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유람일지] 01

드무2 2024. 5. 4.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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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일지] 01

 

 

 

 

 

 

 

유람일지

REVISITING CONFUCIANISM

 

儒를 여행하다

THE ROOT OF KOREAN SPIRIT

 

2024. 02. 06 화 ㅡㅡㅡ 2024. 04. 21 일

 

 

 

전시를 열며

조금은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들을 따라가 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의 존엄성을 말하며, 사람으로서 지향해야 하는 바를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갈구하며 실천했던 선비의 공간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시는 충청남도 논산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의 개원기념특별전 <다시 유교, 유를 여행하다>를 '서울에서 만나는 충청유교문화유산' 이라는 주제로 재구성하였습니다. 학자이자 지도자였던 선비의 삶을 고택과 서원, 구곡이라는 3가지 주제로 구현하여 집과 학교, 자연이라는 공간을 '시대의 눈' 으로 재해석해보니, 나고 자라 자연으로 돌아가는 선비의 삶의 궤적이 현대인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잘 간직해온 충청의 유교문화유산이 이끄는 이야기를 통해, 나를 되돌아보는 즐거운 여행과 같은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고택유람 古宅遊覽

 

 

 

몰래 그린 유학자의 초상, 겸손한 제사상, 손님을 대접하는 묵은 손맛, 사회적 책임을 다한 가문의 현판과 언행록, 일상이 된 학문과 교육은 고택의 풍경에서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한 지역의 정서이기도 합니다. '물질이 아닌 정신을 남기라' 는 선비의 유교가 충청도 곳곳의 고택들에 배어 잘 간직되어 왔습니다.

 

평생 초가에서 살아온 스승을 위해 제자들이 지은 집, 산세를 해치지 않는 배치, 높은 담을 두지 않으려 연못과 배롱나무로 담을 삼았던 그 집은 자연 앞에서 겸손한 선비의 기품과 닮아 있는 듯합니다. 집은 곧 사람입니다. 그리고 머무는 곳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집이 모여 사회가 되고 시대의 문화를 이룹니다. 그래서 집은 나의 세계이자 한 사회와 시대의 세계이기도 하며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고택은 곧 선비입니다. 머물며 마음을 담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유교를 말하고자 합니다.

 

 

 

 

 

 

몰래 그린 유학자의 초상,

그리고 그 기록

 

한 폭의 초상화에 칠푼 七分의 모습을 그려내서

완연히 아름다운 덕을 드날리는 풍모요,

온화한 봄바람을 간직한 형상이라.

지금 선생의 모습과 목소리가 영원히 사라진 뒤에도

절하고 우러러 볼 수 있으니

덕스런 모습과 기상이 생전과 같구나.

선생의 말씀과 웃음을 들으며 가르침을 받들어 모심은

어찌 사림 후학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ㅡ 『영당기적 影堂紀蹟』 중에서

 

 

 

 

 

 

초상의 제작과정을 알려주는 윤증 초상 초본

보물 | 18 ~ 19세기 | 8점

한국유교문화진흥원 (윤완식 기탁)

 

윤증 초상의 제작 과정을 알려주는 소묘 초본 8점으로, 조선시대 초상화를 제작하고 옮겨 그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윤증 초상은 1744년 (영조 20)부터 1935년까지 약 200년간 5차례 옮겨 그릴 때마다 소묘 초본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7점은 얼굴을 중심으로 가볍게 초를 뜬 형태이며, 다른 1점은 상반신을 상세히 그렸다.

 

 

 

 

 

 

 

 

 

 

 

 

모두가 함께 지켜낸

선비의 집 

(영상시간  : 4' 06")

 

집은 사람을 닮고, 사람은 집을 닮는다고 합니다.

명재 윤증 明齋 尹拯, 1629 ~ 1714 선생의 후손들이 살았던 명재 고택엔

높은 담장이나 솟을대문이 없습니다.

대신 댓돌과 문 하나에도 타인을 위한 배려를 담았고,

햇빛과 바람의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해와 달이 끄는 궤도까지 계산한 듯

창을 열 때마다 펼쳐지는 그림 같은 풍경은

검소하지만 편안하고, 기품 있는 삶을 살아온

명재 선생과 그 후손들을 닮았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과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가문이 실천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지역민들의 보답이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지켜낸 선비의 집,

그 풍경 속에서 오랜 시간을 머금은

유교문화의 가치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종학당 宗學堂

"자라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한 번 잘못되어

어릴 때 교양이 바르지 못하면 어리석고 어둡게 되는 것이니

이는 매우 두려운 일이다."

 

ㅡ 파평윤씨 坡平尹氏 노종파 魯宗派 『종약 宗約』 중에서

 

 

 

문중교육에서 지역교육으로,

종학당

 

종학당은 문중의 교육기관으로 지식을 나누던 공간이었습니다. 1643년 (인조 21) 명재 윤증의 큰아버지 윤순거가 건립하여, 파평윤씨 종중 자녀들 뿐만 아니라문종의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을 교육하였으며, 문과 급제 42명, 무과급제 31명을 배출하였습니다.

 

 

 

 

 

 

(위에서부터)

종학당 宗學堂

천자문 天字文과 소학 小學을 배우는 초급교육과정

 

백록당 白鹿堂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실천하는 학문으로

 

보인당 補仁堂

서로 인 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도우라

 

정수루 淨水樓

사색 思索과 심성수양 心性修養의 공간

 

 

 

고택스테이,

머무르고 싶은

 

닫혀 있는 온돌방과 열려 있는 마루는 다소 상반된 구조이지만

북쪽과 남쪽의 문화가 융화된 삶을 담아냈습니다.

 

자연과 호흡하며 어울림의 뜻을 지키려는 노력은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어집니다.

 

고택에서 머물며 얻는 깨달음은 집과 내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가짐을 이유로 집을 오래 비우지 못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을 배려한 옛 집의 위대함을 마주할 때

생의 마지막까지 머무르고 싶은 공간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2 서원유람 書院遊覽

 

 

 

'예 (禮)란 타인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임을 깨닫게 해준 선비의 실천은 기록으로 남아, 3대가 함께 강학한 흔치 않은 서원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학자들의 사유의 증거는 기록이 되어 책판에 새겨지고, 서원의 인장은 그 품격을 증명합니다.

 

사람을 키워내고, 관계를 중시하며, 배움이 그 자체로 즐거움임을 깨닫게 하는 공간에서 지식은 어느 누구도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서원을 통한 선비문화는 여성도, 중인도, 평민도 '배움과 실천' 을 통해 이상적 인간인 '군자' 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 瑞日和風', '만물이 그러하 듯 모든 것을 포용하라 地負海涵', 본질은 변하지 않되 형식은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준 노선생의 따듯한 가르침이, 그를 모신 서원의 담장 글귀로 남아있는 듯합니다.

 

서원은 곧 선비입니다. 배움 그 자체가 즐거움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유교를 말하고자 합니다.

 

 

 

 

 

 

돈암,

공간의 흔적

 

1854년과 1874년 국가는 논산지역에 내린 큰 비를 '홍수' 로 선포했습니다.

자연재해로 인해 돈암서원은 '존망 存亡' 의 위기에서

1880년 사당과 양성당 등 필수 건축물들의 '이전 移轉' 결정을 내렸습니다.

 

남아있던 건물 중 서원의 강당 '응도당 凝道堂' 은

1968년 호남선 복선화 사업으로 옛 서원을 관통함에 따라

197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이후로는 40여 년간 서원의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한

관련 건물의 이전 및 신축이 계속되었습니다.

 

자연재해로부터 서원을 지키려던 19세기의 선현들,

서원이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현대적 활용에 힘쓴 지역민들과

후손들의 노력, 이 모든 것들이 바로 2019년 7월 10일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연산현 지도 連山縣地圖

1872년 | 채색도 | 세로 36 | 가로 25.5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연구원

 

1872년 (고종 9)에 충청도 각 군에서 제작해서 올린 충청도 지도 중 '연산현' 의 지도로, 좌측 하단에 돈암서원이 그려져 있다.

 

 

 

 

 

 

산앙루 (山仰樓)

돈암서원에서 주변 환경을 바라볼 수 있는 누각

 

입덕문 (入德門)

돈암서원의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문

 

응도당 (凝道堂)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학 (講學)의 공간

 

정회당 (靜會堂)

사계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제자를 가르친 공간

 

정의재 (精義齋)

기숙사 (서재)

 

거경재 (居敬齋)

기숙사 (동재)

 

장판각 (藏板閣)

돈암서원에서 만든 책의 책판을 보관하던 공간

 

양성당 (養性堂)

사계 김장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공간

 

내삼문 (內三門)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을 연결해 주는 문

 

숭례사 (崇禮祠)

스승을 모시던 제향공간

 

전사청 (典祀廳)

제례 준비를 하는 공간

 

원정비 (院庭碑)

돈암서원의 내력과 구조 등을 기록한 비석

 

 

 

유네스코 세계유산

돈암서원 이야기

(영상시간 : 6' 27")

 

2020년 돈암서원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1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다양한 영상들을 편집하여 돈암서원의 건축과 역사, 유학자들이 이야기뿐만 아니라 현재 돈암서원을 즐기는 방법을 함께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이 영상에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공모전 작품인 둘시네아의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https://youtu.be/NW22HwlfPIs

 

 

 

하얀 모래와 맑은 시냇물을 바라다

사계 김장생 金長生, 1548ㅡ1631

사계 김장생이 말하는 예 禮의 기준은 형식을 취하기 보다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가변성을 동반하였다.

'무엇을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의 기준이 있을 때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그에게서

조선예학의 기본서들이 탄생하였다.

 

 

 

 

 

 

홀로 재단하는 것을 삼가다

신독재 김집 金集, 1574ㅡ1656

신독재 김집은 아버지 김장생을 학문적으로 계승하여

일상 속에서 예를 실천함과 더불어

'홀로 있을 때 스스로를 조심하며 뜻을 지키는'

공부 방법을 늘 강조하였다.

 

 

 

늘 봄과 같아라

동춘당 송준길 宋浚吉, 1606ㅡ1672

동춘당 송준길은 회덕 懷德, 덕을 품은 선비의 땅 의 집성촌에

'사물과 더물어 봄을 함께 한다' 는 뜻의

동춘당을 세우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예서에 정통했지만 학파를 가리지 않았고,

평생 사람을 살피고 배려한 대학자로 정치적 결단의

시기마다 '늘 봄과 같은' 따듯한 인간성을 보여주었다.

 

 

 

초막과 멀리 떨어져 이치를 논하다

우암 송시열 宋時烈, 1607ㅡ1689

우리나라 학자 중 '자 子'가 붙은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 宋子大全』을 남겼다.

화양서원을 근거로 기호학파를 이끌었고,

사약을 받은 죽음은 제자들에 의해

신념을 위한 순교로 이해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노론의 중심으로 조선후기 사회를 움직였다.

 

 

 

 

 

 

 

 

 

조선 예서의 기준, 가례집람 家禮輯覽

1685년경 || 서울역사박물관

 

조선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 金長生, 1548ㅡ1631이 『주자가례 朱子家禮』를 증보 · 해설한 책이다. 기호사림에서 최초로 사례 四禮를 증보 · 해설한 단행본으로, 조선 예서의 기준서가 되었다. 그림으로 도해한 가례집람도성 家禮輯覽圖說, 관례 冠禮, 혼례 婚禮, 상례 喪禮, 제례 祭禮의 내용으로 총 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송시열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의 노력으로 간행되었다.

 

 

 

 

 

 

돈암서원비 遯巖書院碑 탁본 拓本

조선후기 || 서울역사박물관

 

사계 김장생의 학문을 기리기 위해 1634년 세워진 돈암서원의 내력과 그의 아들 신독재 愼獨齋 김집 金集, 1574ㅡ1656 부자의 학문과 업적 등을 새긴 비석의 탁본이다. 돈암서원비는 1669년 현종 10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송시열 宋時烈, 1607ㅡ1689이 적고 송준길 宋浚吉, 1606ㅡ1672이 글씨를 썼으며, 전서체 제목은 김만기 金萬基, 1633ㅡ1687가 썼다.

해당 탁본이 수록된 『금석록 金石錄』은 조선 영조 때 김재로 金在魯, 1682ㅡ1759가 고려 · 조선의 금석문 탁본을 수집하여 엮은 책 중의 하나이다.

 

 

 

 

 

 

우암 송시열 초상 尤庵宋先生眞像

송시열 宋時烈, 1607ㅡ1689은 우리나라 학자 중 유일하게 '송자 宋子' 라고 불릴 만큼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문인이자 관료로, 조선 후기 학문과 사상, 정치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인물이다. 그림 속 송시열 초상은 1609년 제작된 봉안 본을 다시 모사하여 그린 것이며, 그 옆으로는 송시열의 문인 권상하 權尙夏, 1641ㅡ1721, 김창협 金昌協, 1651ㅡ1708 등의 찬문이 이어진다. 찬문에서는 거유 巨儒로서의 송시열의 당당한 풍모와 위상을 적고 있다.

이 그림이 수록된 『양정재시화첩 養正齋詩畵帖』은 송시열 제자 양정당 養正堂 최방언 崔邦彦, 1634ㅡ1724의 8세손 최병헌이 오랜 벗 구필회 집안에 가장된 시화첩을 모은 것이다. 총 14면으로 구성된 화첩에는 송시열 후학들이 주도하여 모사한 송시열 초상과 그를 추모하는 서원과 영당, 초상화 봉안처를 그려낸 실경산수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화첩은 1922년 새롭게 모사한 것이나 문인들이 초상화와 화상찬의 제작 · 봉안을 통해 선현 先賢을 추모하고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했던 전통이 20세기 초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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