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서울 거쳐 평양으로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8) 미군의 전투 스타일

드무2 2021. 6. 27.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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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8) 미군의 전투 스타일

 

 

 

이 상황에 앞서 평양을 향해 발길을 서두르던 우리 부대가 황해도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이미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벌써 30㎞를 지나왔다. 하루에 그 정도 진격했으면 됐겠거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와 함께 선두를 지켜왔던 미군 전차중대가 공격을 멈추고 야영 준비에 들어갔다.


야간행군 꺼리는 미군 “우린 낮엔 호랑이, 밤엔 고양이”

 

 

길을 재촉했던 나는 그들의 야영준비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나는 “길을 더 가야 한다. 지금은 쉴 때가 아니다”고 미군 전차 중대장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난색을 표명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사단장, 지금 우리는 쉬어야 한다. 더운 음식도 먹어야 하고 씻기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내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가 말했다. “우리 미군 전차부대는 낮에는 호랑이지만, 밤에는 고양이”라고 사정하듯 말했다.



미군은 늘 그랬다. 밤에는 움직이기를 정말 싫어한다. 나중의 일이지만, 중공군은 꼭 그런 미군의 약점을 파고들어 밤에만 공격을 가해 왔다. 중공군이 불어대는 피리와 나팔소리에 밤이면 꼭 잠을 자야 했던 미군들은 넌덜머리를 치고는 했다.



무더운 여름에 전투를 수행하다가 한국의 들판에 발달해 있는 논의 물을 보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람들도 미군이었다. 가능하면 매일, 더운 때에는 시시각각 시원한 물에 샤워를 했던 습관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논물에 몸 담그기를 좋아했다. 전쟁이 벌어지는 현장에서도 적의 동태가 없고, 위험이 당분간 줄었다고 판단하면 참호 속에서 나와 논으로 가서 물을 끼얹고 돌아온다.

 

 

 

미국인은 추수감사절에는 반드시 칠면조 고기를 먹는다. 미 8군 제16 공병대대 병사 두 명이 추수감사절 특식 재료로 받은 칠면조를 구운 뒤 소스를 바르고 있다. 곰방대를 문 한국 노인이 곁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다. 시기는 미상이다. [미 육군부 자료]

 

 

 

이들이 전장(戰場)을 누비면서 항상 그리워한 게 또 있다. 따뜻한 커피다. 전선에서 있다가 뜨거운 음식을 공급하는 핫 푸드(hot food) 차량이 오면 참호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입맛을 다신다.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순서가 되면 벼락같이 차 앞으로 달려가 커피부터 받아들기도 했다. 그리고 음식 조리를 해주는 그 차량에서 뜨거운 음식을 받아들고 허겁지겁 먹는 모습도 보인다.



고기 통조림과 과일 통조림이 담겨 있는 C레이션 박스 안에 주식으로 먹는 고기 통조림보다 훨씬 인기 있었던 것은 파인애플과 복숭아가 담긴 과일 통조림이었다. 이들은 과일 통조림을 한꺼번에 먹어 치우지 않고 남겨 뒀다가 격전이 벌어진 뒤 참호 속에서 이를 까먹는 재미를 즐겼다.



6·25 전쟁 초반에는 그럴 엄두를 내지는 못했지만 해를 넘긴 전쟁이 장기전으로 변해가던 1951년 미군은 점수제를 도입해 일선 장병에게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의 장병에게는 대개 3점인가를 줬고, 후방의 장병에게는 1~1.5점씩을 매겨 적립되는 점수에 따라 휴가를 보내는 방식이었다. 휴가를 받은 장병은 일본으로 갔다. 일본의 도시나 해변에 푹 파묻혀 휴가 기간을 보낸 뒤 이들은 ‘지긋지긋’했던 한국의 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추수감사절이면 일본과 미국 본토에서 대량으로 날라 오는 보급품이 칠면조다. 통닭보다 훨씬 큰 칠면조 고기는 싸움이 치열하게 붙고 있는 전선에도 보내진다. 푸짐한 칠면조 고기를 가운데에 두고 조금씩 잘라 서로 나눠 먹는 미군의 추수감사절 식사 장면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그때의 한국인은 샤워라는 것을 잘 몰랐다. 그저 논물 만나면 간단하게 세수나 하고, 우물을 만나면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지나쳤다. 수염도 많이 나질 않아 면도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다. 게다가 먹는 것이라고 해봐야 대량으로 하는 밥에 ‘도레미탕’ ‘3000만의 영양식’이라고 불렸던 콩나물국을 곁들여 먹는 식이었다. 간식이라고 해봐야 부산이나 대구에서 만들었던 건빵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 국군과 자유분방하면서 샤워 물을 찾기에 늘 바빴던 미군이 함께 작전을 벌이는 것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국군 1사단과 미군 고사포단, 전차대대의 부대원들은 함께 어울렸다. 미군이 밤에 쉬면 한국군이 앞장서서 길을 트고, 적의 강력한 무기가 등장하면 미군이 먼저 나서서 그들을 막았다.

 

 

 

우리와 함께 걷고 싸웠던 미군 부대원들은 어느덧 국군 1사단의 정체성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한국군 1사단을 따라 먼저 평양에 들어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내 지휘에 잘 따라줬다. 문제가 생기면 함께 토론해 답을 만들어내고, 그다음에는 일절 다른 잡음을 내지 않는 충직함으로 국군 1사단의 진격을 든든하게 지원해 줬다.



우리는 10월 18일 해질 무렵 평양으로부터 20㎞ 떨어진 지동리 근처에 도달했다. 양쪽으로 낮은 야산들이 이어져 방어하기에 좋은 지점이었다. 이곳만 뚫으면 평양까지는 넓고 긴 평야지대다. 적의 입장에서 보면 평양을 지키는 거의 마지막 저지선이다. 적은 예상대로 그 한쪽을 지키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8) 미군의 전투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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