)에 오르면서부터 오로지 정밀하게 한결같이 뜻을 두엇던 것은 바로 공령(功令)의 학문이었으니, 더욱 어떻게 방외(方外)에다 마음을 놀릴 수 잇었겠습니까. 어떻게 뜻이 확립되었음을 표방하여 경위를 구별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벗어나지 않겠습니까. 그 글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설은 신이 옛날에 보았던 책에서는 못 본 것이니, 이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던 갈백(葛伯)이 다시 태어난 것으로 조상을 알아차리는 승냥이와 수달도 놀랍게 여길 것인데 진실로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가 조금이라도 있는 자라면 어찌 마음이 무너지고 뼛골이 떨려 그 어지러운 싹을 끊어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신해년의 변고가 발생했으니, 신은 이때부터 화가 나고 서글퍼 마음속으로 맹서하여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하였으며 성토하기를 흉악한 역적같이 하였습니다. 양심이 이미 회복되자 이치를 보는 것이 스스로 분명해져 지난날에 일찍이 좋아하고 사모했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니 허황되고 괴이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지리 · 기이 · 달변 · 해박한 글도 패가소품(稗家小品)의 지류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이 밖의 것들은 하늘을 거스르고 귀신을 업신여겨서 그 죄가 죽어도 용납되지 않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문인인 전겸익(錢謙益), 담원춘(譚元春), 고염무(顧炎武), 장정옥(張廷玉)과 같은 무리는 일찍이 벌써 그 거짓됨을 환하게 알고 그 핵심을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신은 멍청하게도 미혹되었으니, 이는 유년기에 고루하고 식견이 적어서 그렇게 되었던 것으로 몸을 어루만지며 부끄러워하고 후회한들 어찌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애당초 그것에 물이 들었던 것은 아이들의 장난과 같은 일이었으며 지식이 조금 성장해서는 문득 적이나 원수로 여겨, 알기를 이미 분명하게 하고 분변하기를 더욱 엄중히 하여 심장을 쪼개고 창자를 뒤져도 실로 남은 찌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위로는 군부(君父)에게 의심을 받고 아래로는 당세에 나무람을 당하여 입신한 것이 한 번 무너짐에 모든 일이 기왓장처럼 깨졌으니, 살아서 무엇을 하겠으며 죽어서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신의 직임을 체임하시고 이어서 내쫓으소서." 하니, 정조의 비답은 간단했다. "선(善)의 싹이 봄바람에 만물이 싹트듯하고 종이에 가득 열거한 말은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정조실록』 정조 21년(1779) 6월 21일(경인) 2번째 기사.
선왕께서는 매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듣건대, 이른바 사학이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 서울에서부터 기호(畿湖)에 이르기까지 날로 더욱 치성(熾盛)해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서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와 수령은 자세히 효유하여 사학을 하는 자들로 하여금 번연히 깨우쳐 마음을 돌이켜 개혁하게 하고, 사학을 하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며 징계하여 우리 선왕께서 위육(位育)하시는 풍성한 공렬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이와 같이 엄금한 후에도 개전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마땅히 역률(逆律)로 종사(從事)할 것이다.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統內)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劓罰)을 시행하여 전멸함으로써 유종(遺種)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이 하교를 가지고 묘당(廟堂)에서 거듭 밝혀서 경외(京外)에 지위(知委)하도록 하라.
『순조실록』 순조 1년(1801) 1월 10일(정해) 1번째 기사.
이 나라가 동쪽 땅에서 일어나 전국을 통치한 지가 200년에 가까워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천하의 대세는 번복이 무상한 것입니다. 후세에 와서 일을 그르쳐 불행한 일이 있으면 응당 영고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지만, 그 지역은 외지고 좁아서 쓸만한 곳이 못 됩니다. 조선은 영고탑에서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죠 있어서 인가가 서로 바라다보이고 부르면 서로 들리는데, 지역이 사방 3,000리나 됩니다. 동남쪽 지방은 땅이 기름지고. 서북쪽 지방은 장정들과 말들이 날쌔고 굳셉니다. 산이 천리를 연해 있어 목재를 이루 다 쓸 수 없고, 바다가 3면을 둘러 있어 생선과 소금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경상도에는 인삼이 지천으로 많이 나고, 제주도에는 좋은 말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땅이 기름지고 산물이 많은 좋은 나라이지만, 이씨가 미약하여 끊어지지 않음이 겨우 실오리 같고, 여군이 정치를 하니 세력 있는 신하들이 권세를 부리므로 국정이 문란하여 백성들이 탄식하고 원망합니다. 진실로 이러한 때에 내복을 명하시어 옷을 같이 입게 하고, 서로의 왕래를 터 이 나라를 영고탑에 소속시킴으로써 황조의 근본이 되는 영토를 넓히고, 안주와 평양 사이에 안무사를 설치하여 친왕을 임명하여 그 나라를 감독 보호하게 하되 은덕을 후히 베풀어서 인심을 굳게 단결시켜 놓으면, 전국에 변란이 일어나더라도 요동과 심양 동쪽의 지역을 갈라 근거로 삼아 그 험한 산악 지대를 방위할 수 있고, 장정들을 모아 훈련시켰다가 유사시 출동시키면, 이것이 튼튼한 기초를 만대에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황사영, 「황사영 백서」, 천주교 원주교구 배론 성지 홈페이지(http://www.baeron.or.kr/sub2/sub22-1.php?h=2&z=2); '영고탑'은 만주족의 발상지로 오늘날 중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낭안현 부근이다.
황사영 백서
이 나라의 병력은 본래 잔약하여 모든 나라 가운데 맨 끝인데다가 태평세월이 200년을 계속해 왔으므로 백성들은 군대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위에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로는 좋은 신하가 없어서, 자칫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기만 한다면 흙더미처럼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기왓장처럼 부서질 것이 츨림없습니다. 만일 할 수 있다면 군함 수백 척과 정예군 5~6만 명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글을 잘하고 사리에도 밝은 중국 선비 3~4명을 데리고 곧바로 해안에 이르러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되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입니다. 여자와 재물을 탐내어 온 것이 아니고 교황의 명령을 받고 이 지역의 살아있는 영혼을 구원하려고 온 것입니다. 귀국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를 기꺼이 받아들이신다면 우리는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도 없고, 절대로 대포 한 방이나 화살 하나도 쏘지 않으며 티끌 하나 풀 한 포기 건드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는 북 치고 춤추며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천주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천주의 벌을 집행하고 죽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왕은 한 사람을 받아들여 나라의 벌을 면하게 하시려는지, 아니면 나라를 잃더라도 그 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려는지, 그 중 어느 하나를 택하시기 바랍니다. 전주 성교는 충효에 가장 힘쓰고 있으므로, 온 나라가 봉행하면 실로 왕국에 한없는 복이 올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왕께서는 부디 의심치 마십시오"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양 여러 나라가 참된 천주를 흠숭(欽崇)하므로 오래 태평하고 길게 통치하는 결과를 동양 각국에 미치게 될 것이니, 서양 선교사를 용납하여 맞아들이는 것은 매우 유익하며 결코 해가 되는 것이 없음을 거듭 타이르면, 반드시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군함의 척수와 군대의 인원수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은 숫자면 대단히 좋겠지만, 힘이 모자란다면 배 수십 척에 군인 5~6천 명이라도 족할 것입니다.
황사영, 「황사영 백서」, 천주교 원주교구 배론 성지 홈페이지(http://www.baeron.or.kr/sub2/sub22-1.php?h=2&z=2); '영고탑'은 만주족의 발상지로 오늘날 중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낭안현 부근이다.
교황 레오 12세
교황 그레고리 16세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전경
앵베르 주교
신정왕후의 초상
조만영의 초상, 이한철 작.
조인영 초상, 이한철 작.
세실 제독
대불랑서국(大佛朗西國) 수사 제독(水師提督) 흠명 도인도여도중국각전선 원수(欽命到印度與到中國各戰船元帥) 슬서이(瑟西爾)는 죄 없이 살해된 것을 구문(究問)하는 일 때문에 알립니다. 살피건대, 기해년(754)에 불랑서인(佛朗西人)인 안묵이(安默爾), 사사당(沙斯當), 모인(慕印) 세 분이 있었습니다. 이 세 분은 우리 나라에서 큰 덕망이 있다고 여기는 인사인데, 뜻밖에 귀 고려(貴高麗)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대개 이 동방(東方)에서 본수(本帥)는 우리나라의 사서(士庶)를 돌보고 지키는 직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에 와서 그 세 분의 죄범(罪犯)이 무슨 조목에 해당되어 이러한 참혹한 죽음을 받아야 하였는지를 구문하였더니, 혹 귀 고려의 율법(律法)은 외국인이 입경(入境)하는 것을 금지하는데, 그 세 분이 입경하였으므로 살해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수가 살피건대, 혹 한인(漢人), 만주인(滿州人), 일본인(日本人)으로서 귀 고려의 지경에 함부로 들어가는 자가 있더라도 데려다 보호하였다가 풀어 보내어 지경을 나가게 하는 데 지나지 않으며, 몹시 괴롭히고 해치는 등의 일은 모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세 분은 한인 · 만주인 · 일본인을 대우하듯이 마찬가지로 대우하지 않았는지를 묻겠습니다. 생각하건대, 귀 고려의 중임(重任)을 몸에 진 대군자(大君子)는 우리 대불랑서 황제의 인덕(仁德)을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마는, 우리 나라의 사서는 고향에서 만만리(萬萬里) 떠나 있더라도 결단코 그에게 버림받아 그 은택을 함께 입지 못하게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황제의 융숭한 은혜가 널리 퍼져서 그 나라의 사민에게 덮어 미치므로, 천하 만국(萬國)에 그 백성으로서 다른 나라에서 그른 짓을 하고 나쁜 짓을 하는 자가 있어 살인이나 방화 같은 폐단에 대하여 사실을 심사하여 죄를 다스렸으면 또한 구문할 수 없겠으나, 그 백성에게 죄가 없는데도 남이 가혹하게 해친 경우에는 우리 불랑서 황제를 크게 욕보인 것이어서 원한을 초래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대개 본수가 묻고 있는 우리나라의 어진 인사 세 분이 귀 고려에서 살해된 일은 아마도 귀 보상(貴輔相)께서 이제 곧 회답하실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내년에 우리 나라의 전선(戰船)이 특별히 여기에 오거든 귀국에서 그때 회답하시면 된다는 것을 아시기 거듭 바랍니다. 본수는 귀 보상에게 우리나라의 황제께서 그 사만을 덮어 감싸는 언덕을 다시 고합니다. 이제 이미 귀국에 일러서 밝혔거니와, 이제부터 이후에 우리 나라의 사민을 가혹하게 해치는 일이 있으면, 귀 고려는 반드시 큰 재해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해를 임시하여 위로 귀국의 국왕에서부터 아래로 대신(大臣) · 백관(百官)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원망을 돌릴 수 없고, 오직 자기가 불인(不仁)하고 불의(不義)하며 무례한 것을 원망할 수 있을 뿐일 것입니다. 이를 아시기 바랍니다. 구세(救世) 1천 8백 46년 5월 8일.
『헌종실록』 헌종 12년(1846) 7월 3일(병술) 1번째 기사.
김대건의 일은 한 시각이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사교(邪敎)에 의탁하여 인심을 속여 현혹하였으니, 그 한 짓을 밝혀 보면 오로지 의혹하여 현혹시키고 선동하여 어지럽히려는 계책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술뿐만 아니라 그는 본래 조선인으로서 본국을 배반하여 다른 나라 지경을 범하였고, 스스로 사학(邪學)을 칭하였으며, 그가 말한 것은 마치 공동(恐動)하는 것이 있는 듯하니,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뼈가 오싹하고 쓸개가 흔들립니다. 이를 안법(按法)하여 주벌(誅罰)하지 않으면 구실을 찾는 단서가 되기에 알맞고, 또 약함을 보이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헌종실록』 헌종 12년(1846) 7월 15일(무술) 1번째 기사.
"이는 반드시 조선 사람으로서 맥락이 서로 통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어떻게 살해된 연유를 알겠으며, 또 어떻게 그 연조(年條)를 알겠는가?" 그러자 권돈인이 다시 말한다. "한 번 사술(邪術)이 유행하고부터 점점 물들어 가는 사람이 많고, 이번에 불랑선(佛朗船)이 온 것도 반드시 부추기고 유인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없으니, 모두 내부의 변입니다."
『헌종실록』 헌종 12년(1846) 7월 15일(무술) 1번째 기사.
제5장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동치중흥
1800년대 런던 동인도회사 본부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 차 사건
당시 아편 중독자들
희일추정도(喜溢秋庭图) : 후궁, 자식들과 함께 있는 도광제
임칙서(林則徐)
제1차 아편전쟁 : 1843년 영국 화가 FE. Duncan의 그림
기선(琦善)
로르카 모형(Lorcha) 모형
당시 영국 측에서 묘사한 에로우호 사건 그림. 마치 영국인 선원들이 탑승하고 있었고 영국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해리 스미스 파크스(Sir Harry Smith Parkes, 1828~1885)
에드워드 세이모 제독(Sir Edward Hobart Seymour, 1840~1929)
팔머스턴 경(Viscount Palmerston, 1784~1865)
엽명침(葉名琛)
샤프들레이느 신부(Auguste Chapdelaine, 중국명 : 마뢰(馬賴), 1814~1856)
엘긴 후작
승격림심
1860년 대고구 전투에서는 중국이 대패한다.
그로 후작
토마스 보울비
함풍제
피서산장 전도
피서산장의 내의 전각
피서산장 내의 전각
우리는 명령에 따라 나갔고 그곳을 약탈한 이후 궁 전체를 불태웠다. 마치 반달족들처럼 4백만으로도 되찾을 수 없는 가장 귀한 재물들을 (···) 어머니는 우리가 불태운 궁전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그곳을 불태우는 우리의 마음은 아렸습니다. 이 전각들은 어찌나 컸는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시간에 쫓겼는지 제대로 약탈도 못했습니다. 엄청난 양의 금 장식품을 마치 청동인 듯 태워버렸습니다. 군대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처참한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약탈에 미쳤었습니다.
- 찰스 고든 (Charles George Gordon, 1833~1885)이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에게 보낸 편지
Carroll Brown Malone, History of the Summer Palaces Under the Cb'ing Dynast (Urbana : University of Illinois, 1934), pp. 187~188.
찰스 고든
12지신 청동상이 있었던 원명원 분수대
원명원 12지신 청동상 중 토끼와 쥐, 2013년 크리스티 경매의 프랑수아 앙리 피노 회장이 중국 정부에 무상으로 기증.
경께서는 중국 원정에 대한 저의 견해를 물어보셨습니다. 경께서는 이번 원정이 명예롭고 영광스러웠다고 여기시는데 저의 의견을 중요시 하시면서 물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경께서는 이번 중국 원정은 빅토리아 여왕과 나폴레옹 황제의 공동 기치하에 이루어졌기에 그 영광을 영국과 프랑스가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면서 저에게도 영국과 프랑스의 승리를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저의 견해를 물어보셨기에 아래와 같이 답합니다.
이 세상의 한 곳에 경이로움이 있었습니다. 이 경이로움은 원명원이라고 불렸습니다. 예술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이데아는 유럽의 예술을 낳았고 환상(키메라)은 동양의 예술을 낳았습니다. 파르테논이 이데아를 기본으로 하는 예술의 극치였다면 원명원은 환상 예술의 극치였습니다. 거의 초인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상상력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파르테논과 같이 한 개의 독립적인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환상 그 자체의 모형이었습니다. 환상의 모델이 있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건축물을 상상해 보십시오. 달나라에 있는 건물 같은 것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원명원이었습니다. 대리석과 옥, 청동과 자기로 꿈을 짓고 삼나무로 그 틀을 짜고 보석으로 뒤덮고, 비단으로 휘감아서 한 곳에는 안식처를, 다른 곳에는 후궁들의 침실을, 다른 곳에는 성을, 그곳에 신(神)들을 집어넣고 괴물들도 넣고 광택을 내고, 에나멜을 바르고, 물감을 칠하고 건축가들과 시인들에게 1천1일 밤의 1천1개 꿈을 짓게 하고, 정원, 호수, 분수와 거품, 백조, 따오기, 공작을 더하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원과 궁궐의 얼굴을 가진 환상의 눈부신 동굴이란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런 건축물이었습니다. 이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몇 대에 걸친 인고의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한 개의 도시만큼이나 거대한 이 위대한 건축물은 몇 세기에 걸쳐서 건설되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였습니까? 인류를 위해서였습니다. 시간의 창조물은 인류의 것입니다. 예술가, 시인, 철학자들은 원명원을 알았습니다. 볼테르도 늘 얘기했습니다. 인류는 그리스의 파르테논,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콜로세움, 파리의 노트르담, 동양의 원명원을 말했습니다. 직접 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상상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무도 보지 못한 신비로운 걸작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멀리서 언뜻 보일 듯 말 듯, 어스름 속에, 유럽 문명의 지평선에 비친 아시아 문명의 실루엣이었습니다.
이제 이 경이로움은 사라졌습니다.
어느 날 두 강도가 원명원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는 약탈했고 또 다른 하나는 불을 질렀습니다. 승리의 여신은 도둑질하는 여자도 될 수 있는 모양입니다. 원명원의 파괴는 두 승리자가 함께 한 일입니다. 이 모든 것에 얽혀 있는 것이 엘긴이란 이름입니다. 파르테논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이름입니다. 파르테논에 저질러졌던 것이 원명원에도 저질러졌습니다. 다만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더 철저하게 더 잘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성당의 모든 보물을 다 합쳐도 이 엄청나고 화려한 동양의 박물관에 비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는 예술의 걸작품들뿐만 아니라 엄청난 양의 보석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얼마나 엄청난 횡재입니까! 두 승리자 중 한 명이 자신의 주머니를 가득 채웠습니다. 이를 본 다른 한 명은 자신의 금고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손에 손잡고 큰 소리로 웃으면서 유럽으로 돌아왔습니다.
것이 두 강도의 얘기입니다.
우리 유럽인들은 문명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국인들은 야만인입니다. 이것이 문명이 야만에게 한 짓입니다.
역사는 그 두 강도 중 하나를 프랑스라고 부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항의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지도자들의 범죄는 그들에게 이끌림을 당하는 사람들의 죄가 아닙니다. 정부는 때로는 강도이지만 국민은 아닙니다.
프랑스 제국은 이 승리의 반으로 호주머니를 채웠고 오늘날 마치 자신들이 진짜 주인인 양 지극히 천진난만한 자세로 원명원의 유물들을 전시합니다. 저는 언젠가 구원받고 정화된 프랑스가 이 전리품들을 약탈당한 중국에 돌려줄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때까지는 도둑질이 일어났고 두 명의 도둑이 있습니다. 저는 분명하게 기억할 것입니다. 중국 원정을 저는 이만큼 지지합니다.
-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는 1861년 11월 25일, 자신의 친구인 영국의 버틀러 대위에게 쓴 공개 편지
Victor Hugo, "The sack of the Summer Palace," UNESCO Courier (Paris : UNESCO, November 1985), p. 15. 함재봉 옮김.
원명원 서양 전각의 폐허
건륭제의 명으로 그려진 원명원사십경(圓明園四十景) 중 「원명원방호승경전(圓明園方壶胜境殿)」
불타기 전 원명원 내의 전각
빅토르 위고
공친왕 혁흔
서태후
동치제
하장령(賀長齡)
도주(陶澍)
위원(魏源)
1736년 26세의 건륭제
곽숭도(郭嵩燾)
좌종당(左宗棠) 산시와 간수성의 총독 당시인 1875년 러시아 사진사가 찍은 사진
증국번(曾國藩)
후난의 증국번 저택
후난성 샹장 유역
청나라의 행정구역
호림익(胡林翼)
1860년 경의 이홍장(李鴻章)
상군의 안칭성 공격(1861)
서양 장교들의 훈련을 받은 회군의 양창대(洋槍隊)
프레더릭 타운샌드 워드(Frederick Townsend Eard, 1831~1862)
1864년 7월 19일, 난징의 외곽인 진링(金陵, 금릉, 난징의 옛 이름)을 수복하는 상군
회군의 군복
총리기무아문(總理機務衙門) 정문
제6장
위정척사파와 쇄국 정책
공충 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이 장계에서 이르기를, "6월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 죽선(三帆竹船) 1척이 홍주(洪州)의 고대도(古代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英吉利國)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와 수군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螢綏)로 하여금 달려가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말이 통하지 않아 서자(書字)로 문답하였는데, 국명은 영길리국(英吉利國)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고 부르고, 난돈(蘭墩)과 흔도사단(忻都斯担)이란 곳에 사는데 영길리국 · 애란국(愛蘭國) · 사객란국(斯客蘭國)이 합쳐져 한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에 대영국이라 칭하고, 국왕의 성은 위씨(威氏)이며, 지방(地方)은 중국(中國)과 같이 넓은데 난돈(蘭墩)의 지방은 75리(里)이고 국중에는 산이 많고 물은 적으나 오곡(五穀)이 모두 있다고 하였고,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 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베이징(北京)까지의 거리는 수로(水路)로 7만 리이고 육로(陸路)로는 4만 리이며, 조선(朝鮮)까지는 수로로 7만 리인데 법란치(法蘭治) · 아사라(我斯羅) · 여송(呂宋)을 지나고 지리아(地理亞) 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로드 애머스트(Lord Amherst)호의 방문에 대해, 『순조실록』 순조 32년(1832) 7월 21일(을축) 4번째 기사.
벨처 경 (Sir Edward Belcher, 1799~1877)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도희(金道喜)가 아뢰기를, "이양선(異樣船)에 대해서 제주(濟州)에서 사정을 물었을 때에 받은 번물(番物) 여러 가지는 그대로 봉하여 제주로 돌려보내 인봉(印封)해 두고 혹 뒷날 이것을 가지고 증거로 삼을 때를 기다리게 하겠습니다마는, 이 배가 세 고을에 두루 정박한 것이 거의 한 달에 가까운데 상세히 사정을 묻지 못하였습니다. 번인(番人)의 형적은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운데, 일찍이 선조(先祖) 임진년에 영국 배가 홍주(洪州)에 와서 정박하였을 때에 곧 돌아갔어도 그때 곧 이 연유를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한 일이 있었고, 그 뒤 경자년에 또 저들의 배가 제주에 와서 정박한 일이 있으나 잠깐 왔다 빨리 가서 일이 매우 번거롭기 때문에 버려두고 논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은 임진년의 일보다 더 이정(夷情)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고 사정을 묻는 가운데 청나라 통사(通事)가 있다 하였다 하니, 사전의 염려를 하지 않아서는 안될 듯합니다. 임진년의 전례에 따라 역행(曆行) 편에 예부에 이자하고 황지(皇旨)로 광동(廣東)의 번박소(番泊所)에 칙유(飭諭)하여 금단하게 하도록 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헌종실록』 헌종 11년(1845) 7월 5일(갑신) 2번째 기사.
서양 오랑캐는 그 의도가 토지에 있지 않으며, 통상과 포교에 전력할 따름이다. 북경에 들어온 후 친왕(親王)의 궁전을 점거한다거나 주민의 집을 산다거나 하여, 사는 집을 넓히는 것이 마치 영구히 안주할 계책인 것 같다. 식구를 거느리고 가구를 운반하여 오는 자들이 날마다 중을 잇고 있다. 그러나 우선은 침탈로 인한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은 없다. 그러므로 북경 시민들이 처음에는 자못 의심하고 겁먹다가, 한참 지나서는 점차 익숙해지고 안심하면서, 그들을 심상하게 대하며 서로 물건을 사고판다. 다만 그들이 제 뜻대로 방자하게 굴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한다. 실로 후환이 어느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다. 수외 양교(洋敎)는 비록 교관(敎館)을 세우고 해금(解禁)이 되었어도 호응하는 자가 없다. 오직 건달 무뢰배 중에서 남녀의 구별이 없음을 즐기고 재물을 대주는 것을 탐하여, 몰래 학습하는 자가 간혹 있을 뿐이라고 한다.
『환재총서』 제5책, 「熱河副使時抵人書」 (서울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7) pp. 618~619 ; 김명호, 『환재 박규수 연구』, pp. 399~400에서 재인용.
서양 오랑캐가 요구하는 바는 곧 배상금 독촉과 시장 개방 등의 일에 불과했다. 그러나 허락을 받지 못하자 군사를 일으켰고, 전쟁이 계속된 지 오래다 보니 주화(主和)와 주전(主戰)의 양론이 일어나는 것은 자고로 그런 법이다. 화의가 이미 진행된 뒤라 주전파가 공을 세우지 못하는 것도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랑캐가 마침내 점점 북경 부근에 육박하니, 군주란 본래 멀리 도피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만 어쩔 수 없이 주화파에게 이끌려 잠시 그 예봉을 피하면서, 한편으로 화의를 허락하고 조약 체결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자 오랑캐가 곧 철군하여 모두 떠나가고, 남아 있는 자들은 약간의 상인들 무리이다. 황제가 이미 열하에 도착했는데, 그곳 또한 생소한 지역은 아니다. 풀이 푸르면 (열하로) 떠났다가 풀이 시들면 돌아오니, 강희 이래 (황제들이) 다 그렇게 했다. 잠시 그곳에 머물러 여름을 나는 것도 역시 형세상 그런 것이다. 더구나 좋은 강물과 온천에서 건강을 다스리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으며, 가을에 황제의 행차가 돌아오는 것이 안 될 것이 없다. 어찌 의심할 거리나 되겠는가? 북경에 있는 모든 관청은 (열하로) 말을 빨리 몰아 시무를 아뢰니, 이에 관해서는 모두 기존의 규칙들이 구비되어 있다. 어찌 함풍제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건가? 황제가 (열하로) 떠난 것은 미상불 서양 오랑캐의 소요에 지나치게 겁을 먹은 것이었지만, 그가 잠시 열하에 머물고 있는 것은 반드시 이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瓛齋手柬(환재수간)」, 辛酉 7월 9일자 편지 ; 김명호, 『환재 박규수 연구』, p. 421에서 재인용.
남비(南匪, 태평천국군)가 금릉(金陵, 남경)을 점거한 지 지금 10여 년이다. 그들의 의도에는 산하를 나누어 차지해서 남조(南朝)의 천자가 되려는 계획이 없다. 오히려 약탈을 자행하는 극악한 도적이라, 도적들에게 함락된 백성들은 아직도 조정의 법도를 잊지 못하고 관군이 와서 구제해주기를 날마다 바라고 있다. 그러나 조정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적임자가 아니며, 군량이 계속 보급되지 못해 군사들은 지쳐서 공을 세우지 못하고, 지금까지 서로 버티고 있을 따름이다.
「瓛齋手柬(환재수간)」, 辛酉 7월 9일자 편지 ; 김명호, 『환재 박규수 연구』, p. 422에서 재인용.
흥선대원군
1884년 퍼시벌 로웰이 찍은 최초의 고종 사진
흥친왕 이재면
베르뇌 주교 (Siméon François Berneux)
도리 신부 (Pierre Henri Dorie)
리델 주교 (Félix Clair Ridel)
우리나라에서 작년 겨울부터 흉악한 무리와 도둑의 부유들이 무리를 지어 결탁하고 몰래 반역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마침내 체포해 보니 다른 나라 사람이 8명이나 끼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어느 곳으로 국경을 넘어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옷차림과 말하는 것은 동국(東國) 사람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간사스러운 여자로 가장하고 자취를 숨기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이 우리나라의 경내에 오랫동안 있었음을 미루어 헤아릴 수 있습니다. 설령 교리를 전파하고 익히게 하려고 하였다면 어찌 이렇게 비밀리에 하였겠습니까? 다른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에 표류하여 온 경우에는 모두 보호해주고 돌려보내 주지만, 공적인 증거 문건 없이 몰래 국경을 넘어온 자들의 경우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 원래 금석(金石)과 같은 성헌(成憲)에 있으므로, 이에 나란히 해당 법률을 적용하였던 것입니다. 가령 우리나라 사람이 몰래 다른 나라에 들어가 부당하게 법을 위반하면서, 그릇된 일을 선동하여 그 나라 백성과 그 나라가 피해를 입었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반드시 남김없이 모두 사형에 처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도 마땅히 그에 대하여 한 터럭만큼이라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의 변경을 튼튼히 하고 나라의 금법을 엄격히 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모두 그러합니다. 우리나라와 프랑스는 넓고 큰 바다로 막혀 있어 서계(書契)를 서로 통하지도 못하는데, 무슨 오래전부터 원망을 가진 일이 있거나 혐의스러운 일이 있다고 온전히 돌려보낼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서 차마 이와 같이 사형에 처하는 조치를 취하겠습니까? 이번에 프랑스에서 주장한 말은 미처 생각해 보지도 못한 문제입니다. 우리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전혀 연락을 가질 기회가 없었는데, 다행히도 여러 대인이 화해를 시켜주는 혜택을 입었고 깊이 생각하여 만전을 기하는 계책까지 가르쳐 주었으니, 이는 진실로 일반 규례를 벗어나 잘 돌봐주고 도와주려는 훌륭한 덕과 지극한 생각입니다. 앞으로 사행(使行) 때 그 정성에 사례하기를 기다리면서 이에 먼저 자세히 갖추어 회답합니다.
『고종실록』 고종 3년(1866) 7월 8일(갑자) 4번째 기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겨우 회답 자문에 관한 일을 계품(啓稟)하여 윤허가 내렸습니다. 다만 그러나 생각하건대 프랑스인이 우리나라에 의해 살해된 것에 대해서 저들이 '나라의 금령(禁令)이 엄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사람에게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법률을 적용한 것이 또한 프랑스와 무슨 관계가 잇다고 함께 거론하여 위협하는 것입니까? 또 이 일이 초봄에 있었는데 우리나라와 프랑스는 바다와 육지를 사이에 두고 몇 만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소식이 서로 통하는 것이 이처럼 신속하니, 틀림없이 법망에서 빠져나가 소굴을 잃어버린 나쁜 무리가 그들과 화응하고 부추겨서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변경의 방어가 허술하고 법령이 해이할 데에 생각이 미치면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 않은 심정입니다. 이른바 사학(邪學)을 믿는 불순한 무리를 서울에서는 두 포도청(捕盜廳)이, 지방에서는 각 진영(鎭營)이 각별히 조사하여 붙잡아 일일이 법대로 처리하게 하소서. 비록 변방의 금령에 대하여 말하더라도 텅 비게 내버려둘 수 없으니, 각 도(各道)의 도수신(道帥臣)에게 관문(關文)을 보내 신칙(申飭)하여 연해의 각 고을과 진영에서 만약 배를 기다리는 거둥이 수상한 자가 있으면 즉시 그 자리에서 효수(梟首)하여 여러 사람을 경계시키라는 뜻으로 급히 공문을 띄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고종 3년(1866) 7월 8일(갑자) 7번째 기사.
불에 탄 효명세자 어진
박규수
평양부에 와서 정박한 이양선(異樣船)에서 더욱 미쳐 날뛰면서 포를 쏘고 총을 쏘아 대어 우리 쪽 사람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들을 제압하고 이기는 방책으로는 화공전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므로 일제히 불을 질러서 그 불길이 저들의 배에 번져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쪽 사람들인 토머스와 조능봉(趙凌奉)이 뱃머리로 뛰어나와 비로소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하므로 즉시 사로잡아 묶어서 강안으로 데려왔습니다. 이것을 본 군민(軍民)들이 울분을 참지 못해 일제히 모여들어 그들을 때려죽였으며 그 나머지 사람들도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그제야 온 성안의 소요가 비로소 진정될 수 있습니다. 겸중군(兼中軍)인 철산부사(鐵山府使) 백낙연(白樂淵)과 평양서윤(平壤庶尹) 신태정(申泰鼎)은 직접 총포탄이 쏟아지고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싸움으로써 결국 적들을 소멸했으니 모두 그들의 공로라고 할만 합니다. 포상(褒賞)특전을 베풀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처음에는 이양선이 경내에 침입하였을 때 이미 방어를 잘하지 못하여 심지어 부장(副將)까지 잡혀가 억류당하는 수치를 당하게 한 데다 끝에 가서는 서로 싸우고 죽이게 하고야 말았으니, 이는 전하께서 멀리 있는 나라의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은 황공하기 그지없어 대죄(待罪)할 뿐입니다.
박규수가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해 올린 장계(狀啓), 『고종실록』 고종 3년(1866) 7월 27일(계미) 1번째 기사.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면 반드시 망하고, 국법(國法)을 어기면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 하늘이 백성들을 세상에 내려보냄에 이치로써 순(順)하게 하고, 나라의 봉강(封疆)을 나눔에 다스리어 지키게 하는 것이다. 순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질면서 해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수(守)라는 것은 무엇인가? 침범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거스르면 반드시 망하고 어기면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며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너그럽게 대해주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도(道)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너그럽게 대하여 이름도 알 수 없고, 도리(道里)도 알 수 없는 나라 사람들이 매번 우리나라 경내에 표류해오면, 수토지신(守土之臣)에게 명하여 영접하고 사정을 물어보면서 마치 오랜 우호 관계를 수행하듯이 하였다. 굶주렸다고 하면 먹을 것을 주고, 춥다고 하면 옷을 주었고, 병들었다고 말하면 약을 지어서 치료해 주기도 하였으며, 돌아가겠다고 하면 식량까지 싸서 보내주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대대로 지켜오는 법으로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으므로 온 천하가 우리를 일컬어 '예의지국'(禮儀之國)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약 우리 사람들을 인연(夤緣)하여 몰래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의 옷으로 바꿔 입고 우리말을 배워서 우리 백성과 나라를 속인다든지 우리의 예의와 풍속을 어지럽힌다면, 나라에 상법(常法)이 있는 만큼 발각되는 대로 반드시 죽인다. 이는 세상 모든 나라의 한결같은 법인데 우리가 상법을 실행하는 것에 대해서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성내는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 우리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지금 너희들이 이것을 트집 잡아 말하는 것은 이미 도리에 몹시 어긋나는 것이다.
일전에 너희 배가 우리 경강(京江)에 들어왔을 때는 배는 불과 2척이었고 사람도 1,000명이 못되었으니 만약 도륙(屠戮)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방법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몰래 침입한 자들과는 구별되었으므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사람들을 대해주는 의리에서 차마 병력을 가하여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경내를 지나며 소나 닭 같은 것을 요구하면 그때마다 주었다. 작은 배가 왕래할 때에 말로써 물으면 먹을 것은 받으면서 돌아가라는 말은 따르지 않았으니 너희들이 우리를 배반한 것이지 우리가 어찌 너희를 배반한 것인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고 갈수록 행패를 부려서 지금 우리 성부(城府)를 침범하고, 우리 백성들을 살해하고 제물과 가축을 약탈하는 행위가 한이 없으니 실로 하늘이 이치를 거스르고 나라 법을 어기는 자들로서 이보다 더 심한 자들은 없었다. 그러니 하늘이 이미 그들을 미워하고 사람들도 그들을 죽이려 하였다.
듣건대 너희들이 우리나라에 전교(傳敎)를 행하려고 한다는데 이는 더욱 안 될 일이다. 수레와 서책이 같지 않으며 각기 숭상하는 것이 잇으니 정사곡직(正邪曲直)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학문을 숭상하고 너희는 너희의 학문을 행하는 것은 사람마다 각기 자기 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남에게 자기 조상을 버리고 남의 조상을 조상으로 섬기라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만약 죽음을 면할 수 있다면 하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너희를 은(殷) 탕(湯) 임금이 갈백(葛伯)에게 하듯이 대해 주었는데, 너희는 우리를 험윤(玁狁)이 주(周)나라 선왕(宣王)을 배반하듯이 포악하게 대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지인지덕(至仁至德)하더라도 제멋대로 난동을 부리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천만(千萬)의 대병(大兵)을 거느리고 지금 바닷가에 나와 하늘의 이치를 받들어 토벌의 뜻을 펴려고 한다. 우선 내일 이른 아침에 서로 대면하자는 약속을 급히 보내니 군사의 곡직(曲直)과 승패(勝敗)가 결정되리라. 너희들은 퇴각하여 달아나지 말고 머리를 숙이고 우리의 명령을 들어라.
조선 조정이 로즈 제독에게 보낸 경고문, 『고종실록』 고종 3년(1866) 9월 11일(정묘) 9번째 기사.
프랑스 황제의 명령을 받은 전권대신(全權大臣)은 각 초(各哨)의 용맹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준절히 효유(曉論)한 일을 당신들 순무사(巡撫使)는 다 잘 알라. 나는 본 조정 황제의 명을 받고 우리나라 군사들과 백성들을 보호하려고 이곳에 있는 것이다. 올해에 이 나라에서 무고(無辜)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은 우리나라의 전교사(傳敎士)로 추중(推重)되던 사람이다. 너희는 어질지 못하게 불의(不義)로 그를 죽였으니 공벌(攻罰)하는 것이 마땅하다.
리고 전교사는 매우 어질고 의로운 사람이라 털끝만치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그를 죽였으니 천리를 어긴 것이다. 그러니 죄악은 세상 법에서 온전히 용서할 수 없다. 중국에서 지난 몇 해 전에 일어난 일을 듣지 못했는가? 그들이 불인(不仁)을 행하고 이런 흉악한 행위를 저질렀다가 우리 대국에서 토벌하니 머리를 숙이고 우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번 프랑스 전권대신은 불인불의(不仁不義)한 나라인 조선을 징벌하기로 정하였으니 만약 귀를 기울여 명을 따르지 않으면 전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1)세 사람이 관청을 부추겨 우리나라 전교사를 살해한 것에 대해 엄정히 분별할 것이다. 2)너희 관청에서는 조속히 전권(全權)을 지닌 관원이 조속히 이곳에 와서 직접 면대하여 영구적인 장정(章程)을 확정하라. 재해(災害)와 흉환(凶患)이 지금 가까이 닥쳤으니 너희가 재난을 피하려고 한다면 조속히 회답하고 명령을 받드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본 대신이 기일을 앞당겨 너희들에게 환난(患難)을 줄 것이니, 너희 백성들이 재난을 당하는 근원이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마라.
기원 1866년 양력 10월 18일
로즈 제독의 답장, 『고종실록』 고종 3년(1866) 9월 11일(정묘) 9번째 기사.
피에르-구스타브 로즈 제독(Rear Admiral Pierre-Gustave Roze)
"서양 배가 먼 바다를 건너와서 제멋대로 침략하는 것은 틀림없이 우리나라에 염탐하는 무리가 있어서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현재의 급선무는 간사한 무리를 다스려서 남김없이 없애는 것보다 우선하는 일이 없습니다. 서울에서는 형조(刑曹), 한성부(漢城府), 양사(兩司), 좌우변 포도청(左右邊捕盜廳)과 지방에서는 팔도(八道)와 사도(四都) 및 각 진영에서 간사한 무리들과 관계되는 자들을 모두 수색 체포하여 매달 월말에 의정부(議政府)에 보고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20인 이상을 잡았을 경우에는 좋은 지역의 변장(邊將) 자리를 만들어 차송(差送)하며, 만약 허위로 채워서 보고하였거나 진실과 거짓이 뒤섞였거나 또 혹 혐의로 인한 악감을 품고 평민을 잘못 체포하였을 경우에는 해당 군교와 하례들에게는 바로 반좌율(反坐律)을 시행하며, 잘 신칙하지 않은 각 해당 당상(堂上官), 도신(道臣)과 토포사(討捕使)를 모두 엄히 논감(論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고종 3년(1866) 10월 15일(경자) 2번째 기사.
강화도의 프랑스군
윌리엄스(Samuel Wells Williams, 중국명 : 위삼외(衛三畏))
미 해군의 와추세트(Wachusett) 호
지금 국론이 두 설로 나뉘어 다투고 있습니다. 이른바 양적(洋賊)을 치자는 것은 나라 입장에 선 사람이고, 양적과 화친하자고 하는 것은 적의 입장에 선 사람들입니다. 앞의 주장을 따르면 나라 안의 오랜 전통의 문물 제도를 보전할 수 있고, 뒤의 주장을 따르면 사람들을 짐승의 구역에 밀어넣게 됩니다. 이는 크게 구분되니 조금이라도 상도(常道)를 지키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두려운 것은 위급한 화가 눈앞에 닥친 때에 이해 타산과 요행수를 찾으려는 논의가 틈을 타면 성상께서 과연 한결같이 견지하면서 강경하게 진압하여 옛날 손씨(孫氏)가 오랑캐들을 치며 발휘한 높은 용맹과 같이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나라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논의에도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싸우면서 고수하자는 설이고, 하나는 도성을 떠나가자는 설입니다. 신의 생각은 싸우면서 고수하자는 것은 상경(常經)이고, 도성을 떠나자는 것은 달권(達權)입니다. 상경은 사람마다 다 지킬 수 있지만, 달권은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대체로 태왕(太王)의 덕을 지니고 있으면 가능하지만, 태왕의 덕을 지니지 않으면 저자에 사람들이 모이듯이 돌아오는 호응은 없습니다. 백성들은 한번 흩어지면 다시 규합시킬 수 없으며, 대세(大勢)는 한 번 떠나면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이 변란에 앞서 깊이 걱정하는 까닭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혹 변란이 있을 경우에는 차라리 상경을 지킬지언정 갑자기 성인의 일을 가지고 자신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만약 싸우면서 고수하자는 설을 전하의 마음속으로 확고히 정한다면 귀머거리나 절름발이 같은 자들도 또한 용기백배할 텐데, 하물며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집안의 사람들과 초야에 있는 충성과 의로운 사람들이야 누구인들 백성들에게 전하를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자고 고무 격려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빨리 비통해 하는 전교를 내려 외적들이 침입하게 된 원인에 대하여 스스로 반성하고, 앞으로 잘 처리해 나갈 뜻을 분명하게 보이십시오. 교서문을 매우 간곡하게 내려 귀신들도 눈물을 흘리고 초목과 풀마저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면 백성들 마음을 고무하여 개발시키는 실마리가 여기에서 얻어질 것입니다.
1866년 9월 12일(음)(10월 20일(양)), 동부승지 이항로가 올린 「척사소(斥邪疏)」,
『고종실록』 고종 3년(1866) 9월 12일(무진) 8번째 기사.
내가 열아홉 살 때에 학질을 앓은 적이 있다. 대개 병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문득 병을 적으로 여기고서 날마다 세수하고 머리 빗고 단정하게 꿇어 앉아서 제 힘으로 책을 읽었다. 안간힘을 쓸수록 병도 더욱 깊어져서 거의 내 몸을 가눌 수조차 없었다. 그래도 도중에 그 뜻을 바꾸려 하지 않고 수미음(首尾吟) 200수 읊으며 하루도 누운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원기가 더욱 손상되어 평생 동안 해를 입었다. 이 일은 소년기의 지식이 없던 시절의 일이나 경계할 만하다.
『華西集(화서집)』 附錄 卷9, 年譜(연보) ;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엮음,
『연보와 평전』 제5호 (밀양 : 점필재연구소, 2010), p. 88에서 재인용.
주자의 뒤에 출생한 우리나라 선배로서 그의 학설을 존숭하고 독신(篤信)하여 그를 갱장에서도 존모(尊慕)하기를 강조하였고, 정신이 서로 맞고 마음이 서로 융합되어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세미한 것과 큰 것을 모두 다 배워 빠뜨린 것이 없는 분이 송자이다.
『華西雅言(화서아언)』 卷12, 「堯舜(요순)」 ; 『연보와 평전』 제5호 (밀양 : 점필재연구소, 2010), p. 267에서 재인용.
송자는 주자를 계승하여 일어난 분이다. 송자가 존대 받지 못하면 주자만이 단독으로 존대 받을 수 없을 것인데 세상에 덕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게 되어 거의 한 나라의 선비나 한 세대의 현인과 동일시하려고 하니 세세한 걱정거리가 아니다.
『華西雅言(화서아언)』 卷11, 「易者(역자)」 ; 『연보와 평전』 제5호 (밀양 : 점필재연구소, 2010), p. 267에서 재인용.
우리 임금 이상 역대 임금 및 정통을 이어받은 임금으로부터 상고(上古)때에 하늘을 계승하여 군왕이 된 임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임금기로되 충성하고 경경하는 마음은 우리 임금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華西雅言(화서아언)』 卷8, 「桂山丈(계산장)」 ; 『연보와 평전』 제5호 (밀양 : 점필재연구소, 2010), p. 268에서 재인용.
화서 이항로
요순으로부터 주공에 이르기까지는 도를 행한 계통이요. 공자로부터 우암에 이르기까지는 학문을 전승한 계통이다. 공자는 요순과 같고, 맹자는 우와 같으며, 주자는 주공과 같고 우암은 맹자와 같다.
『華西雅言(화서아언)』 卷12, 「堯舜」 ; 『연보와 평전』 제5호 (밀양 : 점필재연구소, 2010), p. 268에서 재인용.
화서 이항로 생가
총령(叢嶺, 파미르 고원 지역을 일컬음, 여기서는 불교를 뜻함)의 해악은 그래도 한계가 있고 남녀의 관계를 끊고 어육(魚肉)을 금식(禁食)하고 술을 억제하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깎는 등 많은 수계(受戒)가 행해진 다음에야 비구(比丘)를 칭할 수 있으니 그 해악은 아직 적은 편이다. 하지만 서양(西洋)의 설(說)은 그렇지 않다. 남녀의 관계가 반드시 끊긴 것이 아니고 어육이 반드시 금지되는 것이 아니고 술을 반드시 억제하는 것이 아니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반드시 깎는 것이 아니고 마음[心]이 사악한지 올바르지를 묻지도 않고 사람이 은인(恩人)인지 원수인지는 관계없고 잘 놀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고 태만(怠慢)하고 오만(傲慢)하니 인욕(人慾)이 늘어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날로 늘어나고 천리(天理)가 사라지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날로 사라진다. 그 음탕함에 빠져 해치게 되는 모습은 인의(仁義)를 막는 화(禍)에 있어서 치발소비(薙髮燒臂)의 흐름(청나라의 풍속)보다 오히려 심한 것이다.
『華西雅言』 卷12, 「洋禍(양화)」 ; 오바타 미치히로(小幡倫格),
「이항로의 대외관 : 서양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화서학논총』 6집 (2014), p. 93에서 재인용.
맹자는 "그 심(心)을 보존하고 그 성(性)을 양육하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근거"라고 했는데 '심'이라는 것은 측은(惻隱)의 심 · 사양(辭讓)의 심 · 수오(羞惡)의 심 · 시비(是非)의 심을 가리키고 '성'이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가리킨다. 이 심과 성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다룰 수 없는 것이며 하늘이 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심과 성을 보존하고 양육하면 바깥에 구할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하늘을 섬기는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통해서 부자(父子) 사이에서 사랑[愛]과 공경[敬]의 도를 다하면 이것이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 군신(君臣) 사이에서 충성[忠]과 예도[禮]의 도(道)를 다하면 이것이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 장유(長幼)의 차례[序], 부부(夫婦)의 다름[別], 붕우(朋友)의 믿음[信]도 모두 하늘을 섬기는 근거이다. 그러나 서양은 그렇지 않다. 하늘이 우리에게 명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묻지도 않고 그냥 하늘에 예배하고 복(福)을 기원함으로써 하늘을 섬긴다고 한다. 이것에는 다른 이유는 없다. 우리가 말하는 '사천'(事天)의 천(天)이란 오로지 도리(道理)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사천'의 '천'은 오로지 형기(形氣)와 정욕(情慾)을 말하는 것이다. 양자(조선과 서양)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실로 여기에서 나누어지는 것이다.
『華西雅言』 卷12, 「洋禍(양화)」 ; 오바타 미치히로(小幡倫格),
「이항로의 대외관 : 서양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화서학논총』 6집 (2014), p. 94에서 재인용.
오늘날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 서양의 화(禍)를 잘 이해하고 있다면 선(善)한 편의 사람이다. 서양의 설(說)은 가지각색이라 하더라도 오직 무부무군(無父無君) 주된 근본이 되는 것이며 재화(財貨)를 통하고 남녀의 정욕으로 통하게 하는 방법이다.
『華西雅言』 卷12, 「異端(이단)」 ; 오바타 미치히로(小幡倫格),
「이항로의 대외관 : 서양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화서학논총』 6집 (2014), p. 95에서 재인용.
서양의 학문은 속이지 않고 죽음을 즐기는 것으로써 그들의 학문의 극치로 하고 재화(財貨)를 통하고 남녀의 정욕을 통하게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한다. 이것은 이적(夷狄, 오랑캐)조차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고 또한 이적조차도 그러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華西雅言』 卷10, 「尊中華(존중화)」 ; 박성순,
『조선후기 화서 이항로의 위정척사사상』 (서울 : 경인문화사, 2003), p. 227에서 재인용.
사이(四夷)와 팔만(八蠻)들이 중국을 사모하고 복종하여 화하를 모방하는 것은 또한 자연적인 변경할 수 없는 이치이다. 그러므로 그 문자와 언어 의복, 음식과 사용기구를 점차로 자기들의 옛 것을 개혁하여 새로운 중국 것으로 변화시켜 갔는데, 애석하게도 서영은 지역의 거리가 동떨어지게 멀어 중국과의 상통함이 가장 늦게 되어 불행하게도 요순문무의 성대한 시절의 예악과 문물이 빈빈(彬彬)하였던 것을 얻어 보지 못하였다. 풍문을 듣고 사모하기 시작한 것이 겨우 서진(西秦) 말엽이었는데 그때에는 이미 시와 서, 즉 서적을 불살라 버리고 살벌한 짓을 숭상하는 풍속이었으며, 공물을 가지고 와서 성의를 표시한 것이 겨우 명나라의 쇠퇴기였는데 그때에는 육상산과 왕양명의 이설이 길을 막아 정통적인 학문이 혼란을 당하던 시절이었다.
『송자대전』 권131, 잡저, 잡록.
성인(聖人)이 가르침을 설정하고 법을 세웠을 때 대개 도의(道義)에 어긋난 남녀 사이의 관계와 재화를 훔친 죄와 살인이나 상해(傷害)의 죄를 동죄(同罪)로 했다. 도의에 어긋난 남녀 사이의 관계와 재화 절도는 원래 사람이나 죽이거나 상처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화(禍)가 반드시 생명을 해치기에 이르러 사람이 없어져야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처단하는 데 목숨으로 죄를 갚는 무거운 규칙을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토벌(討伐)과 왕의 장정(章程)이 태양과 별처럼 밝게 빛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일 옛 성인이 혼인(婚姻)의 예를 제정하고 이것을 계승해서 남녀간의 분별의 가르침으로 삼거나 음탕한 행위를 물리침으로써 그 화를 막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오랫동안 부자(父子)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옛 성인이 사민(四民, 사농공상)이 살아가고 양육하기 위한 생업을 제정하고 그것을 계승해서 염치(廉恥)의 가르침으로 삼아 도적(盜賊)에 대한 규칙으로 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멸망한지 오래였을 것이다.
『華西雅言』 卷4, 「事父(사부)」
복희(伏羲), 황제(黃帝),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공자(孔子), 안자(顔子), 맹자(孟子), 주자(朱子), 송시열(宋時烈)의 계통을 이어받아 오상(五常)과 오륜(五倫)과 천지와 인물의 본체를 확립하게 되면 생사에 관한 것이라도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귀천에 관한 것이라도 그 의지를 바꿀 수 없다. 고금을 통해서 오륜오상이 미치는 데를 제한 할 수 없는 것이다.
박성순, 『조선후기 화서 이항로의 위정척사사상』 (서울 : 경인문화사, 2003), p. 227.
대개 리(理)는 기(氣)가 없으면 갈 수 없고, 기는 리가 없으면 나타나지 못한다. 다시말해 리기(理氣)가 있으면 그것은 함께 존재하고 없으면 둘 다 없는 것이니,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동(動), 정(靜), 류(流), 행(行) 사이에 있어서 리가 주(主)가 되는 것과 기가 주(主)가 되는 것의 구별이 있다. 리가 주가 되면 정리(正理)이자 순세(順勢)이며, 기가 주가 되면 리에 위반하고 역세(逆勢)가 된다. 이에 선악사정(善惡邪正)의 판별이 있는 것이다.
『華西雅言』 卷1, 「形而(형이)」 ; 오바타 미치히로(小幡倫格),
「이항로의 대외관 : 서양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화서학논총』 6집 (2014), p. 85에서 재인용.
리를 주체로 해서 그 기를 통솔하면 가는 곳마다 선(善)이 아닌 데가 없다. 그러나 기를 주체로 해서 그 리에 위반되면 가는 곳마다 이(利) 아닌 데가 없다. 한편 리와 기는 서로 떨어지지 못한다. 그래서 리를 주체로 해서 밝히고 양형하면 그 기질을 바꿀 수 잇다. 그러나 기를 주체로 해서 따라가 복돋우면 그 성정을 변동시킬 수 없다.
『華西雅言』 卷1, 「臨川(임천)」 ; 박성순,
『조선후기 화서 이항로의 위정척사사상』 (서울 : 경인문화사, 2003), p. 223에서 재인용.
리가 주체가 되고 기가 역군이 되면 만사가 다스려지고 천하가 안정될 것이지만, 기가 주체가 되고 리가 버금이 되면 만사가 어지럽고 천하가 위태로울 것이다.
『華西集』 卷25, 雜著(잡저), 「疑字解(의자해)」 ; 오바타 미치히로,
『연보와 평전』 제5호 (밀양 : 점필재연구소, 2010), p. 87에서 재인용.
예는 질서를 근원으로 한다. (···) 질서란 존비, 선후가 잘 조화를 이루어서 흐트러지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華西雅言』 卷1, 「形而(형이)」 ; 오바타 미치히로(小幡倫格),
「이항로의 대외관 : 서양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화서학논총』 6집 (2014), p. 86에서 재인용.
형이상(形而上)의 것을 도(道)라하고 형이하(形而下)의 것을 기(器)라고 하는데 '상'과 '하' 두 글자가 많은 의사를 함축한다. 모든 사물이 생기기 전의 상태를 말한다면 리(理)가 벌써 갖춰져 있으니 상과 하란 선(先)과 후(後)를 뜻한다. 모든 사물이 이제야 생기고 난 후의 상태로 말한다면 리는 기의 장수(將帥)가 되고 기는 리의 역부(役夫)가 되니 상과 하란 존(尊)과 비(卑)를 뜻한다. 모든 사물이 소멸한 후의 상태로 말한다면 기에는 성취와 파괴가 있고 리는 고금을 통해서 존재하니 상과 하란 존(存)과 망(亡)을 뜻한다.
Papers Relating to th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867-1871, 1870, pp. 362~363 (no. 225, Low to Fish, Peking, July 16, 1870) ; Ching Young Choe, The Rule of the Taewon gun : 1864-1873 : Restoration in Yi Korea (Cambridge, MA : Harvard East Asian Monographs, 1972). p. 123에서 재인용.
충청남도 예산군의 남원군 묘
조선은 물론 청에 매년 조공을 바친다. 그러나 내가 수집할 수 있는 정보에 의하면 조공은 정부 차원의 조공이라기 보다는 청과 교역할 수 있는 특권에 대한 대가로 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 청은 조선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고 있고 또 여하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고 있다.
Key-hiuk Kim, The Last Phase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 : Korea, Japan, and the Chinese Empire, 1860-1882 (Berkeley, Los Angeles, London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0), p. 56.
프레더릭 로우(Frederick F. Low, 1828~1894). 미국의 주중공사로 부임하기 전 미 연방 하원의원과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한계원(韓啓源)과 의주 부윤(義州府尹) 송희정(宋熙正)의 장계(狀啓)를 보니, 미국 사신(美國使臣)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중국 예부(中國禮部)의 자문(咨文)과 그 나라의 봉함(封函)을 함께 올려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중국이 사전에 자문을 보낸 데 대해서 회답을 하지 않을 수 없으나, 미국의 신함(信函)이라는 것은 한번 회답하면 왕복하는 것이 될 것이니 사체(事體)로 볼 때 결코 논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말을 만들어 자문을 지어 베이징에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국 사신의 서신을 보내온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 예부에 회답한 자문의 대략에, "미국 사신이 보낸 서신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순전히 병인년(1866)에 그 나라의 상선(商船) 2척(隻)이 우리나라의 경내에 들어왔다가 1척은 풍랑을 만났다가 구원되었으나 1척은 사람도 죽고 화물도 없어졌는데, 이처럼 서로 판이하게 하나는 구원되고 하나는 피해를 당한 까닭을 알 수 없으니 그 원인을 알고 싶으며, 뒷날 그 나라의 상선이 혹시 우리나라 영해에서 조난당할 경우 원칙에 입각하여 구해주고 화목하게 서로 대우하자는 등의 말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있는데 조난당하여 와서 정박하는 다른 나라의 여객선의 경우에는 혹 양식을 원조하고 필수품을 대준 뒤에 순풍을 기다려 돌려보내기도 하고, 혹 배가 파손되어 완전치 못하면 육로로 호송하여 각각 그들의 소원대로 해 주고 아울러 지장이 없게 해 주었습니다.
미국 조난민들을 구원하여 호송한 일을 말하면 함풍(咸豊) 5년, 동치(同治) 4년과 5년을 전후하여 세 차례에 걸쳐 호송하여 보내었는데, 이 일은 오랜 일도 아닌 만큼 그 나라의 사람들도 직접 보았거나 들었을 것입니다. 먼 나라의 사람들이 풍랑을 헤치며 어렵고 위험한 고비에서 헤매는 것에 대해서는 응당 불쌍히 여기며 돌보아 주어야 할 것인데 어찌 잔인하게 굴며 해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경내에서 피해를 입어 사람들이 죽고 물건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병인년 가을쯤에 평양(平壤)의 강에서 있었던 일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동치 5년 8월 22일에 보낸 이자(移咨)에서 자세히 전부 진술하였으므로 이제 다시 말할 것이 없습니다. 이번에 미국 사신의 편지에서 한 척은 구원되고 한 척은 해를 입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들의 이른바 '돌봐 주어야 할 처지로 볼 때 상인과 선원들은 그렇게 심하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나라에서 마음껏 멸시하고 학대하였다.'고 한 것은 실로 사해(四海)의 모든 나라들이 똑같이 그렇게 여길 것입니다. 그 나라가 남의 멸시를 받고 싶지 않은 것이나 본국(本國)이 남의 멸시를 받고 싶지 않은 것이나 처지를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실로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평양의 강에서 배가 사라진 것으로 말하면 변론을 기다릴 것 없이 그 까닭을 똑똑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 상선이 만약 우리나라 사람을 멸시하고 학대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어찌 남에게 먼저 손을 대려고 하였겠습니까?
이번에 온 편지에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자고 희망하였는데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로서 호의를 가지고 서로 관계를 맺자면 접대해서 보내는 도리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들이 의논해서 판명하고 교섭하자고 하는데 의논하여 판명할 것이 무슨 일이고 교섭하자는 것은 어떤 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조난 당한 객선이 있으면 돌보아 주고 호송해 보내는 문제는 의논하여 판명하지 않아도 의심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장합니다. 혹시 호의를 품지 않고 와서 함부로 멸시하고 학대한다면 방어하고 소멸해버릴 것이니 미국 관리와 통역들은 그저 저희 백성들이니 통제하고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인데 교섭여부에 대해서야 다시 더 논할 여지가 있습니까?
종전에 다른 나라들이 조선의 풍토와 물산을 알지 못하고 매번 통상 문제를 가지고 여러 차례 교섭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며 외국 장사치들도 이득을 볼 것이 없을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이미 동치 5년의 공문에서 진술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바닷가의 한구석에 있는 작은 나라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입니다. 백성들은 가난하고 물산은 변변치 못하며 금은(金銀) · 주옥(珠玉)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것이고 미속(米粟)과 포백(布帛)은 넉넉했던 적이 없으니,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국내의 소비도 감당할 수 없는데 만약 다시 다른 나라와 유통하여 나라 안을 고갈시킨다면 이 조그마한 강토는 틀림없이 위기에 빠져 보존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나라의 풍속이 검박하고 기술이 조잡하여 한 가지 물건도 다른 나라와 교역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절대로 교역할 수 없음이 이와 같고 외국 장사치들이 이득 볼 것이 없음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매번 통상할 의사를 가지는 것은 대체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똑똑히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번 미국 사신의 편지에서 아직 문제를 끄집어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관리들과 의논하여 판명하고 교섭하자고 요청한 것도 혹시 이러한 일들을 하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난 당한 객선은 전례에 따라 구호할 것이니 다시 번거롭게 의논할 필요가 없으며 기타 문제도 따로 토의하여 판명할 것이 없으니 오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러한 내용으로 그 나라 사신을 잘 타일러서 의혹을 풀어줌으로써 각각 편안하고 무시하게 지내게 한다면 더 없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Ching Young Choe, The Rule of the Taewon gun : 1864-1873 :
Restoration in Yi Korea (Cambridge, MA : Harvard East Asian Monographs, 1972). p. 126~127.
존 로저스(John Rodgers, 1812~1882) 제독
회답을 올립니다. 어제 영업선에서 편지를 받아보니,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여기에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이냐?"고 하였고, "여기로 온 경위를 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내용이었는데, 이미 이 문제들을 우리 흠차대인(欽差大人)과 제독대인(提督大人)에게 편지로 알렸고, 회답을 해주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배는 대아메리카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즉 대미국(大美國)의 배이며 여기에 온 것은 우리 흠차대인이 조선의 높은 관리와 협상할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약을 체결하려면 아직도 날짜가 필요하므로 우리 배는 이 바다 한 지역에서 정박하고 있으면서 조약이 체결되기를 기다렸다가 돌아가겠습니다. 배에 머물러 있는 두 대인은 다 잘 있습니다.
Ching Young Choe, The Rule of the Taewon gun : 1864-1873 :
Restoration in Yi Korea (Cambridge, MA : Harvard East Asian Monographs, 1972). p. 127~128.
신미양요 당시 미국함대의 기함인 콜로라도호 선상의 미군 장교들과 로저스 제독. 오른쪽에서 두 번째.
대원군이 진무사(鎭撫使)를 시켜 양선(洋船)에 편지를 보내기를, "올 봄에 베이징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을 보내어 귀국 사신의 편지를 전해왔기에 우리 조정에서는 이미 의논하고 회답 자문을 보낸 동시에 귀 대인에게 전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생각건대 귀국은 예의를 숭상하는 풍속이 본래 이름난 나라로 다른 나라들보다 뛰어 났습니다. 귀 대인은 아마도 사리에 밝아서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을 터인데, 이번에 어찌하여 멀리 바다를 건너와서 남의 나라에 깊이 들어왔습니까? 설사 서로 살해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지만 누구인들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요새지에 갑자기 외선(外船)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모든 나라의 일반적 규범으로써 처지를 바꾸어놓고 보아도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귀선(貴船)이 바닷가 요새지를 거슬러 올라와서 피차간에 대포를 쏘며 서로 경계하는 조치까지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미 호의로 대하자고 말하고서도 한바탕 이런 사단이 있게 되었으니 매우 개탄할 노릇입니다. 귀선이 오고부터 연해의 관리들과 무관들에게 절대로 사단을 일으켜 사이가 나빠지게 하지 말라고 경계하여 타일렀습니다. 그렇지만 귀선이 다른 나라의 규례를 아랑곳하지 않고 요새지 어구까지 깊이 들어온 이상 변경을 방비하는 신하들로 말하면 그 임무가 방어인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일에 대해 괴이하게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혹시 베이징 예부에서 우리의 회답 자문을 미처 전하지 못하여 귀 대인이 우리나라의 제반 사정을 잘 알지 못하여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이제 회답 자문 부본을 보내니 한번 보게 되면 남김없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외국과 서로 교통(交通)하지 않는 것은 바로 500년 동안 조종(祖宗)이 지켜온 확고한 법으로서 천하가 다 아는 바이며, 청나라 황제도 옛 법을 파괴할 수는 없다는 데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귀국 사신이 협상하려고 하는 문제로 말하면 어떤 일이나 어떤 문제이거나를 막론하고 애초에 협상할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높은 관리와 서로 만날 것을 기다리겠습니까? 넓은 천지에서 만방의 생명이 그 안에서 살면서 다 제대로 자기의 생활을 이루어가니 동방이나 서양은 각기 자기의 정치를 잘하고 자기의 백성들을 안정시켜 화목하게 살아가며 서로 침략하고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니, 이것은 바로 천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혹시 그렇지 못해서 위로 하늘을 노하게 한다면 더없이 상서롭지 못할 것입니다. 귀 대인이 어찌 이 이치를 모르겠습니까? 풍파만리에 고생하였으리라 생각하면서 변변치 못한 물품으로 여행의 음식물로 쓰도록 도와주는 것은 주인의 예절이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Key-hiuk Kim, The Last Phase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 : Korea, Japan, and the Chinese Empire, 1860-1882 (Berkeley, Los Angeles, London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0), p. 59.
해밀턴 피시(Hamilton Fish, 1808~1893) 국무장관. 그랜트 대통령 행정부에서 1869~1877 국무장관을 역임. 뉴욕의 주지사 및 상원의원도 역임하였다.
이제 문제는 어느 것이 과연 안전하고 현명한 대응방법인가 입니다. 조선사람들은 최근 일시적인 후퇴가 '오랑캐'들을 격퇴한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 만일 함대가 지금 물러선다면 조선이나 중국인에게 아주 잘못된 인상을 남길 것이며 이는 미국이 조선이나 중국을 대하는 데 있어서 아주 불리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조선은 자신들이 서양의 어떤 나라도, 심지어는 서양의 모든 나라의 연합군도 격퇴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이 강하다고 굳게 믿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중국에도 영향을 미쳐서 중국 사람들 중에서 외세와 외국인들을 모두 중국으로부터 몰아내야 한다는 자들의 영향력을 키워줄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제독이 지금까지 우리의 국기가 당한 부당한 대우와 모욕을 응징하지 않고 물러서는 것을 제안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저는 현재 우리 함대로는 조선을 항복시킬 수 있는 공격작전을 하거나 조선 정부로 하여금 제대로 된 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고종실록』 고종 8년(1871) 4월 17일(병자) 4번째 기사.
대아메리카합중국 찬리(贊理) 흠차(欽差)인 영어, 한어 문건을 맡아보는 총판두(總辦杜)는 (이름은 덕수(德綏), 중국인이다) 회답합니다. 며칠 전에 군주가 파견한 우리나라 관리에게 보내온 공문과 대청(大淸)나라 예부(禮部)에 회답한 자문 부본에 대해 다 같이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提憲)에게 전하였으며 명령을 받들어 이렇게 회답합니다. 당신들에게서 온 편지에서 언급한 내용에 의하면 귀 조정이 우리나라 군주가 파견한 관리와 그가 와서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의를 가지고 협상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이 매우 안타까워하는 문제입니다. 까닭 없이 공격한 문제에 대해서는 잘못을 책망하지 않고 도리어 비호하면서 변경을 책임진 신하의 직책으로서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제헌은 원래 포를 쏜 행위는 군사와 백성들의 망동에서 생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귀 조정에서 이것을 알고 꼭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모든 사람이 바라는 대로 높은 관리를 파견하여 협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행동하지 않고 기일을 늦추어가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만일 귀 조정에서 3, 4일 내에 만나서 협상할 의사가 없이 기한이 되기만 기다린다면 전적으로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이 처리하는 대로 할 것입니다. 기일이 매우 촉박하므로 대략 이와 같이 적습니다. 보내준 많은 진귀한 물건들을 받고 은혜와 사랑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무엇이라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보내온 예물을 돌려보냅니다. 이와 같이 회답합니다.
Ching Young Choe, The Rule of the Taewon gun : 1864-1873 :
Restoration in Yi Korea (Cambridge, MA : Harvard East Asian Monographs, 1972). p. 131.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
미군이 탈취하여 콜로라도호에 실은 이재연 장군의 장군기
진강(進講)을 마쳤다. 하교하기를, "양이(洋夷)들이 우리의 영역을 침범한 것은 매우 통분할 노릇이다."하였다. 우의정(右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이 오랑캐들은 원래 사나운 만큼 그 수효는 그다지 마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세는 미칠 듯 날뛰며 계속 불리한 형편에 처한 보고만 오니 더욱 통분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 오랑캐들이 화친하려고 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천 년 동안 예의의 나라로 이름난 우리가 어찌 금수 같은 놈들과 화친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몇 해 동안 서로 버티더라도 단연 기절하고야 말 것이다. 만일 화친하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나라를 팔아먹은 율(律)을 시행하라."히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우리나라가 예의의 나라라는 데 대해서는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일종의 불순한 기운이 온 세상에 해독을 끼치고 있으나, 오직 우리나라만이 유독 순결성을 보존하는 것은 바로 예의를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병인년(1866) 이후로부터 서양놈들을 배척한 것은 온 세상에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지금 이 오랑캐들이 이처럼 침범하고 있지만 화친에 대해서는 절대로 논의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억지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나라가 어찌 하루인들 나라 구실을 하며, 사람이 어찌 하루인들 사람 구실을 하겠습니까? 이번에 성상의 하교가 엄정한 만큼 먼저 정벌하는 위엄을 보이면 모든 사람들이 다 타고난 떳떳한 의리를 가지고 있는 이상 불순한 것을 배척하는 전하의 큰 의리에 대해 누군들 우러러 받들지 않겠습니까? 또한 저 적들이 이 소리를 듣는다면 간담이 서늘해질 것입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오늘 경연(經筵)에서 한 이야기를 조지(朝紙)에 낼 것이다."하였다. 이때에 종로(鐘路) 거리와 각 도회지(都會地)에 척화비를 세웠다. 그 비문에, '오랑캐들이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Paper Relating to th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867-1871, 1871, p. 129 (no. 35, Low to Fish, June 20, 1871). Ching Young Choe, The Rule of the Taewon gun : 1864-1873 : Restoration in Yi Korea (Cambridge, MA : Harvard East Asian Monographs, 1972). p. 133에서 재인용.
우리가 이번에 보여준 실력 행사는 어떤 정권이라도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부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지난 10일과 11일의 전투는 영국과 프랑스가 1858년 베이허강(北河, 북하) 어귀의 다쿠진지(大沽口炮台, 대고구포대)를 공격하고 점령함으로써 중국 정부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텐진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그 전투보다도 훨씬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 모든 나라와 맞서겠다는 이 정부의 태도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졌다는 아무런 증거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제7장
위정척사파와 흥선대원군의 대립
노전 마을 젊은 여인의 통곡 소리 그칠 줄 모르네 [蘆田少婦哭聲長]
현문(縣門)을 향해 울부짖다 하늘 보고 호소하길 [哭向縣門號穹蒼]
싸움터 간 지아비가 못 돌아오는 수는 있어도 [夫征不復尙可有]
예부터 남절양(男絶陽)은 들어 보지 못했구나 [自古未聞男絶陽]
시아버지 죽어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舅喪已縞兒未澡]
삼대(三代)의 이름이 군적에 모두 다 실렸으니 [三代名簽在軍保]
가서 억울함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 [薄言往愬虎守閽]
이정(里正)은 호통하며 마구간 소 끌고 갔네 [里正咆哮牛去皁]
칼을 잡아 방에 드니 자리에는 피가 가득 [磨刀入房血滿席]
스스로 탄식하길 자식을 낳은 것이 화로구나 [自恨生兒遭窘厄]
무슨 죄가 있어서 잠실음형(蠶室淫刑) 당했다고 [蠶室淫刑豈有辜]
민(閩) 땅 아이[囝]들이 거세한 것 그도 역시 슬픈 일인데 [閩囝去勢良亦慽]
자식 낳고 또 낳음은 하늘이 정한 이치거늘 [生生之理天所予]
하늘땅 어울려서 아들 되고 딸 되는 것이지 [乾道成男坤道女]
말 · 돼지 거세함도 그 또한 서럽거늘 [騸馬豶豕猶云悲]
하물며 뒤를 잇는 사람에게 있어서랴 [況乃生民恩繼序]
부호들은 한평생 풍류나 즐기면서 [豪家終歲奏管弦]
낟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는데 [粒米寸帛無所捐]
똑같은 백성 두고 왜 이다지 차별일까 [均吾赤子何厚薄]
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鳲鳩篇)을 외워 보네 [客窓重誦鳲鳩篇]
-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1803년(계해년) 가을에 유배지인 강진에서 지은 시
- 『여유당전서』 제1집 제4권, 시집, 시, 「애절양」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603&tabId=01&levelId=hm_109_0020
1800년에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승하하면서 조선의 체제 모순은 더욱 깊어간다. 신유박해를 일으켰던 정순왕후가 1803년 수렴청정을 거두고 당시 12세였던 순조(純祖, 재위 1800~1834)의 장인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 섭정(攝政)을 하면서 30년 안동 김씨의 시대가 열린다. 김조순이 시파(時派)였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없었으나, 안동 김씨 일족이 모든 정부 요직을 독점하고 중앙과 지방의 인사에 대한 전횡을 일삼으면서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다. 소위 '삼정의 문란'이었다. 여기에 19세기에 이르면 조선의 산림은 황폐화하면서 농업 생산성과 실질임금이 급락하는 반면 이자율이 급등하고 있었다.
-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부, 2013), p. 382.
저의 나이는 지금 16세로,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고 의지할 만한 족친(族親)이 없고, 또 집안에 생활해 나갈 만한 재산이 없으며, 다만 늙은 아버지가 있는데 모습이 마음이 아플 지경입니다. 급기야 연이은 흉년을 당하여 이리저리 동서로 떠돌며 구걸하여 음식을 얻어서 늙은 아버지의 거의 죽어가는 목숨을 가까스로 보전했습니다. 그런데 올 봄의 흉황(凶荒)은 더욱 심하여 곧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요즈음은 이따금 슬프게도 부황(浮黃)이 나는 고할 데 없는 목숨이니, 부녀가 함께 길거리에서 굶어 죽은 귀신이 될 것입니다. 저의 자매(自賣)로 아버지를 구하는 것만 같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의 집에 (저를) 팔기를 청하고자 했는데, 그 사람이 또 (제가) 배신할 것이라고 의심하였습니다. 제가 늙은 아버지를 보양(保養)할 길이 없어, 이에 슬프고 불쌍한 깊은 사정을 사또께 읍소하니 통촉하신 후 몸을 팔아 구활(苟活)하라는 뜻으로 입지(立旨)를 작성해주셔서 저의 한 몸이 아버지의 아사(餓死)를 좌시하지 않도록 적선하는 처분을 내려주십시오.
- 1837년 3월 남지동(경상남도 창원시 추정)에 사는 유득열이라는 사람의 16살 난 딸이 고을 사또에게 올린 민원
- 한국고문서학회, 『조선시대 생활사 4 - 조선의 일상, 법정에 서다』 (고양 : 역사비평사, 2013). p. 221.
들으니, 심히 불쌍하다. 구활은 바로 음덕(陰德)이고, 자매(自賣) 또한 전례가 있으니, 이는 의심하여 염려할 만한 일이 아니다. 이 제음(題音, 판결문)을 가지고 증빙하는 것이 마땅하다.
- 사또의 허락
- 한국고문서학회, 『조선시대 생활사 4 - 조선의 일상, 법정에 서다』 (고양 : 역사비평사, 2013). p. 221.
이 명문하는 일은 제가 이번에 큰 흉년을 당해 춘궁(春窮)이 심하여 부모를 살릴 길이 전혀 없으므로 만부득이 저를 전문(錢文) 13냥으로 쳐서 수대로 받아 부모를 살리고, 저를 위 사람에게 법률에 의하여 후소생(後所生)과 함께 관의 입지에 따라 영영 자매하니, 뒤에 친족들이나 자손 중에 만약 잡담하는 이가 있거든 이 문서를 가지고 관에 고하여 변정(辨正)할 일입니다.
- 위 유득열의 딸이 1837년 2월 26일(도광 17년, 정유년, 헌종 3년), 자신을 사고자 흥정하고 있는 조광득이라는 사람에게 써준 '확인증'
- 한국고문서학회, 『조선시대 생활사 4 - 조선의 일상, 법정에 서다』 (고양 : 역사비평사, 2013). p. 225.
헌종
철종
조선의 토지조사는 원래 20년에 한 번 실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높은 비용과 행정력 부재, 그리고 지주층의 방해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1600~1604년, 1627~1634년에 삼남 지방에서만 부분적인 토지조사를 실시하였고, 전국적인 조사는 1663~1669년, 1718~1720년, 1820년, 1898~1904년에 이루어졌다. 1769년 조사에서는 1백31만 결로 조사되었지만 '실결'(實結), 즉 실제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는 80만 결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 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 61.
토지조사를 실시한다 해도 지주들 소유의 땅을 조사에서 대거 누락시키는 등 기득권 층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홍수나 가뭄 같은 자연재해 때 정부가 세금을 감면해주어도 그 혜택은 고스란히 지방관이나 향리들과 결탁한 지주들에게 돌아갔다. 탐관오리들과 결탁한 지주 땅의 소출(所出)은 세금 감면 대상이 되는 반면,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은 양민들의 땅에서는 계속 세금을 징수했다. 19세기 전반기에는 가뭄이나 홍수가 날 때마다 평균 7만 결의 농토가 자연재해 명목으로 세금 징수 대상에서 면제되었다.
- 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 61.
그러나 한 번 세금 감면 혜택을 받은 토지들은 자연재해가 지나가도 다시 징수 대상으로 등록되지 않았다. 토지의 크기를 측량하는 기본 단위인 '결'도 비리와 수탈의 도구로 전락한다. 한 '결'은 원래는 토지의 절대적인 면적보다 토질에 따라 결정되었다. 생산성에 따라 생산성이 낮은 토지는 같은 결이지만 면적이 넓었고 생산성이 높은 토지는 면적이 작았다.
- 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 62.
조세 기반이 무너지자 조선 정부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서 하층민들에게 신분과 관직을 팔기 시작한다.
- Susan Shin, "The Social Structure of Kumhwa County in the Late Seventeenth Century," Occasional Papers on Korea, no. 1 (April 1974 ; reprint of June 1972 ed.), pp. 9~35, pp. 11~15)
조선 정부가 토지 소유의 변화와 경작지 증감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세수는 지속적으로 준다. 결과는 정부 재정 악화와 백성들의 수난이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삼남 지방 일부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빈농(貧濃)이 전체의 40~70%에 이르렀다. 빈농층이 소유한 토지는 전체 농지의 10~20%에 불과했고 개인이 소유한 땅은 평균 1/4결도 안되었다. 반면 전체 인구의 10% 내외에 불과한 부농층이 소유한 토지는 전체의 4-50%에 달했다.
- 김용섭, 『조선후기 농업사연구1 : 농촌경제, 사회변동』 (서울 : 일조각, 1970), p. 186.
토지제도 및 조세제도의 총체적인 문란으로 경제 기반이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조가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왕과 관료제가 대표하는 중앙 집권적 정치체제와 양반과 재지지주가 대표하는 봉건적 세습 귀족 사회 간의 세력균형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양반은 토지소유권, 관직에 나아갈 수 잇는 권리 외에도 많은 특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특권과 지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주자성리학이라는 사상적, 이념적 기제도 소유하고 있었다. 왕과 양반은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이기도 했다. 때로는 왕권이 강화되기도 하였고 때로는 세력균형이 양반으로 기울기도 하였지만 균형이 깨진 적은 없었다. 양반들은 '출사'(出仕)하여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권력을 유지하였고 이들의 '충성'은 왕권의 지속을 가능케 했다. 왕권과 양반 세력 간의 권력 균형은 조선이 왕권이 중국의 황제처럼 강화되는 것도 막았고 반대로 중세 서양의 봉건 시대나 일본의 막부 시대와 같이 왕권이 유명무실해지는 것도 막았다.
- 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 5.
사대부와 왕실의 절묘한 균형 때문에 조선의 중앙정부는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이 약했다. 조선의 조정은 명의 선례를 따라 지방의 가장 작은 행정 단위까지 직접 통치하려고 하지 않았고 향촌의 자율성과 문화적 특성 등을 인정하고자 하였다.
- 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 14.
따라서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관료의 숫자도 최소한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19세기 중반에도 조선 관료의 전체 숫자는 330명에 불과했다.
- 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 12.
뿐만 아니라 고을의 수령들은 자주 자리를 옮겨야 했고 자신의 고향에는 부임할 수 없었다. 그러나 330명의 관료가 1천만이 넘는 인구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잠시 수령으로 머무는 고을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 고을의 명망 있는 사대부와 선비는 물론 향리, 아전들의 협조를 받아야만 햇다. 특히 향리들은 조선의 가장 기초적인 행정 단위를 운영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은 중앙정부의 관료가 아니었다. 중앙정부의 녹을 먹지 않는 이들은 알아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뇌물과 부정부패가 구조화, 만성화될 수밖에 없었다.
- 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 13.
중앙정부의 최고위직을 독차지한 사대부들은 왕의 힘을 제어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효율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하는 데는 실패한다. 최고 통치 기구인 의정부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간의 권한과 역할 분담이 불분명한 협의체에 불과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란 영의정도 왕을 대신해서 과감한 정책을 추진하거나 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신껏 나라를 이끌 수 있는 힘은 없었다. 의정부뿐만 아니라 정부의 모든 정책은 30~50명쯤 되는 당상관, 또는 '대신'들이 협의를 협의를 통해서 결정되었다.
- 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 14.
여기에 1575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면서 시작된 당파 싸움으로 사대부 계층은 사분오열하면서 내부 결속력마저 상실한다. 당쟁(黨爭)은 사대부들이 왕권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았고 효율적인 통치를 불가능하게 했다. 반면 양반계급의 일치단결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사대부들이 왕권을 완전히 잠식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 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 16.
가장 손쉬운 방법은 돈을 찍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주자성리학의 영향으로 화폐 발행을 죄악시하였다. 돈은 상업을 부추겨 사치를 조장하고 청빈의 정신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국가 재정이 바닥난 상황에서 대원군은 화폐 발행을 강행한다. 이미 통용되고 있던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더 발행하여 유통시키는 것만으로는 재정을 충당할 수 없음을 안 대원군은 소위 '당백전'(當百錢)을 유통시킨다. 당백전은 상평통보의 백 배 가치를 갖는 동전이었다. 스러나 당백전의 액면가는 기존 상평통보의 백 배였던 반면, 소전의 가치는 5~6배에 불과했다.
- 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 171~172.
상평통보 앞면
상평통보 뒷면
당백전 발행은 1867년 6월 16일까지 계속됐다. 정부는 당백전을 무기 정비, 각 도의 병영 운영비, 지방 관아 지원, 환곡 자금 조달, 선박 건조와 다리 건설 등에 사용하였다.
- 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 172.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재정도 조달해야 했던 대원군은 모든 백성들에게 토지세와 인두세(人頭稅)를 당백전으로 거둔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물가가 5~6배 폭등하였고 상평통보는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대원군은 당백전 발행과 유통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된다.
- 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 173.
당백전
당백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원군은 청전(淸錢)을 대량으로 수입해서 유통시킨다. 청전이란 말 그대로 청나라의 동전이었다. 1867년부터 이미 상당량의 청전이 유통되고 있었으나 대원군은 1868년부터 청전을 대량으로 수입하여 유통시킨다. 청전의 소전의 가치는 상평통보의 반밖에 안됐지만 같은 액면가로 유통되었다. 더구나 중국에서 직접 청전을 사면 조선에서 사는 것의 3분의 1 가격이었기 때문에 청전을 수입하여 유통시키면 막대한 차익을 챙길 수 있었다. 1874년 조선에서 유통된 청전은 3~4백만 냥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반면 당시 유통되던 상평통보는 약 1천만 냥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 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 173.
토목 공사를 중지하고, 백성들에게 마구 거두어들이는 정사를 금하고, 사치 부리는 습관을 없애고, 궁실도 낮게 짓고 음식도 검박하게 차리며 옷도 검박하게 입도록 하고, 백성들을 위한 일에 모든 힘을 다하기를 하우(夏禹)가 한 것처럼 하며,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덕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기를 고요(皐陶)와 맹자(孟子)의 가르침 같이 하소서. 믿음과 신용이 널리 미치게 한다면, 백성들의 생활은 크게 펴지고 여러 사람들은 모두 흡족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다음에라야 양적(洋賊)들을 몰아낼 수 있고 나라를 보위할 수 있습니다.
- 이항로, 「척사소」 (1866년)
- 『고종실록』 고종 3년(1866) 10월 8일(계사) 1번째 기사.
첫째는 토목 공사를 중지하는 일입니다. 나라 임금의 급선무는 덕업(德業)에 있고 공사를 일으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초가집과 흙 섬돌은 요(堯)임금이 위대하게 된 것이고, 낮은 궁실(宮室)에 변변치 못한 의복은 우(禹)임금이 흠잡을 수 없게 된 이유입니다. (···)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말을 깊이 생각하시고 아직 시작하지 않은 공사를 한결같이 모두 정지시킴으로써 백성들의 수고를 덜어주소서. 둘째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는 정사를 그만두는 것입니다. (···) 현재 대내(大內)가 완공되어 이어(移御)하신 것이 얼마 전이었는데도 원납전(願納錢)의 징수를 정파(停罷)하지 못한다면 장차 어느 때에 가서야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셋째는 당백전을 혁파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경비가 부족한 것을 근심하시어 이렇게 의로운 발기를 한 것은 참으로 훌륭한 조치입니다. 그러나 시행한 지 2년 동안에 사 · 농 · 공 · 상이 모두 그 해를 입었는데, 그 피해가 되풀이되어 온갖 물건이 축나고 손상을 입었습니다. (···) 이제 옛날 돈이 통용되어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 넷째는 문세(門稅)를 받는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즉시 금지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이 없게 한다면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 최익현의 상소
- 『고종실록』 고종 5년(1868) 10월 10일(계축) 4번째 기사.
최익현은 1883년(순조 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현 내북면(현재 신북면) 가채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이었다. 면암은 그의 스승 이항로가 지어준 아호(雅號)다.
- 박민영, 『대한 선비의 표상 최익현』 (서울 : 역사공간, 2012) pp. 10~11.
가난한 선비였던 면암의 부친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여러 번 이사를 다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들의 공부를 챙긴다. 면암은 11세 때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한다. 23세인 1855년, 최익현은 과거에 급제한다. 27세 때인 1859년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 1860년에는 이조정랑, 1862년에는 신창현감, 1864년에는 성균관 전적과 예조좌랑, 1865에는 성균관직강, 1866년에는 사헌부지평에 임명된다.
- 박민영, 『대한 선비의 표상 최익현』 (서울 : 역사공간, 2012) pp. 23.
1866년 5월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3년상을 치른다. 모친상 중인 1868년 스승 이항로가 타계한다. 1868년 8월, 면암은 사헌부장령으로 임명된다.
- 박민영, 『대한 선비의 표상 최익현』 (서울 : 역사공간, 2012) pp. 30~31.
1910년의 경복궁. 광화문의 대문 앞쪽에 있는 해태상
최익현
놀라운 것은 최익현의 상소에 대한 고종의 반응이었다. 고종은 "네 가지 조항으로 진달하여 권면9勸免)한 것은 실로 나라를 사랑하고 임금을 걱정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매우 가상하다. 그러나 토목 역사는 형편상 그만둘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문세를 거두는 것은 옛날에도 그런 예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라고만 답한다.
- 『고종실록』 고종 5년(1868) 10월 10일(계축) 4번째 기사.
신들은 모두 능력도 없는 사람들로서 함부로 중임을 차지한 지 어느덧 일 년이 지났습니다. 그 직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죄를 논하면, 남들이 말하지 않아도 신들이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전 승지 최익현의 상소를 보니, 대신과 육경이 건의하는 바가 없다는 것을 가장 먼저 논하면서 나라를 위하여 우려하며 탄식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신들이 받아 허물로 삼아야 할 것이니, 감히 그 책임을 사절할 수가 없습니다.
- 좌의정 강로(姜㳣, 1809~1887)와 우의정 한계원(韓啓源, 1814~1882)의 공동 상소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0월 26일(신축) 4번째 기사.
그러나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가 "실로 충심에서 나온 것"이라며 "잘 이해하도록 하라"고만 한다. 다음날에는 영돈녕부사 홍순목(洪淳穆, 1816~1884)이 "부디 신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처벌해 주소서" 하자 역시 "경이 잘 이해하라"면서 거절한다. 같은 날 대사헌 홍종운, 대사간 박흥수, 사간 오경리, 장령 김복성, 김동식, 지평 이인규, 정언 심동헌, 도승지 정기회, 좌승지 이계로, 우승지 이현익, 좌부승지 윤자승, 우부승지 정운귀 등이 자신들을 처벌해 달라는 상소를 올린다.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0월 27일(임인) 17, 18번째 기사.
방금 최익현의 상소 원본이 내려온 것을 보니, 겉으로는 언사(言事)를 핑계대었으나 안으로는 실로 정직을 판 것으로, 대관과 소관을 들어 일망 타진하고 머리와 꼬리를 숨긴 채 몰래 흉계를 이루려 하였습니다. (···) 성상께서 즉위한 이래 구족(九族)을 돈독히 하여 백성을 현양(顯揚)하고 정도(正道)를 호위하여 사류(邪類)를 물리쳐 인륜이 위에서 밝고 소민(小民)이 아래에서 친하니, 곧 많은 사람들이 같이 본 바이자 같이 칭송하는 바입니다. 이에 대해 무슨 터럭만큼이라도 그럴 듯하게 비슷한 것이 있기에 그가 감히 이로써 이와 같이 어려워하지 않고 지적한단 말입니까. (···) 속히 의금부로 하여금 국청(鞠廳)을 설치하여 엄히 국문하여 기어코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소서.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0월 28일(계묘) 15번째 기사.
고종은 "그대의 상소를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라고 답한다. 전 정언 허원식도 최익현을 유배 보내라는 상소를 올리자 고종은 오히려 안기영과 허원식을 유배보낸다. 성균관 유생들도 최익현을 탄핵하는 집단 상소를 올린다.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0월 29일(갑진) 4번째 기사.
그러나 고종은 성균관 당상을 유배시키고 상소를 올린 유생들을 형문(刑問)한 뒤 유배 보낸다.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1월 2일(정미) 15번째 기사.
그자 이번에는 반대로 장령 홍시형이 최익현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린다. 만동묘와 서원을 복구하고 호포(戶布)와 원납전(願納錢), 호전(胡錢, 청전)을 폐지하고, 상벌을 분명히 하고 좋은 인재를 등용하라는 내용이지만 역시 대원군의 정책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0월 29일(갑진) 9번째 기사.
고종은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그대의 상소 내용은 구구절절이 모두 선한 말을 진달한 것이니, 매우 가상하다. 유념하도록 하겠다"라고 한 후 홍시형을 승진시켜 부수찬에 임명한다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0월 29일(갑진) 9번째 기사.
그리고는 서울 도성에 들어오는 문에서 받던 문세를 철폐하고 1866년 자신이 즉위한 이후 시행되기 시작한 각종 세금을 모두 철폐한다.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0월 29일(갑진) 9번째 기사.
지금 나라의 일들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말이 불순하여 고치지 않으면 끝이 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고 심한 것을 보면 황묘(皇廟)를 없애버리니 임금과 신하 사이의 윤리가 썩게 되었고, 서원을 혁파하니 스승과 생도들 간의 의리가 끊어졌고 귀신의 후사(後嗣)로 나가니, 부자간의 친함이 문란해졌고, 나라의 역적이 죄명을 벗으니 충신의 도리가 구분 없이 혼란되고, 호전(胡錢)을 사용하게 되자 중화(中華)와 오랑캐의 구별이 어지러워졌습니다. 이 몇 가지 조항들은 한 조각이 되어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윤리는 벌써 씻은 듯이 없어져 더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토목공사의 원납전 같은 것이 서로 안팎이 되어 백성들과 나라에 재앙을 끼치는 도구가 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선대 임금들의 전장을 변경하고 천하의 의리와 윤리가 썩은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에 신이 생각건대, 전하를 위하여 오늘날의 급선무에 대해 논한다면 만동묘를 복구하지 않아서는 안 되며, 중앙과 지방의 서원을 짓지 않아서는 안 되며,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것을 막지 않을 수 없으며, 죄명을 벗겨준 나라의 역적에 대해 추후하여 법조문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호전을 사용하는 것도 혁파하지 않을 수 없고, 토목공사의 원납전의 경우도 한 시각이나마 그냥 둘 수 없습니다.
- 최익현의 두 번째 상소
- 『고종실록』 고종 10년(1873) 11월 3일(무신) 2번째 기사.
이 성헌(成憲)을 변란시키는 몇 가지 문제는 실로 전하께서 어려서 아직 정사를 도맡아보지 않고 계시던 시기에 생긴 일이니, 모두 전하 자신이 초래시킨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일을 책임진 관리들이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 제멋대로 권세를 부린 결과 나라의 기강이 모두 해이되게 되었고 오늘날의 폐해를 초래케 하였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임금의 권한을 발휘하고 침식을 잊을 정도로 깊이 생각하고 부지런히 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속론과 사설에 이끌리지 말고 가까이 돌거나 권세 있는 관리들에게 속지 말며 기를 부리는 현상이 없게 하고 본래의 마음을 깨끗이 가지며 욕심을 깨끗이 다하여 하늘의 이치가 유행되게 할 것입니다. (···) 그리하여 자주 명령을 내려 조신(朝臣)들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의혹함이 없는 원칙을 세우고 덕을 수양하는 책임은 어진 스승에게 맡기고 관리들을 등용하고 물리치며 음양을 조화롭게 하는 책임은 정승들에게 맡기고 임금의 부족한 점을 도와주고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책임은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 맡길 것입니다. 임금을 위하여 토론도 하고 사고도 하며 임금을 바른말로 깨우쳐주는 책임은 유신들에게 맡기며, 군사를 훈련하고 선발하며 외적을 막는 일은 절도사(節度使)들에게 맡기고, 돈과 곡식의 출납과 군사비용에 대해서는 유사(有司)에게 맡기고, 효도가 있고 청렴한 사람을 뽑으며 선비들을 거두어들이는 일은 감사에게 맡길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지위에 있지 않고 다만 종친의 반열에 속하는 사람은 그 지위만 높여주고 후한 녹봉을 줄 것이며 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면서 『중용(中庸)』에서 아홉 가지 의리에 대한 교훈과 직분에서 벗어나 정사를 논하는 데 대한 『논어(論語)』의 경계(警戒)를 어기지 말고 잊지 말아 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도록 하소서.
- 최익현
- 『고종실록』 고종 10년(1873) 11월 3일(무신) 2번째 기사.
"어젯밤 연석(筵席)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 사항을 조지(朝紙)에 내도록 하교하였다. 그런데 병인년에 대왕대비께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그만둔 후 모든 정사를 내가 직접 맡게 되었는데 이제 옛일을 다시 꺼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러므로 대신들에게 문의하라고 한 명을 철회하고자 한다." 하니, 영돈녕부사 홍순목이 아뢰기를, "어제 연석에서 하교를 받고 신들은 감히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연설(筵說)에 대한 명을 듣고 저도 모르게 서로 쳐다보면서 황송해 하고 있을 즈음에 이러한 하교가 내렸는데 이것은 사체상 매우 지당합니다." 하고, 좌의정 강로가 아뢰기를, "어제 하교를 받고 신들은 너무 황공하여 미처 대답해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우의정 한계원이 아뢰기를, "어제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대왕대비께서 수렴청정을 그만두신 뒤 전하께서 모든 정사를 직접 보신 일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니 이제 와서 다시 알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이 하교를 받고 천만 우러르게 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들의 의견이 또한 이러하니 연석에서 한 그 말들을 반포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 고종과 영돈녕부사 홍순목, 좌의정 강로, 우의정 한계원과 대화
- 『고종실록』 고종 10년(1873) 11월 5일(경술) 2번째 기사.
이 공초(供招)를 보건대, 당초 상소의 내용은 시골의 무식한 사람이 분수(分數)에 대해 전혀 모른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국청을 설치한 것은 일의 체모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자 중론을 따른 것이었다. 달리 다시 물을 만한 단서가 없으니 특별히 살리기 좋아하는 덕으로 제주목(濟州牧)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도록 하라.
- 고종, 최익현을 제주로 귀양 보내면서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1월 9일(갑인) 3번째 기사.
그러자 최익현을 국문하지 않고 그냥 귀양만 보내는 것은 불가하다는 건의가 끊이지 않는다. 전한 홍만식, 부응교 이만도, 교리 이재순 · 장원상, 부교리 민영목 · 이수만, 수찬 홍건식, 부수찬 조우희 등이 연명으로,
- 『고종실록』 고종 10년(1873) 11월 9일(갑인) 14번째 기사.
판의금부사 김세균,지의금부사 박규수 · 심승택, 동지의금부사 황종현 등도 연명으로,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1월 10일(을묘) 19번째 기사.
대사헌 서당보, 대사간 윤자승, 헌납 박호양이 연명으로 최익현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기에 앞서 국문할 것을 주청(奏請)한다.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1월 9일(갑인) 15번째 기사.
고종은 이를 모두 "최익현은 시골의 어리석고 몰지각한 자에 지나지 않는다"라면서 물리친다.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1월 9일(갑인) 14번째 기사.
그나 대신들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동부승지 박제관, 가주서 이정래, 기주관 김현묵, 별겸춘추 서정순, 영돈녕부사 홍순목, 좌의정 강노, 우의정 한계원, 판의금부사 김세균, 지의금부사 박규수와 심승택, 동지의금부사 황종현 등이 함께 입시하여 고종을 다그친다. 『승정원일기』가 기록하고 있는 이날의 대화는 고종과 대신들 간의 논쟁의 열기를 가감 없이 전하고 있다.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1월 9일(갑인) 18번째 기사.
홍순목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와 같이 분부하시니, 신들은 너무도 황송하여 물러 나가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무슨 말인가?" 하자, 강노가 아뢰기를, "신들은 국옥을 살피고 있는데 법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그 직임을 제대로 할 수 없으면 떠나라.'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차 어디로 가겠다는 것인가? 나는 그 가는 곳을 알고자 한다." 하자, 강노가 아뢰기를, "신들은 성밖에서 대죄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이런 도리가 있단 말인가. 나를 버리고 어디를 가려 하는 것인가. 대관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는가. 실례(失禮)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1월 9일(갑인) 18번째 기사.
홍순목. 홍영식의 아버지로 갑신정변 후 자결한다.
나는 국청에 참여하는 대신들의 일에 대해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최익현의 일로 그동안의 하교에서 이미 나의 뜻을 다 말하였고 또 자성의 하교가 내려져 있는데도 대의리(大義理)라 간주하여 무단히 성을 나갔으니, 만약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하였겠는가. 대관(大官)이라 하여 관대히 용서할 수 없다. 영돈녕부사 홍순목, 좌의정 강노, 우의정 한계원에게 모두 파직의 법전을 시행하라.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1월 11일(병진) 8번째 기사.
고종은 왕위에 오른 후 조선 역대 왕들과 마찬가지로 경연을 통해서 왕사들로부터 끊임없이 주자성리학적 왕도 정치에 대한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 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 200.
대도(大道)가 시행되는 시대에는 천하를 만인의 공유물로 생각하고, 덕과 재능이 있는 자를 선출하여 정치를 맡겨 신의를 강구하고 화목을 닦도록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어버이만을 어버이로 친애하지 않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친애하지 아니하며, 사회의 노인들로 하여금 편안히 여생을 마칠 수 있게 하고, 젊은이로 하여금 충분히 자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고, 어린이로 하여금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게 하며,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외로운 늙은이 나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모두 부양될 수 있도록 한다. 남자는 각각 일정한 직분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가서 가정을 꾸린다. 재화는 그것이 땅바닥에 함부로 버려지는 것을 방치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한 사람의 수중에 들도록 해서도 안된다. 힘이 자신에게서 발휘되기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자신만을 위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음모는 닫혀서 일어나지 않고, 절도와 난적은 생겨나지 않는다. 그래서 대문을 닫아 걸지 않고 안심하고 생활하니, 이것을 대동(大同)의 세계라 한다."
- 『禮記(예기)』, 「禮運(예운)」.
훌륭한 임금은 백성의 생업을 설정하여 주나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섬길 수 있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부양할 수 있게 하여, 풍년에는 종신토록 배부르게 먹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케 하였으니, 그런 뒤에 힘써서 착한 일을 하게 함으로 백성들이 좇아 오기가 쉬운 것입니다.
- 『孟子(맹자)』, 「梁惠王章句(양혜왕장구)」 上(상).
유교의 치자(治者)들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원칙을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구호 차원이 아니라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통치의 원칙으로 받아들였다. 주자(朱子, 주희, 1130~1200)에서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3), 다산 정약용에 이르기까지 농사의 문제는 모든 선비들의 문제요,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들은 비록 지주들이었지만 농민들의 문제요,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들은 비록 지주들이었지만 농민들의 안위가 곧 자신의 안위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 "그들은 서양의 지주들처럼 입으로는 전원적인 삶의 아름다움과 우직한 농민들의 자연친화적이고 지혜로운 삶을 칭송하면서도 본인들은 도시에 살면서 상업과 산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국제문제에 관심을 쏟는 이중성을 보이지 않았다." Mary C. Wright, The Last Stand of Chinese Conservatism : The T'ung-Chib Restoration, 1862-1874 (New York : Atheneum, 1966), p. 4.
따라서 왕도 정치의 경제 정책은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일종의 '자유방임' 정책이었다. 윤리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는 국가가 철저히 개입하면서 백성들을 교화해야 했지만, 경제에 있어서는 '최소국가론'을 견지하였다. 공자가 "다스릴 나라를 가진 자, 다스릴 집안을 가진 자(집안어른)는 (백성이나 식구가) 적음을 근심하지 않고 서로 고르지 못함을 근심하며, 가난함을 근심하지 않고 서로 편안치 못함을 근심한다고 한다"라고 한 이유다.
- 이한우, 「계씨」, 『논어로 논어를 풀다』 (서울 : 해냄, 2012), p. 1164.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병력을 유지하는 일, 나라를 경영하는 데 필요한 관료를 두기 위해 세금을 걷는 일, 치수 관개 사업, 왕이 거처할 궁궐을 짓는 일 등 국가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일은 해야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필요악이었을 뿐 왕도 정치가 지향하는 목표는 결코 아니었다.
- Benjamin Schwartz, In Search of Wealth & Power : Yen Fu and the West (Cambridge, MA :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64), p. 10.
왕이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서, 또는 사치와 향락을 위해서 호화로운 궁궐을 짓는 것은 마치 탐관오리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Benjamin Schwartz, In Search of Wealth & Power : Yen Fu and the West (Cambridge, MA :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64), p. 11.
왕도 정치가 추구한 것은 백성들이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경제 발전을 도모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 발전을 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경제 발전 자체가 왕도 정치가 추구하는 대동 사회 건설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 백성을 동원하는 것은 곧 백성을 착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설사 경제가 발전해서 백성들이 호화로운 삶을 살게 되더라도 백성들이 사치를 하게 되면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 Benjamin Schwartz, In Search of Wealth & Power : Yen Fu and the West (Cambridge, MA :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64), p. 11.
왕도 정치의 지배 계층인 문사(文士), 즉 '선비'들은 가정과 국가와 천하의 질서가 순환하는 자연의 순리를 따를 수 있도록 지도하는 사람들일 뿐, 이 질서를 강제로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혁신적인 것을 만들어내려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군자'를 이상으로 삼는 이들은 선동가도 아니고 정치적 조직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귀족도, 사제도, 부자도, 전문가도 아니었다. 수기치인을 통하여 도덕적, 학문적으로 타의 모범이 되는 인문주의자들일 뿐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경제 전문가도, 전략가도 아니었다.
- Mary C. Wright, The Last Stand of Chinese Conservatism : The T'ung-Chib Restoration, 1862-1874 (New York : Atheneum, 1966), p. 3.
왕도 정치의 반대는 법가의 '부국강병론'이었다. 유가 사상을 태동시킨 것이 중국의 춘추시대(B. C. 770~B. C. 403)였다면, 법가 사상의 시대적 배경은 전국시대(B. C. 403~B. C. 221)였다. 법가의 사상가들은 정치, 즉 '올바른 다스림' 자체를 이상으로 보지 않고 부국강병을 위한 도구, '술'(術)로 보았으며, 자신들을 정치의 기술자, 전문가(political expert)로 보았다. 유가에서는 국가를 윤리 도덕과 문명을 일으키고 지키는 도구로 본 반면, 법가는 국가를 권력의 도구로 간주하였다.
- Benjamin Schwartz, In Search of Wealth & Power : Yen Fu and the West (Cambridge, MA :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64), p. 12
명군이 부국강병을 달성하는 방법을 알면 곧 바라는 패왕의 소망을 이룰 수 있다. 근신하는 자세로 정사를 펴는 것이 바로 부국강병의 요체이다. 법률과 금령을 명확히 하고, 정책과 계책을 잘 살피면 된다.
- 한비자, 신동준 옮김, 『한비자』 권18, 제47장, 8설, 6졸 (학오재, 2015).
'나라에 비옥한 토지가 많이 있음에도 백성들의 식량이 부족한 것은 농기구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며, 산해의 자원이 풍부한데도 백성들의 재화가 부족한 것은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한 때문이다'
- 환관, 김한규, 이철호 옮김, 『염철론』 1권, 「본의」 (서울 : 소명출판, 2012).
이익을 숭상하고 의(義)를 경시하며 힘을 높이 여기고 공을 중시하면 영토를 확장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이는 물 때문에 병이 생긴 사람에게 물을 더 주어 그 병이 심해지는 것과 같은 것으로, 사람들은 그가 진을 위해 제업(帝業)의 길을 열었다는 것은 알지만, 그가 진을 망국의 길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 환관, 김한규, 이철호 옮김, 『염철론』 7권, 「비앙」
대원군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왕실이 다시금 나라의 주인이 되는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지만 막상 자신이 왕위에 앉힌 친아들 고종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유림의 본거지인 서원을 철폐하고 조선을 멸망한 명의 정신적인 속국으로 만드는 만동묘를 폐쇄한 것도 모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이면서까지 경복궁을 복원한 것도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모든 정책들은 왕도 정치의 이념적 세례를 받은 아들 고종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잘못된 것들이었다. 대원군이 불철주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을 밀어붙인 10년 동안 고종은 이 모든 정책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가르치는 주자성리학적 왕도 정치의 이념을 주입 받고 있었다.
- 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 274.
백전은 마침내 사사로이 주조하는 것이라 통행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호전의 사용은 한때의 임시방편에서 나온 조처이긴 해도 지금은 온갖 폐단이 거듭 생겨 물가가 폭등하여 서울이나 지방을 막론하고 호전을 한 푼이라도 손에 넣게 되면 그것이 남아 쌓이게 될까 두려워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다 물건으로 바꾸어 사들이고야 맙니다.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생각하는 바가 이와 같은데, 어찌 평정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즉시 혁파하도록 하여 민심을 진정시키소서.
- 이규형의 상소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11월 14일(기미) 17번째 기사.
청전(淸錢)을 당초에 통용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던 일이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돈이 친해지는 것이 하루 하루 더 심해져 지탱할 수가 없다고 한다. 백성들의 정상을 생각하면 비단옷과 쌀밥도 편치 못하니 즉시 변통하는 것 역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부터는 청전의 통용을 한결같이 혁파하고 묘당에서 삼현령(三縣鈴)으로 팔도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 하라.
- 고종, 청전의 유통을 금지하는 교지
- 『승정원일기』 고종 11년(1874) 1월 6일(경술) 4번째 기사.
청전을 혁파하고 상평전(常平錢)으로 2월부터 상납할 일로 막 하교를 받들어 팔도와 사도에 행회하였습니다. 당초에 통용하다가 지금에 이르러 변통한 것은 모두 백성들을 위한 성상의 뜻으로, 위를 덜어서 아래에 보태주는 정사를 그 누가 흠양하지 않겠습니까만, 경비가 군색해지는 것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외(京外)의 수용(需用)과 지방(支放)에 있어 별도로 방편을 도모하여 성상의 덕의(德意)를 선양하라고 호조와 선혜청 및 각 고문, 각 아문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의정부의 상소
- 『승정원일기』 고종 11년(1874) 1월 6일(경술) 22번째 기사.
상이 이르기를, "호조와 선혜청 및 각사, 각영에 가려서 둔 우리 돈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가?" 하자, 이유원이 아뢰기를, "호조에 800냥이 있다는 것을 신이 들어서 알고 잇으나 이밖의 것은 들어서 알지 못합니다." 하니, 김세균이 아뢰기를, "호조에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 상평전(常平錢)은 별도로 둔 것이 없습니다. 경복궁에 기와를 덮는 일은 지금 우선 정지하였으나 각 능원(陵園) 제관(祭官)의 여비 및 어보(御寶)를 수개하는 일과 자지(慈旨)로 문안패(問安牌)를 다시 만드는 일의 공장(工匠)에게 줄 인건비는 모두 지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 먼저 받아둔 지 조금 오래된 것 중 1만 1500냥을 빼내고 나니, 남은 상평전은 800여 냥에 불과하였습니다."
- 『승정원일기』 고종 11년 갑술(1874), 1월 13일(정사) 17번째 기사.
박규수가 아뢰기를, "관서의 환곡 폐단은 해가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크게 백성들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을축년 경에 도신(道臣) 홍우길(洪祐吉)이 크게 경장(更張)하여 한결같이 아울러 포흠(逋欠)을 탕척하고 환곡을 파하고 1결(結)마다 1냥씩을 배분하여 모작(耗作)으로 만들어 급대(給代)해 상납하게 하고, 1호(戶)마다 4두(斗)씩을 배분하여 영읍(營邑)의 지출에 쓰도록 하였는데, 성향(城餉)은 10만 석 이외에 더는 저축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곡부(穀簿)의 마감은 경사(京司)에서 구식(舊式)에 의하여 하였으니 비록 구법을 중히 여긴 것이라 하더라도 그 실제는 허위 문서입니다. 이번에 들여보내 열람하신 곡총(穀摠) 가운데는 과연 한 포대의 실곡(實穀)도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곡식이 있는 것으로 알았다."
- 『승정원일기』 고종 11년 갑술(1874), 1월 13일(정사) 17번째 기사.
상이 이르기를, "관서는 관북에 가까우니 상평전을 통행하는 방도가 도하(都下)보다 나을 듯하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비단 멀리 관서나 관북에 미쳐서만이 아니라 서울에서 가까운 교외만 하더라도 상평전을 현재 유통하고 있어 성 안보다는 낫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잘 절약하여 쓰면 경비가 충족될 것이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목하 경비는 한시가 위급하니, 즉시 행관(行關)해야 한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물러가 마땅히 행관하겠지만, 호조 역시 관문을 보내 신칙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서울에 있는 곤수와 수령을 즉시 내려보내고, 각기 그 고을의 상납 역시 독촉해야 한다."
- 『승정원일기』 고종 11년 갑술(1874), 1월 13일(정사) 17번째 기사.
상이 이르기를, "대신과 재부(財賦)의 신하는 연석에서 물러난 후, 각 사(各司)에 남아 있는 청전의 수효를 상세히 써서 들이라."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삼가 써서 들이겠습니다만, 3, 4백 만은 밑돌지 않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묘당에서 관서에 행회하여 즉시 거두어 보내게 하라. 목하의 사세가 매우 급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 『승정원일기』 고종 11년 갑술(1874), 1월 13일(정사) 17번째 기사.
상이 이르기를, "현재 상평전의 들어온 양이 100만이 되는데, 별단에 있는 청전 200만을 구처할 방도가 없어 민망스럽다. 나라에 쓸 경비가 없고 또 민간에서 거둘 수도 없으니, 환곡을 작전하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 『승정원일기』 고종 11년 갑술(1874), 1월 20일(갑자) 23번째 기사.
이유원이 아뢰기를, "전에도 국용이 어려울 때에는 이런 예가 많았는데, 지금은 곡부(穀簿)의 숫자가 많지 않아서 손을 댈 계책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환곡의 탕척(蕩滌)은 이정(釐正)한 후부터 있었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조의 경비가 매우 광대(廣大)하여 경복궁의 시역(始役)은 고사하고라도 시어소(時御所)도 수리할 곳이 많은데 참으로 도리가 없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나라에 3년의 저축이 있어도 오히려 방도가 없을 것인데, 눈 앞의 소용도 실로 계책이 없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호조에 상평전이 있어야 매사가 힘을 펼 수 있게 된다."
- 『승정원일기』 고종 11년 갑술(1874), 1월 20일(갑자) 23번째 기사.
당시 조정의 무지는 놀라웠다. 청전 문제를 논의하는 와중에 중국의 경우를 논하면서 고종이 "중국의 성(省) 하나가 과연 우리나라보다 더 큰 곳이 있는가?"라고 묻자 이유원은 "성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어서 비교해 논해서 대답할 수가 없는데, 지방(地方)이 광막하여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 『승정원일기』 고종 11년 갑술(1874), 1월 13일(정사) 17번째 기사.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하고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왕도 정치의 입장에서 볼 때 '경제 발전'은 그 자체가 패도 정치였다.
- Mary C. Wright, The Last Stand of Chinese Conservatism : The T'ung-Chib Restoration, 1862-1874 (New York : Atheneum, 1966), p. 3.
왕정치의 이상은 조선 특유의 약한 중앙 집권 체제를 낳았다.
- James B.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 5
태초부터 인류는 각각 자신만을 돌보았고,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천하에 공공의 이익이 잇어도 아무도 그것을 일으키지 못하였고, 천하에 공공의 해로움이 있어도 아무도 그것을 제거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한 인물이 나타나 자기 한 사람의 이익을 진정한 이익으로 여기지 않고 천하 사람들이 그 이익을 함께 향유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자기 한 사람의 손해를 진정한 손해로 여기지 않고 천하 사람들에게 그 손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노력하엿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이 부지런히 힘쓴 노고는 반드시 천하 사람들보다 천 갑절만 갑절이나 노력한 결과일 것이다.
그 누구보다 천 갑절 만 갑절의 수고로운 일을 행하였으면서도 막상 자신은 그 이익을 향유하지 못하니, 반드시 천하 사람들은 왕위(王位)에 앉아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옛날 임금의 지위에 오를 만한 자질이 있는 이들 가운데 임금의 자리를 버리고 오르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허유(許由), 요(堯)임금이 천하를 선양하려고 하자 기산(箕山) 아래로 도주하여 은거했다. 후대에 요임금이 다시 부렀으나 그는 나쁜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고 영천(潁川)이라는 물가에 가서 귀를 씻었다고 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와 무광(務光, 은나라 시대의 은사로 탕왕(湯王)이 천하를 물려주려하자 받아들이지 않고 큰 돌을 등에 지고 물 속에 가라앉아 자살했다고 한다), 『장자』 「대종사(大宗師)」, 『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이 그들이다. 그 자리에 올라 있으면서도 마침내 그 지위를 자연스럽게 내주고 떠난 사람들이 있었으니 요임금과 순임금이 그들이다. 처음에는 그 지위에 오르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임금이 된 뒤에 부득이 물리치지 못한 사람도 있었는데 우(禹)임금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어찌 옛날 사람이라고 오늘날 사람들과 차이가 있겠는가? 편안함을 좋아하고 수소고움을 싫어하는 것은 대개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런 후세로 올수록 군주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그들은 마치 천하의 이해관계에 얽힌 모든 권한이 모두 다 자기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천하의 이익은 모두 자신에게로 돌리고 천하의 손해는 모두 다른 사람에게 돌려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사적인 소유를 함부로 허락하지 않았고 제멋대로 자기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게 막았다. 또한 자신의 사적인 이익만을 크게 넓히는 것을 천하의 가장 큰 공(公)으로 여겼다.
군주도 처음에는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 그러다가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차츰 익숙해진다. 그리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독차지하였다. 천하를 자기가 차지할 막대한 재산으로만 여겨, 그 재산을 자기 자손에게 전해 영원 무궁토록 향유하려 하였다.
한나라 고조가 "내가 이루어 놓은 재물이 둘째 형과 비교할 때 누가 더 많을까?" 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이익만 추구하는 심정을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옛날에는 천하 사람들이 주인이었고 군주는 지나가는 나그네였다. 그러므로 군주가 세상을 마칠 때까지 천하를 일구고 보살핀 것은 한결같이 천하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군주가 주인이 되었고 천하 사람들은 오히려 나그네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천하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평안하고 평화스럽지 못한 원인은 모두 군주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 천하를 차지하지 못했을 때에는 천하 사람들을 마구 도륙하고 천하 사람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면서까지 자기 한 사람의 재산만을 넓힌다. 그리고는 일찍이 잇어 왔던 참담한 현실을 외면한 채 "나는 진실로 천하의 자손들을 위하여 창업하였노라"라고 말한다.
또한 천하를 얻은 뒤에는 천하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탄압을 자행하여 천하 사람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면서까지 자기 한 사람의 업적 엽색 행각과 쾌락에나 봉사토록 시키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 그리고는 "이것은 벌어들인 재물이다"고 한다.
그러므로 천하에 큰 피해를 입히는 자는 군주일 뿐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군주가 없더라도 사람들은 각기 개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것이고, 사람마다 각각 자신의 이익을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어찌 군주라는 자리를 둔 이유가 진실로 이와 같단 말인가?
- 황종희, 최병철 옮김,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서울 : 홍익출판사, 1999), pp. 54~57.
나라가 망하는 것(망국)이 있고 천하가 망하는 것(망천하)가 있다. 망국과 망천하를 어떻게 구분하는가? 말하자면 "나라의 주인을 바꾸고 연호를 바꾸는 것이 망국이다. 인의가 막히면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하고 끝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게 되니 이를 망천하라고 한다.
- 고염무, 윤대식 옮김, 『일지록』 (서울 : 지식을만드는지식, 2009), p. 103.
나라의 보존은 군주와 신하, 그리고 귀족들이 도모하는 것이지만, 천하의 보존에는 필부와 같이 비천한 자들도 더불어 책임이 있다.
- 고염무, 윤대식 옮김, 『일지록』 (서울 : 지식을만드는지식, 2009), p. 104.
군자가 지위에 오르면 도를 추구하고자 하고, 소인이 지위에 오른다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한다. 도를 추구하려는 자의 마음은 천하국가에 있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자의 마음은 백성과 사물을 해하는데 있다.
- 顧炎武(고염무), 『日知錄(일지록)』 卷12, 「言利之臣(언리지신)」, p. 21 : 君子得位 欲行其道 小人得位 欲济其私欲行道者心存于天下国家 欲济私者心存于伤人害物 진탁 옮김.
고대에 천자는 항상 기주에 살았고, 후대 사람들은 기주를 중국으로 불렀다. 「초사구가」에 보면 기주가 기록되어 있다. 「회남자」에 따르면, 여와씨가 흑룡을 죽이고 기주를 구했다고 전한다. 『노사』에서도 중국은 늘 기주였고, 『곡량전』에서는 정나라를 기주라 불렀다. 『정의』에서도 역시, 기주가 천하의 중심이며, 당 · 우 · 하 · 은 등 모든 나라의 수도였다고 한다. 또한 정나라가 왕기(왕이 있는 곳)와 가깝기 때문에 기주로 여겨졌다고 한다.
- 顧炎武(고염무), 『日知錄(일지록)』 卷2, 「惟彼陶唐有此冀方(유피도당유)」, p. 28 ; 古之天子常居冀州 後人因之 遂以冀州為中国之號 楚辭九歌覧冀州兮有餘 淮南子 女媧氏殺黑龍以濟冀州 路史云 中國總謂之冀州 穀梁傳曰桓五年 鄭同姓之國也 在乎冀州 正義曰 冀州者天下之中州 唐虞夏殷皆都焉 以鄭近王畿 故擧冀州以為說 진탁 옮김
천하는 이처럼 이미 정해진 것, 변치 않는 것이며 중국이 그것을 제대로 수호할 때 발현되고 중국이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 사라진다. 따라서 모든 왕조들은 국가 차원에 머물지 않고 천하가 되도록, 권력의 집합체가 아닌 문명 그 자체가 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반면, 만일 문명의 수호자로의 책임과 역할을 다 하지 못한다면 중국 사람들도 그저 다른 야만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 Joseph Levenson, Confucian China and Its Modern Fate : A Trilogy (Berkeley and Los Angeles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58, 1964, 1965), p. 103.
량치차오(梁啟超, 양계초, 1873~1929)는 중국이 더 이상 전통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국가로 다시 태어날 것을 주장한다. 문명의 수호자를 자처한 유학자들 때문에 중국인들은 중국을 '국가'로 생각하는 대신 '천하', 즉 세계 유일의 문명이라고 착각하여 외국으로부터 배우기를 거부한다고 비판한다. '천하'라는 관념 때문에 중국의 민족주의, 애국주의가 모두 파괴되었다고 주장한다. 만일 중국이 자신을 '천하'로 착각하는 것을 그치고 '국가'의 차원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국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 Joseph Levenson, Confucian China and Its Modern Fate : A Trilogy (Berkeley and Los Angeles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58, 1964, 1965), p. 104.
그래서 우리 백성은 항상 나라를 천하로 여겨 왔으며, 이목으로 접하는 것, 정신을 물들이는 것, 성인, 철인이 가르치는 것, 조상이 물려준 것,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자격이었고 집안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이었고 한 동네, 한 종족이 될 수 있는 자격이었으며, 천하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었고 한 동네, 한 종족이 될 수 있는 자격이었으며, 천하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었다. 그러나 유독 한 나라의 국민이 될 수 있는 자격은 없었다. 국민으로서의 자격이 이 몇 가지 것들보다 훨씬 우월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처럼 열국이 병립한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시대에 이 자격이 없으면 결코 천지 사이에 자립할 수 없다.
- 량치차오, 이혜경 주해, 『신민설』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p. 64.
량치차오
옌푸
모든 문명은 문명과 야만을 구별하는 고유의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을 버리는 순간 그 문명은 사라진다. 그러나 국가는 다르다. 국가는 어느 특정 문명의 기준을 따를 필요가 없다.
- Joseph Levenson, Confucian China and Its Modern Fate : A Trilogy (Berkeley and Los Angeles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58, 1964, 1965), p. 104.
안남(베트남), 조선과 같은 국가들은 가히 망할만하다. 이 나라들은 몇천 년 동안 우리에 부용(附庸 : 남의 힘에 기대어 따로 서지 못함)하였고, 우리가 기미(羈糜 : 구슬리고 통제함)한 국가들이다. 완전하게 독립된 언어, 문자, 예법, 도덕, 풍속이 없어 우리와 동일체가 될 수 없었을 뿐더러, 우리와 별개로 완성된 국가로 되지 못하다가, 일찍이 뜻밖의 침입을 당하게 되었다. 이 국가들이 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 梁啟超(량치차오), 『飮冰室文集(음빙실문집)』, 「大中華發刊詞(대중화발간사)」 33冊, p. 84 ; 國如安南朝鮮者 可亡也 彼其千余年來 僅為我附庸之邦羈糜之屬 無完全獨立之語言文字 禮敎習俗 旣不能與我同體 欲孵化 我一別體而未成 而猝早橫逆攫噬 亡其宜也 진탁 옮김.
민족이 민족일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공유하는 전통뿐이다. 한 민족과 국가가 같은 전통을 물려받은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다면 민족주의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민족주의들이 전통을 중시하는 이유는 전통이야말로 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기제이기 때문이다.
- Joseph Levenson, Confucian China and Its Modern Fate : A Trilogy (Berkeley and Los Angeles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58, 1964, 1965), p. 108.
민주의 지식인들에게 전통 사상은 더 이상 지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 보다는 서양의 과학기술과 사회과학, 인문학이 훨씬 더 매력적이고 보편타당한 지식 체계였다. 민족의 부강을 보장할 수 있는 것도 서구의 근대 문명이었다. 위정척사파들이 지키고자 했던 유교 문명은 '우리'를 '민족'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용한 기제였지만 현재와 미래의 민족과 국가의 중흥을 위해서는 아무런 역할을 해 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전통을 칭송하기도 하지만 필요할 때는 가차없이 '구습'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민족주의자들은 문화상대주의자들이다.
- Joseph Levenson, Confucian China and Its Modern Fate : A Trilogy (Berkeley and Los Angeles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58, 1964, 1965), p. 106.
전통이 중요한 것은 민족과 국가를 강하게 해주는 기제이기 때문이지 그 자체로 중요하거나 절대적이어서가 아니다. 민족주의자가 전통을 수호하고자 하는 것은 민족주의를 더 잘 하기 위한 도구로서 유용했기 때문이다.
- Joseph Levenson, Confucian China and Its Modern Fate : A Trilogy (Berkeley and Los Angeles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58, 1964, 1965), p. 108.
아무리 '정통'이라 하여도 그것이 민족과 국가를 허약하게 만들고 결국 외세에 나라를 빼앗긴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반면 민족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어떤 이념, 체제, 사상도 받아들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 Joseph Levenson, Confucian China and Its Modern Fate : A Trilogy (Berkeley and Los Angeles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58, 1964, 1965), p. 95.
'읽은 책들 > 2021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034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0) | 2021.11.29 |
---|---|
2021 - 014 독립정신 (0) | 2021.06.28 |
2021-003 깃발, 나부끼는 그리움 (0) | 2021.05.10 |
2021-002 노포에 머문 시간 (0) | 2021.05.10 |
2021-001 장에 가자 (0) | 2021.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