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㉖ 38선 북방 방어 거점을 확보하라
1951년 3월 말 이제 38선을 넘어야 할 때다. 그러나 미국 워싱턴의 정가에 형성된 기류는 분명히 우리와는 달랐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뭔가 멈칫하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북진해서 적을 섬멸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은 그대로 북진을 밀어붙이고자 했지만 워싱턴과 다른 연합국은 38선으로 전선을 고착화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51년 3월, 38선 재돌파 앞두고 워싱턴은 멈칫했다
1951년 3월 27일 38선으로 전선이 일단 굳어지는 시점에 매슈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이 여주에서 소집한 회의에 참석했던 한·미 야전지휘관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앨런 미 8군 참모장, 브라이언 24사단장, 펠로 미 군사고문단장, 밀번 1군단장, 파머 1기병사단장, 스미스 해병1사단장, 콜터 8군 부사령관, 호그 9군단장, 유재흥 국군 3군단장, 브래들리 미 25사단장, 소울 3사단장, 장도영 국군 6사단장, 훼렌바우 미 7사단장, 신원미상의 미군 장교, 백선엽 국군 1사단장, 아몬드 미 10군단장, 리지웨이 사령관, 정일권 국군 참모총장, 김백일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은 이 회의 직후 전방으로 돌아가다 항공기 추락사고로 전사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3월 27일이었다. 매슈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이 여주의 사령부에 각 지휘관들을 오라고 했다. 나도 여주로 향했다. 여주의 넓은 모래사장에 대형 텐트 20여 개가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임시 8군 사령부였다.
리지웨이가 있는 막사로 들어섰다. 3월 말의 날씨는 아직 비교적 차가웠다. 막사 안에는 두 개의 난로가 있어서 초봄의 추위를 막아내고 있었다. 전시에 마련한 임시 사령부여서 탁자 같은 것은 없었다. 의자가 20여 개 놓여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급 지휘관들이 모두 모였다. 주로 미군이었다. 밀번 1군단장, 아몬드 10군단장 등 중서부 전선을 담당하는 모든 지휘관이 모였다. 한국군에서는 정일권 참모총장, 김백일 1군단장, 유재흥 3군단장, 장도영 6사단장, 그리고 내가 참석했다.
리지웨이는 엄숙한 분위기로 먼저 말을 꺼냈다. “여러분, 38선은 이제 더 이상 없다. 공세적인 방어로 거점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38선을 넘어서 최대한 북상해 방어가 유리한 거점을 먼저 차지해야 한다.” 그는 ‘캔자스 선(Kansas Line)’을 상기시켰다. 서쪽으로는 임진강에서 중부의 화천 저수지, 동쪽으로는 양양을 잇는 선이었다. 38선 이북으로 약 20㎞ 지점을 지나가는 아군의 작전통제선이다.
리지웨이의 작전 개념은 늘 명확했다. 그는 북진이냐, 아니냐의 명분 싸움은 접어두고 일단 38선 근처에서 전선이 고착화할 것에 대비해 이를 지킬 수 있는 방어 거점을 최대한 아군에 유리하도록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한편으로는 북진을 멈추겠다는 미국 정가의 결심을 충실히 따르는 모양새이기도 했다.
그에 따라 서부 전선에서는 옹진반도를 포기했다. 옹진반도는 서부 해안에 돌출한 지형이어서 탐을 낼 수는 있지만 방어 거점으로는 부적절했다. 지킬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이 없었다. 나는 회의를 마친 뒤 지프에 올랐다. 급히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때 누군가가 “사진 한 장 찍고 가야지”라고 말했다. 리지웨이 사령관을 필두로 지휘관들이 모두 카메라 앞에 서 있었다. 나도 얼른 뒷줄에 다가가 얼굴만 내밀었다. 도열한 지휘관의 왼쪽 끝(사진에선 오른쪽 끝)에 김백일 1군단장이 서 있었다. 그는 나와 함께 만주군의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에서 근무했고, 월남 길에 동행해 서울에 같이 온 사람이다. 나이는 세 살 많았지만 친구와 다름 없이 지내던 지기(知己)였다.
임진강의 1사단으로 돌아왔다. 앞 회에서 말한 대로 임진강 반도형 지형 돌출부에 대해 공격을 가하면서 중공군 포로를 대거 잡아들이는 데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때 비보가 날아들었다. 김백일 장군이 여주에서 회의를 마친 뒤 경비행기 편으로 강릉에 귀환하려다 악천후를 만나 대관령의 산중에 추락했다는 것이다. 김 장군의 시신은 5월이 돼서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도 지인(知人)의 타계 소식이 날아들 때면 늘 만감이 교차한다.
그는 전장에서 많은 목숨을 살린 의인(義人)이다. 50년 12월 연합군의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중공군의 벽에 부딪쳐 밀려 내려올 때 그는 동부전선에 있었다. 서부전선에는 육로가 열려 있어 피란민들이 걸어 내려오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동부전선은 육로가 거의 막혀 있었다.
오갈 데 없는 피란민 9만여 명이 몰렸던 곳이 흥남이었다. 미 10군단은 당초 이들을 배에 태우기를 꺼렸다. 그 가운데 스파이가 섞여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를 설득한 사람이 김백일 장군이었다. 그는 아몬드 10군단장과 담판했다. 결국 피란민을 배에 태우기로 했다. 대규모의 피란민을 부산까지 안전하게 싣고 온 드라마틱한 철수 작전의 주역은 바로 그였다. 중요한 전선을 사수하는 것 못지않은 공훈(功勳)을 세운 사람이다.
북진 때 그가 지휘하는 1군단 예하 3사단이 50년 10월 1일 국군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것도 자랑스러운 업적이다. 늘 활달하고 의기에 넘쳤던 김백일 장군. 힘겨운 전장에서 수많은 생령(生靈)을 보호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그 의로움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했던가. 김 장군의 아들 김동명(예비역 준장, 현 이북5도청 함경북도지사)도 부친의 뒤를 이어 육사에 들어가 국가 안보를 위해 젊음을 바쳤다.
백선엽 장군
<계속>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㉖ 38선 북방 방어 거점을 확보하라
◆흥남철수작전 = 1951년 12월 15~24일 국군 1군단과 미군 10군단의 병력 10만5000여 명과 피란민 9만8000여 명, 그리고 35만t의 군수물자를 선박편으로 함경남도 흥남 부두에서 부산 · 거제 등 남쪽으로 옮긴 작전이다. 193척의 선박이 동원됐다. 피란민 수송은 원래 작전계획에 없었지만 김백일 1군단장이 미군에 요청해 이뤄지게 됐다. 피란민들의 애절한 사연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로 시작하는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의 모티브가 됐다. 당시 작전에 참가했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만4000명의 피란민을 거제도로 데려다 주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이뤄냈다. 희생자는 한 명도 없었고, 모두 5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굳세어라 금순아
작곡 박시춘
작사 강사랑
노래 현 인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전쟁사 돋보기] 캔자스 라인
1950년 12월 월튼 워커 장군 후임으로 미 8군 사령관에 부임한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 1951년 3월 말 설정한 방어선이다. 서쪽으로는 임진강에서 시작해 강원도 화천을 지나 동쪽으론 양양까지 이어지는 선이다. 38선에서 약 20㎞ 북상한 지점을 잇고 있다. 리지웨이 장군은 전선이 38선에서 고착될 것에 대비해 캔자스 라인을 방어 거점 확보 지역으로 설정했다.
38선 20㎞ 북방에 설정한 임진강~화천~양양 방어선
리지웨이는 캔자스 라인보다 조금 북쪽에 와이오밍 라인도 설정했다. 이 방어선은 경기도 전곡과 연천에서 철원과 화천 저수지를 잇는 선이다. 적의 상황, 즉 적정(敵情)에 따라 설정했기 때문에 남북으로 일정한 간격은 없다. 아군의 공세가 캔자스 라인을 넘어 더 북방으로 올라가는 것을 제한하기 위한 선이다.
그해 3월 27일 경기도 여주의 미 8군 사령부에서 열린 한·미 일선 지휘관 회의에서 리지웨이는 “캔자스 라인을 중심으로 최대한 방어 거점을 확보하되 불가피할 경우 와이오밍 라인까지 진격할 수 있다. 그러나 와이오밍 라인을 넘는 경우 반드시 사령부에 먼저 보고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캔자스와 와이오밍이란 미국 주명(州名)을 붙인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단지 와이오밍이 캔자스보다 위도 상 북쪽에 있을 뿐이다.
[출처: 중앙일보] [전쟁사 돋보기] 캔자스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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