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여행 ㅡ 수원역에서 화성행궁까지] 01
수원역
재단법인 선학원 팔달사
팔달사 (八達寺)는 수원시 팔달구 행궁로 68번길 (팔달로 3가 116)에 위치한 재단법인 선학원 (禪學院) 소속의 사찰이다.
1895년 (고종 32) 홍범 (윤홍자) 비구니 스님이 토지를 매입하여 초가집 2동에 '팔달암' 이란 간판을 달고 기도해 오다, 1930년 12월 27일 (庚午年 오시) 용화전 법당 상량 후 산신각 1동을 건립하여 150평의 작은 암자로 초기에는 조동종 (曹洞宗)에 속해 있었다. 팔달암이 선학원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선학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경허 (鏡虛), 만공 (滿空, 1871 ~ 1946) 스님의 잦은 왕래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서울에 위치한 선학원에 출입하는 민족주의자들이 고등계 형사들의 사찰 (査察)을 피해 이곳 팔달암으로 숨어들어 연락책, 자금책의 역할을 담당하여 회합을 갖기도 했으며, 이후 1940년 6월 20일 팔달사 초대 창건주 이채순 (平等月) 보살이 재단법인 선학원에 토지와 건물을 증여하면서 선학원 소속의 사찰인 팔달선원 (八達禪院)이 되었다.
◈ 범행 스님 행적
1950년 범행 스님이 계룡산 토굴에서 수행할 때 6 · 25전쟁이 난 것을 훗날 알고 부모님이 걱정되어 고향에 가 보니 인민군이 동민 60명의 손을 묶고 처형하러 가는 것을 보고 인민군 장교를 만나 이 사람들은 남의 집 농사만 짓고 가난하게 사는 불쌍한 사람들이니 내가 신분 보장하겠다고 하자 동네 유지들도 함께 동조하여 죽음 직전에 다 풀려난 것이다. 스님 집은 대지주였으며, 그때 창고에서 쌀을 나누어 주었다 합니다.
1954년 대한불교조계종 정화운동할 때 초대 봉은사 주지 겸 경기도 교무국장할 당시 각종 송사 문제를 종단 승소로 이끌자 종단에서 스님의 능력을 인정 조계사 주지와 총무원 주요직을 여러 차례 겸임해 오늘날에 조계종단 정화에 기여한 분이다.
1952년 범행 (梵行, 1921 ~ 2012) 스님이 팔달선원의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연차적으로 인근 1,350평의 땅을 매입하여 사찰 경내를 넓히고 건물을 지으면서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 범행스님이 봉은사, 조계사, 동화사, 수덕사 본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불국사 주지로 부임해 복원불사를 이룬 뒤, 1984년에 다시 팔달사의 주지로 오면서 새롭게 중창하여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9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팔달사는 도심 한복판에 위치하지만 주변에 팔달산이 있어 한적한 교외사찰 같은 특징이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양쪽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고 경사지에 사찰이 들어 서 있어 높은 계단형 축대를 기준으로 상단에는 대웅전과 원당, 명부전, 종각, 영각이 위치해 있고, 하단에는 용화전과 6동의 요사채 건물이 있다.
범행 (梵行) 스님은 1948년 금산 대둔산 태고사에서 출가하여, 1952년 팔달암에서 금오 (金烏)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팔달선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찰은 대처승이 주지였으나, 수원에서 유일하게 팔달암은 비구승인 범행 스님이 주지로 취임한 것이었다. 한국정쟁 (6 · 25전쟁) 중 이곳 팔달암이 북한 (개성) 피난민들의 피난처로 한동안 만남의 장이 되자 1952년 범행 스님은 이곳에서 피난민들을 위로하며 도심 포교의 의지를 불태웠으며, 또한 불교 정화운동에 참여하여 지방에서 오가시는 스님들이 숙식을 하며 대한불교 조계종의 산실 역할을 하는데 기여하였다.
불교 정화운동의 주역들이자 한국 근세 불교사에 우뚝 솟은 '불멸의 수좌' 들로 금오 (金烏), 효봉 (曉峰), 동산 (東山), 청담 (靑潭) 스님을 꼽는데, 네 거봉 가운데 금오태전 (법명은 太田, 법호는 金烏, 1896 ~ 1968)은 움막과 토굴에서 거지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치열한 구조정신으로 일관했으며, 이를 통해 '마음의 가난' 을 실천하여 마침내 철저한 무소유의 일상사가 마음의 무소유로 이어져 걸림없이 자유자재한 정각 (正覺)을 이룬 인물이다.
1954년 5월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되면서 금오태전은 전국 비구승대회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전국의 비구, 비구니들을 서울로 집결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으며, 정화불사를 주도하던 중 이곳 팔달사에서 성좌들에게 "청정한 승단을 재건하여 참다운 부처님의 자비정신을 구현해 보자.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멀리 섬으로 들어가 다시는 세상을 보지 말고 이 생이 끝날 때까지 참선 공부만 하자" 고 간곡히 당부했다고 한다. 금오태전의 제자로는 월산 (月山), 범행 (梵行), 월남 (月南), 탄성 (呑星), 이두 (二斗), 혜정 (慧淨), 월성 (月性), 월주 (月珠), 월서 (月捿), 월탄 (月誕), 정일 (正日), 설조 (卨兆), 천룡 (天龍), 월선 (月禪), 함주 (含周), 월은 (月隱), 삼덕 (三德) 등 50여 명의 직계 제자가 있으며 문하에 500여 명의 손 · 증 · 상좌들이 있다. 이들은 덕숭문중 가운데도 특별히 금오문중으로 불리며 오늘날 한국 불교계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금오대선사의 운수시절 모습
팔달사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보이는 용화전 (龍華殿)은 팔작지붕 양쪽 용마루 끝에 거대한 용두가 앉아 있다. 용화전 벽에는 독특한 벽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데 '호랑이 담배 피우는 그림' 이다. 무섭고 사나운 호랑이가 목에 힘을 잔뜩 주면서 장죽을 물고 연약한 토끼의 시중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사실 호랑이는 한국인의 정서상 친근한 종재중의 하나로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데, 토끼를 괴롭히는 무서운 호랑이를 마냥 공포스러운 대상이 아닌 다소 해학적인 웃음거리로 표현해내는 우리 조상들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팔달사 초대 창건주 이채순 (平等月)의 뒤를 이은 2대 창건주 범행 (梵行) 스님은 도량 경내지 1,350여 평을 매입해 오늘의 모습으로 혁신불사를 하였고, 3대 창건주 승계 후 혜광 (慧光) 스님이 주지 재임 중에 3층 건물 매입과 경내 정화불사를 대대적으로 추진하여 노후건물 7동을 철거하고 사찰 및 경내 마당을 정비하여 전통사찰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고, 2층 건물 (1층은 양옥, 2층은 전통목조) 및 적묵당, 일주문, 부처님 진신사리봉안 3층 석탑 건립과 괘불탱화 (高 7.7m, 廣 4.3m, 석채)를 조성하였다.
前 주지 각일 (覺一) 스님은 명부전 신축불사를 마치고 회관법당 리모델링을 기획추진하였으며, 現 주지 보광 (普光) 스님이 경관 협정을 통하여 원도심 복합문화공간 (청누리)을 조성하고 단청불사를 추진하는 등 주지 소임에 임하고 있다.
교양관
용화전 龍華殿
白玉毫輝玄法界 (백옥호휘현법계) (오른쪽)
흰 터럭 빛내어 아득한 법계를 비추시며
紫金儀相化塵寰 (자금의상화진환 (왼쪽)
보라색 금빛 모습 나타내시어 진계를 건지시네.
高居兜率許躋攀 (고거도솔허제반) (오른쪽)
높이 도솔천에 계시면서 중생 오름을 허락하시고
遠嗣龍華遭遇難 (원사용화조우난) (왼쪽)
먼 훗날 용화수에서 법을 설하지만 만나긴 어려우리니
龍王宮
大雄殿
범종각
목어
범종
법고
운판
광목천왕
사천왕 중 서쪽을 지키는 신은 수미산 중턱 백은타 (白銀埵)에 살고 있는 광목천왕 (廣目天王)이다. 그는 흔히 잡어 (雜語) · 비호보 (非好報) · 악안 (惡眼)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그의 남다른 모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그의 몸은 여러 가지 색으로 장식되어 있고 입을 크게 벌린 형상을 함으로써 웅변으로 온갖 나쁜 이야기를 물리친다고 한다. 또 눈을 크게 부릅뜸으로써 그 위엄으로 나쁜 것들을 몰아낸다고 하여 악안, 광목이라고 하는 것이다.
광목천왕의 근본 서원은 죄인에게 벌을 내려 매우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도심 (道心)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의 모습은 붉은 관을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오른손은 펄꿈치를 세워 끝이 셋으로 갈라진 삼차극 (三叉戟)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보탑을 받들어 쥐고 있다. 그의 권속으로는 용 (龍)과 비사사 (毘舍闍) 등이 있다.
다문천왕
사천왕 중 북쪽을 지키는 신은 다문천왕 (多聞天王)은 달리 비사문천왕 (毘沙門天王)이라고도 하는데,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하여 다문 (多聞)이라고 한다.
그가 맡은 역할은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것인데 한때 불법에 귀의하여 광명신 (光明神)이 되었으나 본래 자신의 원을 지킨다 하여 금비라신 (金毘羅神)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다문천왕은 왼손에 늘 비파를 들고 있다. 그는 수미산의 북쪽 수정타 (水精埵)에 살며, 그의 권속으로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있다.
수명은 천상 (天上) 년으로 500년 (하루가 인간 년으로 50년이므로 900만년이다)
지국천왕
사천왕 중 동쪽을 지키는 신은 지국천왕 (持國天王)이다. 그는 안민 (安民)의 신으로서 수미산 동쪽 중턱의 황금타 (黃金埵)에 있는 천궁 (天宮)에서 살고 있다. 16 선신 (善神)의 하나이기도 한 지국천왕은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항상 인간을 고루 보살피며 국토를 수호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얼굴은 푸른 빛을 띠고 있으며, 왼손에는 칼을 쥐었고 오른손은 허리를 잡고 있거나 또는 보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그는 휘하에 팔부신중의 하나로서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만 맡는 음악의 신 (神) 乾達婆 (건달바)를 거느리고 있다.
※ 천상계는 태생이 아닌 화생으로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의 용모로 태어나 그 모습으로 살아간다. 찌꺼기 없는 천상의 음식을 먹기 때문에 대 소변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업에 따라 몸의 아름다움이나 사는 궁전의 크기에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증장천왕
사천왕 중 남방을 지키는 신은 증장천왕 (増長天王)은 수미산 남쪽의 유리타 (瑠璃埵)에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위덕을 증가하여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구반다 등 무수한 귀신을 거느린 증장천왕은 온 몸이 적육색이며 노한 눈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그의 모습은 대개 갑옷으로 무장하고 오른손은 용을 잡아 가슴 바로 아래에 대고 있고, 왼손에는 용의 여의주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冥府殿
조선시대 수원 국영목장
수원 감목관이 있었던 옛 홍원마장은 현재 평택시 안중읍 덕우리 산기슭으로부터 시작해 평택시 안중읍 성해리 (城海里) · 포승읍 석정리 (石井里) · 원정리 (遠井里) · 안성시 양성면 지역 (옛 괴태길곶) 봉수에 이르기까지 약 8㎞ 일대로, 홍원리 일대 경작지는 대부분 목장전이었다. 홍원마장 주변에는 토축으로 마장성 (馬場城)을 쌓았는데, 마장성은 마장의 말들을 보호하기 위해 축성되었다.
고려대학교도서관 소장 『팔도지도 (八道地圖)』에 표시된 부분이 수원 국영 목장이 있었던 수원부 포내면 (현재 평택 포승읍)이다. 수원 국영 목장 위치를 통해 조선시대 수원부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수원 감목관 장한종
장한종 (張漢宗, 1768 ~ 1815)은 자비대령화원 이후 1810년부터 1812년에 걸쳐 수원에서 종6품 감목관 직을 수행하였다. 조선 후기 화원들은 어진 제작 등 화원으로서 공로를 인정받으면 지방관 등의 관직에 임명되어 신분과 지위 상승을 이루었다. 장한종의 수원 감목관 근무 연혁은 순조대 『일성록』에서 알 수 있다.
감목관은 목장 업부를 담당하는 종6품 관직으로, 경기에는 강화, 남양, 수원, 인천, 장봉도 총 5곳에 감목관이 있었다. 장한종은 수원의 감목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수원에는 국영목장인 양야곶, 괴태곶 등이 있었다. 이 목장들은 수원부 홍원목장에서 관할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홍원목장에 말을 방목하여 키울 수 있는 마장 (馬場)을 두고 군마 (軍馬), 역마 (驛馬), 파발마 (擺撥馬) 등을 목장에서 길렀다. 장한종은 수원부 홍원목장에 감목관으로 파견되어 괴태곶과 양야곶 등 주변 마장을 감독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잠을 쫓는 이야기라는 『어수룩』 문장을 집필하였다.
수원 국영목장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도호부에 적혀 있는데 "홍원곶은 용성현에 있으며 목장의 둘레가 75리이고 수원부 남쪽 55리에 있다" 라는 기록을 통해 홍원목장은 규모가 크고 감독관이 파견돼 주변 일대의 목장까지 관장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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