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㉚ 한국 이해하려 힘쓴 밴플리트
현대그룹을 창설한 고(故) 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내게 들려준 일화다. 그가 감격스러운 첫 방북을 마치고 난 뒤였다. 강원도 통천에 있는 고향을 다녀왔던 정 회장은 헤어졌던 누나와 해후했다. 누나가 그를 만나자 대뜸 “주영아, 우리는 장군님 덕분에 잘 먹고 잘살고 있다”고 하더란다. 그러나 아무도 참견하지 않는 밤이 되자 그 누나가 슬그머니 오더란다. “주영아, 사실은 배고파 죽겠어….” 늘그막에 만난 누이의 처량한 호소에 정 회장의 감회가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작전대로였다면, 휴전선은 금강산 이북에 그어졌다
정 회장이 찾았던 고향 통천군에는 고저(庫底)라는 곳이 있다. 그가 자랐던 고향이자, 남북이 분단되면서 역시 부모형제가 헤어지는 큰 슬픔을 간직한 땅이다. 금강산 바로 옆이다. 전쟁 중에 우리는 이곳으로 진격하려고 했다. 매슈 리지웨이 후임으로 미 8군을 지휘하게 된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의 의지였다. 그는 직전까지 거센 공세를 퍼붓던 중공군에게 강력하고 치명적인 보복 공격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맥아더는 앞에서도 비유했지만 대형 항모급 지휘관이다. 리지웨이는 구축함, 밴플리트는 그런 식으로 볼 때 순양함(巡洋艦)급이다. 항모보다는 작지만, 구축함보다는 작전 범위와 갖춘 화력의 크기가 한 수 위인 전투함이다.
그는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1951년 4월 말에 작전명령을 내렸다. 철원에서 미 9군단, 문등리와 사태리 쪽에서 미 10군단, 속초에서 국군 1군단을 북상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말하자면 금강산 일대를 대한민국의 품으로 끌어 오는 것이었다. 상륙작전도 계획에 포함시켰다. 미 16군단을 동원해 고저의 해안 쪽으로 상륙시킨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밴플리트의 구상대로 실천했다면 당시의 전력 상황으로 볼 때 성공은 거의 확실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명령이 내려진 지 10일 뒤였다. 따지고 보면 전선의 고착화를 서두르고 있던 워싱턴의 입맛에 강력한 충돌이 불가피한 금강산 점령 계획이 맞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일선의 반대자는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 자리에 오른 ‘구축함급’ 지휘자 리지웨이였다. 그는 강력한 사슬 작전으로 중공군의 침공을 막아내고 적들을 38선 북방으로 구축(驅逐)한 일등 공신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정치적인 판단에 더 치중한 군인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나중에 8군 사령관에서 물러난 뒤 한국을 방문한 밴플리트 장군이 내게 고저 작전을 언급하면서 “그때 리지웨이가 중간에서 반대했어”라면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밴플리트는 그런 점에서 리지웨이와는 달랐다. 자신이 당면하고 있던 적, 중공군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가하기 위해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는 사람이었다. 아울러 다른 어느 미군 지휘관에 비해 한국인의 마음과 정신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이 머물던 미 8군사령부의 단골손님이었다. 서울 동숭동 옛 서울대 문리대 자리에 있었던 사령부에서 밴플리트는 이 대통령 내외를 극진히 대접했다. 대통령 내외가 195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령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밴플리트 장군(오른쪽), 백선엽 장군(왼쪽)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그가 머물렀던 8군 사령부는 지금의 서울 대학로, 옛 서울대 문리대 건물이었다. 밴플리트는 서울대 총장 집무실을 사무실로 썼다. 그는 한 달에 평균 2~3번의 주말에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를 ‘모시고’ 식사를 했다. 80세에 가까운 이승만 대통령은 밴플리트 사령관만 만나면 즐거워했다. 식사 자리에서 밴플리트의 친절한 서비스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밴플리트는 칠면조나 햄, 스테이크가 메뉴로 나오면 얼른 나이프와 포크를 잡고 직접 썰었다. 그러고는 대통령 내외의 접시에 친절히 담아 앞으로 내놓았다. 아버지를 모시는 아들 같았다. 미국에서 오래 생활했지만 이 대통령은 엄격한 유교적 윤리에 젖어 있던 분이다. 그런 이 대통령은 나이가 한참 아래인 밴플리트 사령관의 그런 공손함과 예의 바름을 좋아했다. 얼굴 가득 따뜻한 웃음이 피어오르고는 했다. 이 대통령의 환한 얼굴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나 전장에서의 밴플리트는 전혀 달랐다. 부하를 다루는 기본적인 태도는 화합형이지만, 전장에서의 실수나 나태에 대해서는 가혹했다. 나중에 적겠지만, 한국군도 그의 냉혹함에 크게 당황한 적이 있다. 그래도 그는 늘 사람과의 교감에 충실한 편이었다.
그에게는 6·25전쟁 중에 닥친 커다란 슬픔이 있다.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한 아들 제임스 밴플리트 2세가 52년 4월의 폭격 작전에서 행방불명이 됐다. B-26 폭격기를 타고 전북 군산의 옥구 비행장에서 발진, 북한 지역으로 넘어가 야간 폭격을 한 뒤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날인 4월 5일, 국군 2군단의 재창설식이 있었다. 식에 참석한 밴플리트 사령관은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내색하지 않았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아비로서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그래도 그는 평소의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맥아더와 리지웨이, 밴플리트는 6·25전쟁에서 큰 축을 담당했던 미군 지휘관들이다. 모두 명장(名將)임에 분명하다. 이들을 빼놓고서는 한국전쟁을 이야기할 수 없다. 사라지는 맥아더를 계기로 리지웨이와 밴플리트에 대한 인상기를 간단히 소개했다. 이제 다시 전쟁 이야기다.
51년 4월 11일 국군 1군단장 진급신고를 하기 위해 부산 임시 경무대를 방문했던 나는 신성모 국방장관과 김활란 당시 공보장관이 베푸는 만찬에 참석했다. 저녁 어스름에 식당을 나선 나는 지프에 올라 오랫동안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수 없었던 가족을 찾아갔다. 전쟁이 발발한 지 10개월. 꿈속에서 그리던 아내와 어린 딸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백선엽 장군
<계속>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㉚ 한국 이해하려 힘쓴 밴플리트
◆고저(庫底) = 강원도 통천군에 속한 옛 행정구역 이름이다. 조선시대 조정에서 관리하는 큰 창고가 있던 지역의 남쪽 지역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상(上)고저리, 하(下)고저리로 나뉘어 불렸다. 행정적으로는 원래 읍이 있던 곳이어서 고저읍으로 불렸다. 광복 후 고저면으로 있다가 1952년 북한이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이름이 사라졌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인 총석정(叢石亭)이 있어 유명하다. 고저가 속한 통천(通川)은 예부터 교통의 요지여서 ‘통할 통(通)’자를 사용했다. 동해안을 끼고 원산으로 북상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다. 원래 이름은 통주(通州). 그 이전에는 총석정과 함께 유명한 금란굴이 있어서 금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대그룹을 세운 고 정주영 회장의 고향은 통천군 송전리(松田里)다. 동해안 바닷가에 많이 자라는 해송(海松)이 널려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고저를 차지하면 금강산 전 지역을 장악할 수 있고 북으로는 원산에 닿을 수 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다.
'6 · 25전쟁 60년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㉛ 전쟁통의 가족 (0) | 2021.05.30 |
---|---|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㉙ 낙하산 공격부대 지휘관 리지웨이 (0) | 2021.05.30 |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㉘ 천재 전략가의 귀국 (0) | 2021.05.30 |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㉗ 떠나는 한국전의 별, 맥아더 (0) | 2021.05.30 |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㉖ 38선 북방 방어 거점을 확보하라 (0) | 2021.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