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경기도

[부천ㅡ소새울역에서 소사역까지] 01

드무2 2024. 4. 3.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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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ㅡ소새울역에서 소사역까지] 01

 

 

 

 

 

 

복숭아밭

부천지역에 복숭아가 재배되기 시작한 시기는 소사 부근에 1902년으로 전해지며 1903년에는 부천역장을 지낸 일본 사람 다케하라가 복숭아를 재배하기 시작하여 일본인들이 대거 심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1904년 소사 부근의 한 농장에서 4개의 품종이 재배되었는데 당시 일본인들은 부천 일대의 지대가 복숭아 재배지로 알맞은 완만하고 배수가 잘 되는 사질토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재배면적을 계속 넓혀 나갔고 소사역, 송내역, 부천대학, 부천상공회의소 주변과 성주산 자락은 온통 복숭아 밭으로 바뀌어 갔다.

 

 

 

 

 

 

 

 

 

자목련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김영랑 ( 金永郞 1903ㅡ1950)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고 「詩文學」 으로 등단,

유미적이며 이상적인 순수시를 썼으며 대표작으로 「모란이 피기까지는」 「영랑시집」 을 남겼다.

 

 

 

 

 

 

 

 

 

장승

산신제 이틀 전 마을 뒷산인 도당산에서 신목 (神木)으로 선택된 소나무 두 그루를 잘라 장승 (북방천하대장군 · 남방지하여장군)을 만들어 합방을 시킨다. 산신제 당일 아침 일찍 합방해 놓은 장승을 동네 입구, 곧 소사본동 동사무소 맞은편 (남방지하여장군)과 봉배산 부근 (북방천하대장군)에 세운다. 제삿날에는 마을 입구와 끝에 마을을 수호하는 장승을 두 곳에 세우면서부터 본 치성제가 시작된다.

 

 

 

 

 

 

윗소사마을

화합과 안녕

선강풍요와 국태민안

 

 

 

 

 

 

 

 

 

 

 

 

 

 

 

국가유공자 증서

故 유홍열

1927. 08. 22. 생

 

우리 대한민국의 오늘은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므로 이를 애국정신의 귀감 (龜鑑)으로 삼아 항구적으로 기리기 위하여 이 증서를 드립니다.

 

2023년 06월 22일

대통령 윤석열

 

이 증서를 국가유공자증부에 기재합니다.

국가보훈부장관 박민식

 

 

 

소사본동 마을만들기 기획단

(현 소새마을기획단)                    

 

2014년, 소새마을의 유구한 향토역사를 매개체로 주민화합을 도모하고자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조직한 마을만들기 단체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소새마을에서 다양한 경로로 유입되는 신규 주민과 기존의 주민들에게 '소새마을의 주민' 이라는 자부심과 공감대 형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주요사업 및 업적

ㅡ 소사본동 마을해설 및 마을해설사 양성교육 시행 (2016 ~)

ㅡ 소새마을역사관 개관 · 운영 (2018 ~)

ㅡ 관내 초등학교 3학년 사회교과 연계수업 진행 (2018 ~)

ㅡ 소새마을기획단 협동조합 설립 · 운영 (2019 ~)

ㅡ 마을 향토자원 조사 및 아카이빙 작업

ㅡ 마을지도, 마을안내판, 사진첩, 달력 등 제작 · 배포

ㅡ '2019 전국도시재생한마당 주민참여프로그램 경진대회

국토부장관상 (대상) 수상

 

 

 

 

 

 

 

 

 

 

 

 

 

 

 

 

 

 

 

 

 

 

 

 

고향 (故鄕)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정지용 (鄭芝溶 1902 ~ ?)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고 부천 소사3거리에서 3년간 거주,

부천과 인연이 있는 한국 현대시의 큰별,

「향수」 「고향」 「백록담」 등 140여 편의 시를 남겼다.

 

※ 이 시는 일제치하에서 고향에 대한 상실감을 표현한 시임.

 

 

 

어린시절 추억

소사동의 소사로 가운데로 개울이 흘렀고 지금의 소사초등학교 후문 쪽에는 스케이트장도 있었다. 여름철에는 장마로 인해서 동네가 물에 잠겼고 겨울에는 물이 꽁꽁 얼어서 썰매를 탔던 기억이 있다.

 

ㅡ 2017년 ㅡ 아키비스트 수업 중에서

 

어렸을 때 비오는 날이면 복숭아 밭 옆을 어슬렁 어슬렁 걸어다니면 비바람을 맞은 복숭아가 길 옆으로 굴러 떨어진다. 그러면 먹을 것이 없던 시절 복숭아를 주워서 도랑물에 씻어 먹던 기억이 있다.

 

ㅡ 2017년 ㅡ 아키비스트 수업 중에서

 

 

 

 

 

 

 

 

 

 

 

 

2015 마을미술프로젝트

꺼리가 있는 즐거운 동네

두근두근 골목길

 

 

 

소쇄마을 역사관

 

 

 

주소 : 경기도 부천시 호현로 457

 

뚜벅뚜벅 마을교실

우리동네 체험처

 

부천시 우리동네 학습공간

 

 

 

 

 

 

 

 

 

독립운동가 이연형 1921ㅡ2009

이연형은 1937년 3월 경기도 부평군 문학면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9년 10월부터 1941년 5월 27일까지 홍중 (弘中)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하였다.1941년 7월 윤석균 (尹錫均) · 송치호 (宋致鎬)의 권유로 조선독립당에 가입하고 동년 11월까지 독립운동자금 870원을 제공하였다. 이후에도 1942년 5월 부천군 소사읍 벌응절리 소재 주식회사 일흥사 (日興社)로 이직해 일을 하면서 독립자금 모집에 노력하였다.

이 일로 이연형은 1942년 6월 27일 경찰에 체포되어 동년 10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3년 9월 25일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일흥사 (日興社) 소사공장 (素砂工場)]

 

◇ 舊 위치 : 소사읍 소사리

    田 39번지 : 388평

    畓 41번지 1,960평

 

◇ 現 위치 : 옛 소사구청 주변

    소사본동 64번지 일대

 

 

 

 

경인선 소사 일흥사 조선공장 전경

(京仁線 素砂 日興社 朝鮮工場 全景]

 

 

 

독립운동가 백성욱 1897ㅡ1981

1910년 부모를 여의고 봉국사로 출가

1917년 동국대학교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 입학

1919년 학생 신분으로 3 · 1만세운동에 참여 독립선언서 배포,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자금조달

1925년 프랑스와 독일로 유학을 떠나 철학박사 학위 취득 (우리나라 불교학 1호 박사)

1945년 광복 후, 건국운동 참여

1950년 대한민국 제4대 내무장관을 지냄

1952년 제3대 부통령 후보로 출마 (당시 주소지 부천군 소사읍 소사1구 산 66번지)

1953년 동국대학교 제2대 총장으로 취임

1956년 제4대 부통령 후보로 출마

1962년 소사리로 낙향하여 '백성목장' 과 소사본당을 건립하고 《금강경》을 강의하며 후학 양성에 힘씀.

 

 

 

 

 

 

부천시 소사읍 소사1리 윗소재 산 66번지

백성목장 (白性牧場) 대문 앞에서 백성욱 모습

ㅡ 사진 제공 : 백성욱 제자 김동규 (金東圭) ㅡ

 

 

 

 

 

 

젖소를 키우던 백성목장 牛舍 (위 왼쪽)

[성주산 생활체육공원] 언덕배기에 있는 백성욱 박사탑과 사리탑 (위 오른쪽) 

사일로 (가축사료 저장창고) (아래)

 

 

 

 

 

 

 

 

 

소사리 독립만세운동 1919

 

 

 

[계남면 (桂南面) 소사리 (素砂里) 및 6개 마을]

1919년 3월 23일 부천군 문학면 관교리에서 횃불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다음 날인 3월 24일에는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에서 황어장날을 맞이하여 태극기를 들고 약 6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하였고 이날 밤에 약 200여 명이 계양면사무소를 습격하여 파괴하였고, 3월 24일 밤에는 이들과 뜻을 같이한 계남면 소사리 (素砂里)를 비롯하여 이웃한 여섯 개 마을 사람들이 독립만세운동을 하였다.

 

이에 대해서 1919년 3월 25일 고제 (高第) 8,758호 <독립운동 관계의 건> <제26報>에 의하면, 동군 (仝郡) 소사 (素砂). 24일 계남면 소사리 (素砂里) 부근 여섯 개 마을에서 높은 곳에 봉화불 / 화톳불 (篝火)을 피워 놓고, 독립만세를 큰 소리로 외치자 소사주재 (素砂駐在) 순사 (巡査)가 곧바로 해산 (解散)시켰다고 보고하고 있다.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경 고종 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68세를 일기로 갑자기 승하하였다. 이를 놓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독살설이 떠돌아 다녔다.

 

 

 

1919년 고종황제 장례식 운구 (運柩) 장면

 

 

 

 

 

 

 

 

 

그대들 돌아오시니

정지용

<1945년 『해방 기념 시집』에서 발표>

 

백성과 나라가

이적 (夷狄)에 팔리우고

국사 (國祠)에 사신 (邪神)이

오연 (傲然)히 앉은지

죽음보다 어두운

오호 삼십육년 !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

 

허물 벗기우고

외오 돌아섰던

산 (山) 하 ! 이제 바로 돌아지라

자휘 잃었던 물

 

옛 자리로 새소리 흘리어라

어제 하늘이 아니어니

새론 해가 오르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

 

 

 

 

 

 

[소사 성당 설립 과정]

정지용 시인은 일본의 소개령에 의하여 1943년 부천군 소사읍 90ㅡ1번지에 정착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정지용 시인은 주민들이 신부가 없는 공소에서 미사를 드리는 모습을 안타까워 해, 노기남 주교를 매일 찾아가 임세빈 신부를 모셔 왔으며 1945년 12월 24일 첫 미사를 소사공소에서 드리게 된다. 당시가 미군 신탁통치 중이던 때였기 때문에, 임세빈 신부님 · 인천 답동 성당 임종국 신부님과 함께 적산 건물 관리를 담당하던 미군 숙소를 매일 방문하다시피 하였고, 담당 장교인 뮤엔씨로부터 일본인이 소유했던 소림별장의 사용허가를 받아 1946년 4월 5일 소림별장에서 첫 미사를 드렸다. 이렇게 소림별장에서 시작한 소사성당이 부천의 첫 번째 성당이며, 부천 성당 역사의 시작이 되었다.

 

 

 

 

 

 

정지용 시인이 살던 집터의 현재

 

 

 

 

 

 

1980년대 소명여고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소사성당 모습

 

 

 

 

 

 

 

 

 

얼굴 하나야 손바닥 들로 폭 가리지만

보고싶은 마음 호수만하니 눈 감을 밖에

 

호수 ㅡ 정지용

 

 

 

 

 

 

1960년대 모습

 

[소사삼거리]

소사삼거리는 조선시대부터 서울과 인천 그리고 시흥을 오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특히 여우고개와 함께 뱀내장ㅡ소사장ㅡ황어장을 오고갈 때 소를 끌고 반드시 거쳤던 삼거리였다. 이곳에는 주막도 있었고, 헌병대 초소도 있었다. 시인 김영달의 시 <소사유정 (素砂有情)>에도 등장하는 소새삼거리는 일제 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경인가도 (京仁街道)에서 벌어지는 공식 전국 마라톤대회, 전국 싸이클 대회를 비롯하여 1971년 실미도 부대원들이 탈취한 버스를 타고 지나간 곳이기도 하다. 부근에는 1940년대 시인 정지용이 거주하기도 했고, 소사성당의 전신인 소사공소도 있었다.

 

 

 

소사우시장 허가기사 (동아일보 1934. 1. 10.) (왼쪽)

1935. 1. 10 동아일보 3면 (오른쪽)

 

경인선 소사 (京仁線 素砂)에 가축시장이 인가 되엇다함은 기보 하얏거니와 그 후 동면에서는 시민일동과개시준비에 분망하엿든바 제반의 설비가 완성되어 내十一일 (음十二월十七일)부터 개시 한다는데 게리 조합에서는 一千五백원의 거금으로 내객을 위하야 경품 (景品)을 하며 조선 음악의 연출과 곡예단까지 초빙하는 등 十여년간 갈망하든 그 성의와 힘을 다하야 우시장의 발전을 축하한다고 하며 경품권은 내객 일인 一매로 그 상품은 여좌하다.

 

<1935. 1. 10 동아일보 3면>

 

 

 

소사우시장터 현재 모습 (왼쪽)

소사우시장 (오른쪽)

 

[소사 (素砂)에 우시장 (牛市場)]

소사우시장은 소래면 뱀내장과 계양면 황어장을 잇던 주요 시장 중 하나로 매월 2일, 7일에 우시장이 섰다. (소재지 : 소사본동 77ㅡ5번지 일대)

 

ㅡ 1927년 소사시장 (현재 자유시장의 전신) 창설

ㅡ 1934년 소사우시장이 생김

     (현재 심곡본동 부천청과물시장 일대)

ㅡ 1949년 소사읍 소사리로 이전

ㅡ 1979년 소사우시장 폐쇄

 

 

 

1977년 소명지하차도 착공 전 모습 (위)

소사삼거리 모습 (가운데)

1960년대 모습 (헌병 초소) (아래)

 

 

 

1977년 소명지하차도 착공 전 모습

 

 

 

소사삼거리 모습

 

 

 

 

 

 

조라술을 모시고 내려오는 모습 (왼쪽)

 

[윗소사대동산신제]

윗소사대동산신제는 250년전, 조선시대부터 소새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무병장수 그리고 마을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지내오고 있는 마을 제사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91년 마을 원로 권영택, 권순택 씨에 의해 복원되어 격년제로 홀수해 음력 10월 초 3일 개최되고 있다.

2013년 소사본동 주민센터로 이관하여 전통을 이어오고있다.

 

 

 

 

 

 

 

 

 

 

 

 

1967년 한미재단 4ㅡH 훈련농장 수련생들 모습 (가운데)

1967년 소사리 한미재단 4ㅡH 훈련농장 입소식 모습 (오른쪽)

 

 

 

 

 

 

1967년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재단 축하연 모습 (왼쪽)

 

[한미재단 4ㅡH 훈련농장]

한미재단은 전쟁을 겪고 있는 한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발족한 비영리 사설 원조기관으로, 1952년 한국에 5,000만 달러를 원조하였다. 1976년까지 25년 동안 한국의 전쟁 후 재건과 근대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1963년 겨울, 전국 최초로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에 한미재단 4ㅡH 훈련농장을 설립하고, 1964년 1월부터 지도자 양성을 하기 시작하였다. 총면적 2만여 평에 젖소, 돼지, 닭 축사가 있었고, 산언덕에 계단식으로 개간한 4,500평에 사료용 옥수수를 재배하였다.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 (소사본동 360번지 일대)에 훈련농장으로 조성된 계단식 밭과 축사 (畜舍), 시흥방향으로 여우고개 좌측에 위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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