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서울 거쳐 평양으로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3) 낯선 평양

드무2 2021. 6. 28.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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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3) 낯선 평양

 

 

 

1950년 10월 국군과 연합군이 탈환한 평양은 아직 크게 부서지지 않았다. 평양에서 시가전을 펼쳤던 국군 일부가 평양백화점 앞에 서 있다. 평양은 같은 해 10월 말 중공군이 참전해 공산치하에 들어간 뒤 미군의 대대적인 공습을 받아 시내 전역이 성한 데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무너진다. [중앙포토]

 

 

 

아침 6시쯤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단 CP에 갔더니 미군들이 와 있었다. 미 2사단의 ‘인디언 헤드’ 마크를 단 사람들이었다. 100명 남짓이었다. “도강(渡江)을 허락해 달라”는 그들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도쿄 유엔총사령부(GHQ)에서 보낸 ‘문서 수집반’이었다. 북한이 남기고 간 모든 문서를 신속하게 확보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부지런했다. 나는 “강을 넘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들이 나보다 조금 앞서 먼저 강을 건넜다.


평양 기생들 “공산당 놈들 술 실컷 마시고 돈도 안 주더라”

 

 

나는 오전 10시쯤 강을 넘었다. 강 건너편은 이미 국군과 미군에 의해 대부분 정리가 된 상태였다. 전날 저녁까지 일부 벌어지던 시가전은 모두 사라졌다. 북한군은 평양에서 거의 물러간 상태였다. 먼저, 김일성의 흔적을 찾았다. 만수대 인민위원회라고 하는 곳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사무실에는 집기 등만이 그대로 있었다. 김일성의 집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초상이었다. 그 초상이 정문 맞은편 벽에 걸린 채 있었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텅 비어 있는 사무실에 잠깐 서 있었다.



그리고 정면에 놓여 있는 김일성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의 의자에 앉아 봤다. 김일성이 남침을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이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 이 전쟁을 일으킨 것일까. 한반도에서 엄청난 피비린내를 풍겼던 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라는 인물은 지금 어디 있는 것일까. 그를 어디로 가서 잡은 뒤 이 심각한 전쟁의 죄과(罪過)를 물을 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젖었다. 그러나 부질없었다. 그는 이미 도주했고, 지금쯤 평안북도 산천의 험한 계곡을 이리저리 헤집으면서 북상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는 우리가 평양에 도착하기 사흘 전쯤에 평양을 떠났다.

 

 

 

이오시프 스탈린(1878 ~1953)

 

 

 

그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지프를 타고 평양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시가지 표정은 내가 5년 전 떠날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군의 폭격도 그때까지는 별반 없었다. 단지 평양역이 공중 폭격으로 부서진 모습을 봤다. 그렇게 평양은 생각보다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담이자, 역시 나중에 들은 이야기다. 우리가 평양에 입성한 날 밤 내 부하 중의 일부는 호기심이 동했다고 한다. 내가 늘 신뢰했던 12연대장 김점곤 대령이 전해준 내용이다. 그는 선교리에 도착한 날 작전을 펼쳐 남아 있던 적군, 잔적(殘敵)을 모두 소탕했다. 밤이 되자 부하 하나가 간청을 하더란다. “평양에 왔으니 그 유명한 기생집이 어떻게 변했는지 가보자”는 것이었다.



작전 중이었지만 부하의 요청이 너무 간곡해 김 대령 일행은 선교리와 능라도 사이에 있던 유명한 기생집 촌락을 찾아갔다고 했다. 보잘것없는 식사와 건빵만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먼 길을 이동해 평양에 선착한 1사단의 부대원들답게 그들은 먼저 기름진 음식을 시켰다고 했다. 평안도 음식이 올라오는데, 맛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는 충분했다고 한다. 잠시 후에 기생들이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까만 저고리와 치마, 거기다가 버선까지 까만색의 것을 착용하고 기생들이 들어섰다. 기생치고는 매우 초라한 행색이었다. 술을 시켜 몇 잔 돌렸더니 취기(醉氣)가 오른 기생들이 한결같이 하소연하더라는 것이다. 기생들은 “공산당 놈들 정말 나쁘다”면서 속내를 털어놓더란다. 이유를 물었더니 한 기생이 “공산당 간부 놈들이 와서 실컷 먹고 마시고 나서는 돈도 주지 않았다”고 했다. 기생들이 검은색 옷으로 차려 입은 것도 “자기네들이 와서 놀려고 그냥 영업을 하게 해놓고서는 일반 시민들 눈치 때문에 이런 복장을 입게 했다”는 설명이었다.



평양 기생은 자고로 셈이 밝기로 유명하다. 그런 그들로부터 돈을 내지 않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셨으니, 공산당 간부라는 사람들은 배짱이 두둑하고 염치라는 것을 아예 발 아래에 짓밟아 버린 사람들일 것이다. 김 대령은 그날 평양의 기생들을 ‘대접’했다고 했다. 기생들이 같이 간 부대원들보다 훨씬 많은 술을 들이켜더라는 것이다. 먹고 마시면서 즐기려고 갔던 김 대령의 일행이 거꾸로 억울함에 젖어 있던 평양 기생을 접대한 셈이다.

 

 

 

겉으로는 민족과 통일을 내세우면서 한편으로 동족상잔의 피바람을 일으켰던 공산당의 이중성.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는 게 부질없을 정도로 뻔한 얘기다. 그러나 김 대령이 겪었던 평양 입성 첫날 밤의 기생집 일화는 평범한 일상(日常) 속에서의 공산당이 얼마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알려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이해했던 김점곤 대령이다. 그는 그 기생집에서 공산당의 진짜 모습을 충분히 읽었던 모양이다.



그런 공산 치하에 남아 있던 평양이 변하지 않았을 리 없다. 겉모습은 멀쩡하지만 어딘가 변해도 크게 변했을 것이다. 만수대 김일성 집무실을 나와 나는 평양 형무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멀리 평양 형무소가 보이고 점차 내 지프가 그를 향해 다가가는 순간 역겨운 냄새가 풍겨나고 있었다. 아주 지독한 냄새였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3) 낯선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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