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㉙ 낙하산 공격부대 지휘관 리지웨이
매슈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오른쪽)이 1951년 2월 국군 1사단을 방문해 백선엽 사단장과 작전을 논의하고 있다. 리지웨이는 51년 서울을 다시 내준 1·4후퇴 뒤 강력한 작전을 구사해 중공군의 공세를 꺾으며 전선을 38선 이북으로 다시 밀어 올렸다. 그는 그해 4월 더글러스 맥아더의 후임으로 유엔군 총사령관이 됐다. [백선엽 장군 제공]
더글러스 맥아더는 대형 항공모함이다. 전체적으로 구사하는 전략·전술의 단위가 커서 그렇게 비유해 볼 수 있다. 그에 비하면 매슈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은 구축함급이다. 맥아더에 비해 여러 가지 면에서 작지만, 그 구축함은 그래도 상당히 정밀한 기능과 박력 있는 화력(火力)을 갖춘 함정이다.
리지웨이 “맥아더가 내 공을 가로채고 있다” 불만
자동차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월튼 워커 전임 미 8군 사령관의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1950년 12월 한국에 왔을 때의 일성(一聲)은 한국인으로서는 다소 거북한 내용이다. “인분(人糞) 냄새만이 진동하는 이 나라에 내가 왜 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그는 자신의 조국 미국에 대한 거의 무한정의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이다. 걸핏하면 ‘세계 최강의 미국’을 입에 올리기 일쑤였고, 기회가 닿으면 ‘세계 최고의 나라, 세계 최고의 인재’라는 말로 미국과 미국인을 칭송하기에 바빴다.
언뜻 보면 리지웨이는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남의 나라와 그 국민을 얕보는 듯한 인상이다. 실제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공정부대를 지휘했던 리지웨이는 군대에서 다져진 성격으로 볼 때 과감한 인파이터다. 그래서 공격적인 인상을 준다. 과감하면서 저돌적인 인상. 거대한 전쟁이었던 2차대전을 영웅적으로 이끈 장수답게 그는 늘 공격적이어서 남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역시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그는 자칫 무너질 뻔했던 1·4후퇴 당시의 아군 전선을 강력한 지휘력으로 아주 튼튼하게 묶은 뒤 빈틈이 없고, 때로는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전법을 구사해 중공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그는 ‘워싱턴 순응형’이다. 맥아더 장군이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면서 워싱턴을 오래 떠나 있다가 그곳 정가의 동향에 무관심하게 됐던 것과 달리, 리지웨이는 자국 정부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
38선에서 북진을 멈추고 전선을 고착화하려는 워싱턴의 결정에 리지웨이는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맥아더는 그 반대였다. 벌어진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를 해야 한다는 군인으로서의 자세가 더 강했다. 리지웨이는 그에 비해 워싱턴의 결정에 최대한 따르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리지웨이 역시 군인이었다. 38선을 고착화하되 적 저지선을 최대한 북상시키려는 뜻이 강했다. 그가 자주 말하는 ‘합법적인 (미국) 정부의 합법적인 명령’에 따르지만, 군인으로서 전쟁에서는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충실했다. 그래서 38선 북쪽으로 설정한 ‘캔자스 라인’(임진강-화천-양양)으로 방어에 유리한 거점을 먼저 차지하도록 아군에 명령한 것이다.
맥아더가 미 육사인 웨스트포인트의 교장을 지낼 때 리지웨이는 대위로서 체육 교관이었다. 맥아더가 장군이었을 때 리지웨이는 위관(尉官)에 불과했다. 군대식 서열로 따지자면 할아버지와 손자 격이었다. 그래도 리지웨이는 맥아더의 그림자에 숨어 있기를 싫어했다. 51년 1·4후퇴 이후 총 반격을 개시하면서 중공군을 북으로 밀어내고 있을 때 맥아더 장군이 수원 비행장에 내렸다. 연합군 격려 차원의 방문이었다. 그러나 리지웨이의 심기는 편치 않았다. 그는 나중에 회고록을 통해 “전쟁은 내가 치러서 성공적으로 반격을 하고 있는데, 맥아더 원수가 느닷없이 나타나 그 전공을 가로채는 느낌”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말하자면 일종의 시기심이자, 맥아더라는 큰 산맥을 타고 넘어야겠다는 리지웨이 특유의 도전적 태도였다. 그러나 맥아더가 나타나면 리지웨이는 사실 꼼짝도 못했다. 나이 많은 선생님 앞에 서 있는 얌전한 우등생 같았다.
미군이라고 왜 인간적인 갈등관계가 없을까. 서로 경쟁하고 다투고, 타협하는 모양새는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군인정신에 충실했다. 적 앞에 서면 결단코 승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들은 늘 절치부심했고, 대담하면서도 창의적인 작전 짜기에 골몰했다. 느닷없이 다가온 한국전쟁의 많은 전장에서 그들에게 배운 것들이 많다. 특히 적 앞에서 결코 움츠러들지 않는 용맹성, 거대한 난관(難關)이 앞에 닥쳤어도 전체적인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려는 우직함이었다. 맥아더의 후임으로 도쿄 유엔군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의 그 군인정신도 변함은 없었다. 그러나 맥아더와 같은 큰 배포가 없었던 점은 늘 마음에 걸렸다.
백선엽 장군
<계속>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㉙ 낙하산 공격부대 지휘관 리지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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