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1) 대동강의 푸른 물결
1950년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한 국군과 유엔군은 시내 곳곳에서 저항하는 북한군과 시가전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저항은 평양을 우회해 북쪽으로 진입한 국군의 협공에 밀려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국군이 평양 시내에서 북한군과 교전하고 있다. 시가전은 오래 진행되진 않았어도 위험했다. [중앙포토]
내 머릿속에 늘 푸른 강이었던 대동강의 물결이 언뜻 보였다. 전쟁이 터지면서 나는 임진강에서 물러나, 대한민국 수도를 품에 안고 흐르는 한강을 넘었다. 다시 낙동강에서 대한민국의 숨결을 지켜내고 한 달 뒤, 나는 고향의 대동강에 다가서고 있었다. 동생 인엽과 늘 뛰놀면서 그 바닥까지 헤집고 다녔던 고향의 강. 나는 어느덧 일곱 살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여읜 직후였다. 고향 강서에서 평양으로 올라와 삼 남매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늘 고달팠다. 생계가 막막했고, 달리 누구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할 형편도 안 됐다. 어머니는 일곱 살 난 나와 네 살배기 동생 인엽, 그리고 13세의 누나와 함께 대동강 다리에 올라섰다.
국군 1사단 평양 접수 … ‘미 1기병사단 환영’ 피켓 걸고 기다려
어머니는 대동강에 몸을 던져 일가족이 세상과 이별할 결심이었다. 나이에 비해 철이 제법 들었던 누나가 “나무도 3년이 지나야 뿌리를 내리는데, 평양에 오자마자 이럴 수는 없다”며 어머니를 만류했다. 죽을 결심으로 다시 한 번 살아보자고 눈물로 어머니를 설득했고, 모친은 끝내 울면서 발길을 돌렸다.
그 기억이 떠오르면서 내 눈가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가슴도 덩달아 뛰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였다. 저 앞에 먼저 가 있다가 나를 향해 뛰어오는 미군 장교 한 사람이 있었다. 미 1군단 연락장교로 우리 사단에 와 있던 본 화이저 중위였다. 그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내게 말했다. “사단장, 드디어 평양에 왔어요-.” 그는 좀체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다는 식으로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그렇다. 그의 고향도 평양이었다. 그는 미국 선교사의 아들이었다. 평양 숭실중학교 옆 동네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평양 어투로 “내가 태어난 곳에 빨리 가야 하는데-, 정말 빨리 가고 싶다”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흥분과 감격 때문에 내 귀향의 정서는 흐트러졌다. 그래도 나는 기뻤다.
미 1기병사단과 합류할 지점은 대동교 입구 선교리의 로터리였다. 그곳에 선착하면 평양 입성의 경주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것이었다. 우리 부대가 그곳에 도착한 때는 오전 11시쯤이었다. 미군들은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이긴 것이다.
그때 강 쪽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리고 연기가 치솟았다. 파편들이 공중으로 흩날렸다가 떨어졌다. 적군이 우리의 평양 입성에 맞춰서 대동교를 폭파한 것이었다. 중간 부분이 완전히 내려앉았다. 적들은 강 너머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흙을 잔뜩 넣은 포대로 벽을 쌓은 진지 여러 개가 보였다.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우리 1사단이 미 1기병사단에 비해 15분 정도 먼저 도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기다린 시간은 최소한 30분은 됐다. 미군 전차부대원들은 벌써 ‘1기병사단을 환영한다. 한국군 1사단 백(선엽)’이라는 영어 피켓을 만들어 걸려고 했다. 내가 너무 지나치다 싶어 만류했지만, 그들은 얼굴까지 붉혀가며 “우리는 한국군 1사단 일원이고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 팀이 이긴 것”이라고 했다. 더 말릴 수 없었다.
호바트 게이(1894~1983)- 평양 진격 당시 미 1기병사단장
멀리서 미 1군단장 프랭크 밀번 장군의 모습이 보였다. 그와 함께 차에 동승한 사람은 로우 소장이었다. 미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였다. 대통령을 대신해 평양 진격 상황을 직접 알아보기 위해 밀번 군단장과 함께 평양에 도착한 것이었다. 호바트 게이 1기병사단장도 함께 왔다.
밀번 군단장이 나와 게이에게 “이리 와서 서로 악수를 하라”고 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게이와 악수를 했다. 밀번 일행과 같이 온 내외신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게이 소장은 악수를 하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평양 선두 입성에서 국군 1사단에 한발 늦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꽤 편찮아 보였다.
공세는 이어졌다. 시내 곳곳에 남아 있는 적을 소탕해야 진정하게 평양을 손에 넣는 것이기 때문이다. 11연대는 주암산 아래 도섭장에서 강을 건너 서(西)평양으로 진격했다. 12연대는 동평양을 담당하기로 했다. 적은 시내 곳곳에 흙을 넣은 마대를 쌓아 진지를 만들어 놓고 반격을 해왔다. 위험한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1) 대동강의 푸른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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