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㉘ 천재 전략가의 귀국

드무2 2021. 5. 30.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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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㉘ 천재 전략가의 귀국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유엔군 총사령관 직에서 해임된 뒤 일본 도쿄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1951년 4월 19일 미 의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민주와 자유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6·25전쟁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중앙포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벌이기 전에 적에게 ‘공간’을 내주는 대신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공간을 우회해 적의 후방을 사정없이 휘갈겼다. 개전 초기 영등포 전선을 시찰하는 그의 뇌리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상륙작전의 천재’ 맥아더, 원산에서는 결정적 패착

 

 

대구 북방에서 포항까지, 왜관에서 함안까지의 사각형 방어선을 설정한 ‘부산 교두보’의 구상도 결국 그의 작품이다. 그 대신 적의 보급선은 길게 늘어났다. 보급선이 길어지면 약점이 자연스럽게 노출된다.



인천상륙작전이 꼭 원활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김일성의 독촉으로 북한군은 모든 공격력을 낙동강에 퍼부었다. 따라서 아군의 반격이 쉽지 않았다. 낙동강에서 북으로 밀고 오는 반격이 받쳐 주지 않으면 인천상륙작전은 실패할 수도 있었다. 맥아더는 그 시점에서 군산(群山)상륙작전도 구상했다. 국군과 미군의 반격이 부진할 경우 군산을 통해 제2 상륙작전을 펼쳐 적의 공세를 꺾어 놓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육군 출신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남서태평양 사령관으로서 총 87회의 육·해·공 합동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6·25전쟁을 총지휘하면서 상륙작전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이는 뛰어난 천재 전략가가 허점을 드러내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는 국군과 미군·연합군이 반격을 시작해 북진을 거듭하고 있을 때 또 상륙작전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원산이 목표지점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착오가 빚어졌다. 미군은 남북으로 뻗은 낭림산맥(狼林山脈)을 중심으로 지휘권을 둘로 나눴다. 서쪽은 월튼 워커 장군이 지휘하는 미 8군, 동쪽은 상륙작전을 위해 에드워드 아몬드 소장이 지휘하는 미 10군단이 맡았다. 6·25전쟁의 결정적인 패착 가운데 하나였다.



동서로 나뉜 지휘권은 중공군의 거센 공세에 맞춰 일사불란한 반격을 불가능하게 했다. 예를 들면, 당시 인천항과 경부선 철로에서는 효율적인 병력과 보급물자의 이동이 이뤄질 수 없었다. 원산에 상륙시키기 위한 미 해병과 기타 병력이 인천항을 점유하고 있었고, 이들이 먼저 이동하는 바람에 경부선은 마비됐다. 부산에서 평안북도 운산과 함경도로 가는 물자와 병력 이동이 막히는 바람에 아군은 50년 11~12월 중공군의 공세에 직면하면서 후퇴하는 길밖에 없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맥아더는 당시 이미 70세의 고령이었다. 더구나 오랜 기간 미 본토에서 활동하지 않았고, 이미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계속 데리고 있었던 참모 그룹, 이른바 ‘필리핀 파벌’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50년 10월에 이미 얻었던 중공군 개입에 관한 정보를 과소평가했고, 뒤이은 중공군의 공세를 얕잡아본 데에는 그를 둘러싼 참모진의 나태와 사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를 미리 방지하지 못한 것은 맥아더의 큰 책임이다.

 

 

 

뉴욕의 환영행사에서 차에 탄 맥아더 장군이 미 1군기에 경례를 하자 오색 카드가 눈발처럼 쏟아지고 있다. [중앙포토]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는 워싱턴 정부와 불화를 빚고 있었다. 워싱턴은 이미 6·25전쟁을 확전으로 치닫지 않게 관리하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군인 맥아더의 생각은 달랐다.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그는 북진을 주장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그에 의지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맥아더 본인도 중국과의 전면전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핵 폭탄을 사용해서라도 압록강과 만주 사이에 방사막을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인이기에 앞서 민주주의와 자유의 철저한 옹호자였다. 공산주의와의 대결의식은 거기에서 비롯됐다.



워싱턴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쟁이 노 장군’을 해임했다. 그는 일본군이 우세를 보이던 진주만 습격 이후 태평양전선에서 미군이 계속 밀릴 때 호주에 있었다. 일본군에 대한 총반격을 구상하고 실천에 옮기려 할 때였다. 신문기자 앞에 선 그는 짧게 말했다. “나는 반드시 돌아간다(I shall return).” 침울한 패전 소식에 젖어 있던 미국 국민은 그런 그를 영웅으로 받아들였다. 과감한 상륙작전으로 태평양의 섬들을 하나씩 접수하면서 급기야 도쿄에 정박한 미주리 함상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던 장면까지 그는 줄곧 미국의 전쟁영웅이었다.



이제 그가 6·25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1·4 후퇴 때 빼앗겼던 서울을 되찾았을 때 그는 내가 있던 국군 1사단 사령부를 찾아와 내게 한국군의 궁핍한 사정을 듣고 산더미 같은 식품을 보내줬다. 우리 1사단만이 아니라 한국군 전체가 6개월 동안 특별 급식을 받을 만큼 엄청난 물량의 선물이었다. 그 호방한 사령관, 천재적인 전략가가 6·25전쟁에서 빠지는 게 나로서는 너무 아쉬웠다.



그의 바통은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 이어받았다. 리지웨이의 후임 미8군 사령관은 2군 사령관이던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이 맡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백전노장들이다. 그들이 보여준 전쟁지휘 스타일은 맥아더 장군과 같기도 했고, 다르기도 했다.


백선엽 장군

 

<계속>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㉘ 천재 전략가의 귀국

 

 

 

◆‘부산 교두보’ = 6 · 25전쟁 초기 국군과 미군이 구축한 낙동강 방어선을 일컫는 말이다. 미군은 방어선 전체를 ‘부산 교두보’로 호칭했지만, 국군은 여기다 ‘낙동강 방어선’ 등의 이름을 덧붙였다. X와 Y의 두 축선이 있다. 가장 남쪽으로 밀렸을 때의 X선은 함안~왜관의 남북 100여㎞, Y선은 왜관~포항의 동서 90여㎞ 전선이다. 1950년 8월 중순부터 인천상륙작전 직전까지 약 한 달에 걸쳐 북한군과 국군·미군·연합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미 8군 사령부가 일부러 획정한 것은 아니고, 북한군 공세에 따라 밀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형성됐다. 나중에 미 8군 지휘부는 이 선을 대한민국 방어의 마지노선으로 설정한 뒤 반격을 개시했다. 시점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50년 9월 1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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