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0) 저 눈앞에 평양이
1950년 10월 19일 첫 평양 입성을 눈앞에 둔 국군 1사단의 백선엽 장군 일행이 대동교 선교리에 도착하기 직전 지뢰폭발 사고가 터졌다. 백 사단장의 뒤를 따르던 석주암 참모장 일행의 지프가 지뢰가 터지면서 전복돼 길에 누워 있다. 1사단은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이날 평양에 도착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자욱한 아침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연기 같은 안개 사이로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그곳은 영국 등 유럽의 사진에서 흔히 보는 것과 비슷한 벌판이다. 낮은 구릉이 곳곳에 널려 있을 뿐 시야를 가로막는 산은 없었다. 그냥 그곳에서 평양까지는 허허벌판으로 툭 터져 있는 공간이었다. 평양을 먹여 살리는 곡창이기도 했다.
“우리라도 살자” … 평양 인민군 총사령부는 무너지고 있었다
미군 전차대원들이 신나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와-, 정말 탱크 컨트리(tank country)”라면서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지나온 험준한 산로(山路)와는 전혀 다른, 전차 기동 작전이 훨씬 용이한 지역이라는 얘기였다.
나는 그 중간을 지나고 있었다. 양 옆으로는 1사단 휘하의 2개 연대가 횡대(橫隊)로 죽 늘어섰다. 중간 도로에는 나와 함께 50대가 넘는 미군의 전차가 있었고, 그 후방에는 4개 포병대대 100여 문의 포와 박격포가 받쳐주고 있었다. 강력한 화력을 앞뒤에 세우고 넓은 벌판을 길게 동서로 늘어서서 내 고향 평양을 향해 진격하던 그 장면은 뭐라 형언키 어려울 정도의 일대 장관이었다.
임진강을 넘어 평양으로 향하는 이 과정은 경마장에서 벌어지는 경마 게임과 같을 수도 있었다. 미 1기병사단과 함께 평양 선두 입성 경쟁을 벌이고 있는 그 형국이 말이다. 지동리를 돌파하면서 잠시 여유를 회복하자 우리 1사단과 경쟁을 벌이고 있던 미 1기병사단이 어디까지 왔는지 궁금해졌다. 우리 1사단에 와 있던 미 공군연락장교에게 “1기병사단 진출 지점이 어디인지 알아보라”고 말했다. 그는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면서 연락을 시도했다.
모스키토(mosquito)라 불린 소형 정찰기 LT-6(복원한 모습).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1사단이 진출한 상공으로 모스키토(mosquito)라고 불리는 작은 정찰기가 날아 다녔다. 우리와 미 1기병사단 사이를 오가면서 어떤 ‘말’이 앞으로 나서는가를 중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군연락장교를 통해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미 1기병사단도 이미 중화라는 곳을 돌파한 모양이다. 우리의 진격 상황과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셈이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우리가 앞선 상황이었다.
벌판으로 깊숙이 들어서자 적의 반격이 다시 불을 뿜었다. 사동이라는 곳에 가까워지면서다. 수색대의 보고를 종합해보면 적의 2개 사단이 그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적의 기관총탄과 박격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 일부 병력이 그쪽으로 다가가 치열하게 응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전체 대열은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사단 통신참모인 윤혁표 소령이 나를 급하게 불렀다. “무슨 일이냐”면서 달려간 내게 윤 소령이 전화선을 들어 보였다. “적군 통신선을 잡았습니다. 평양에 있는 인민군 총사령부 교환대를 호출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평양 말을 몰라 들킬 것 같습니다”고 그가 말했다. 평양에 남아 있는 적군과 통신을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대신 우리를 북한군으로 위장해야 했다. 평양 출신인 사단장이 직접 이들에게 말을 걸어보라는 뜻이었다.
내가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나는 “동무,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평양 말투로 물었다. 그들은 내게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급한 목소리로 “미 제국주의자들이 지금 전차 수백 대를 몰고 쳐들어온다”고 말했다. 숨이 넘어갈 듯한 분위기였다. 아주 다급한 어투였다. 나는 내친김에 김일성에 대해서 물었다. 내 기억으로는 다른 호칭 없이 “김일성이는 어디 있는가”라고 물었던 것 같다.
인민군 총사령부 교환대의 교환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대방은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도 가야 한다”면서 끊으려고 했다. “동무, 최후까지 저항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말하자, 그는 “빨리 후퇴해서 우리라도 살아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들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내가 생각했던 수준보다 더 훨씬 빠르게 북한군이 붕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동 근처에 자리 잡고 있던 적 2개 사단의 공격도 강력하지 못했다. 자신의 후방이 급속하게 와해하고 있는 상황을 감지하고 있는 부대가 제대로 공격을 펼칠 리 없었다. 비록 기관총과 박격포 등을 동원해 우리 일행을 공격해 왔지만, 아군의 반격이 거세지자 그들은 별다른 저항을 이어가지 못하고 후퇴했던 것이다.
그러나 추을이란 곳을 지날 때 적의 기관총탄과 박격포탄이 날아와 위기의 순간을 맞기도 했다. 나는 급히 전차에서 뛰어내려 길가 도랑에 엎드렸고, 미군 전차는 모두 해치를 신속하게 닫은 뒤 응사해 이들을 제압했다.
그것 말고 큰 저항은 없었다. 단지 땅에 매설한 지뢰가 문제였다. 북한군 지뢰는 나무로 만든 박스형이라서 지뢰 감지기에 걸리지 않았다. 그저 진격 중에 붙잡은 북한군 포로를 앞세워 지뢰 매설 장소를 알아내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포로들은 제대로 협조했다. 자신들이 직접 묻었던 지뢰 매설 장소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국군과 미군 공병대가 나서서 그를 하나씩 제거하면서 침착하게 전진했다.
가장 큰 다리인 대동교로 향하고 있을 때 뒤에서 지뢰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지나온 곳이었지만 나는 그 지뢰를 밟지 않았다. 뒤를 따르던 석주암 참모장의 지프가 당한 것이었다. 그는 다리를 크게 다쳐 후송해야 했다. 뒷좌석에 탔던 문형태 작전참모는 다행히 무사했다. 저 앞에 평양이 모습을 보였다. 광복 뒤인 1945년 12월 떠났던 고향이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0) 저 눈앞에 평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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