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4) 처참한 평양 형무소
6 · 25전쟁 초기 남한의 상당 부분을 점령한 북한은 곳곳에서 이른바 ‘인민재판’을 벌여 협조적이지 않은 인사들을 처형했다. 사진은 전쟁 발발 직후 서울 국회의사당 앞에 차려진 인민재판소에서 유명 문인 김팔봉씨(양복 입은 이로 추정)가 즉결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사형 판결을 받아 뭇매를 맞고 버려졌지만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중앙포토]
평양형무소 정문을 들어서면서 뭔가 처참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짐작은 맞았다. 내가 들어서는 마당에 쌓여 있는 것은 시체들이었다. 적군은 쫓기듯 평양을 빠져나가면서 평양형무소에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던 모양이다. 지난 4개월여 동안 전쟁터를 누빈 나였지만 그 광경을 돌아보는 데에는 남다른 인내심이 필요했다.
평양 · 원산 · 함흥 … 형무소마다 우물은 핏빛, 구덩이엔 시신들
형무소 마당뿐이 아니었다. 우물이란 우물은 모두 시체로 채워졌다. 구덩이처럼 보이는 곳도 모두 시체투성이였다. 참혹했다. 그 주검 가운데는 북한군이 남한에서 끌고 온 인사들이 모두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따라 후퇴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살해했을 것이다.
평양형무소는 규모가 꽤 크다. 그 큰 형무소에 갇혔던 수많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떠난 북한 수뇌부의 결정. 아마 그것은 그들이 지향하는 이념을 위해 자연스레 저지른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전쟁은 반드시 엄청난 피를 부른다. 국군도 전쟁 중에 피아(彼我)를 식별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 저지른 잘못이 없을 리 없다. 아군의 피해를 목격하고 흥분해 저지른 살상도 있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 전쟁이 벌어진 뒤에는 그렇게 나 아닌 남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이 자주 벌어졌다. 특히 해방 뒤 좌우로 갈라졌다가, 북한이 일으킨 전쟁으로 그 갈등의 골이 깊어진 경우가 그랬다. 이념적 지향이 다른 상대방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특히 그랬다. 피는 피의 보복을 끊임없이 불러들였고, 결국은 다시 처절하게 피를 흘리고 상대를 죽여야 하는 진흙탕 싸움으로 빠져 들어갔다.
정부와 군대가 나서서 조직적으로 벌이는 학살은 국군과 연합군에는 거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공산 북한군에 의해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나는 내가 자라면서, 그리고 머리가 여물어 내 생각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늘 관찰해 온 공산주의를 다시 한 번 느끼고 있었다. 늘 그들이 지닌 비(非)인간적인 속성을 경계했지만, 실제 형무소에 들어서서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처단한 그들의 잔인함을 다시 보자니 기가 막혀 왔다.
평양에서만 그런 광경이 나타났던 게 아니다. 북진했던 국군은 여러 곳에서 그런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다. 원산형무소도 그중 하나다. 나중에 남겨진 기록들을 보면 그곳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1950년 10월 중순 북진한 국군이 원산의 형무소에 들어섰을 때다. 900명이 채 안 되는 죄수 중 정치범은 550명 정도였다. 이들은 한자리에 5~6명씩 굵은 철사로 묶여 총살당한 채 발견됐다. 방공호 안에 가득 쌓여 있는 정치범들의 시체를 처음 본 사람은 자칫 실신할 뻔했다고 한다.
함흥의 형무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국군이 형무소 경내에 들어서 우물 속에 가득 차 있던 시체들을 꺼낼 때 그 물빛이 참혹한 핏빛으로 변해 있었음은 불문가지다. 학살당한 국군 포로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처치하기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때 북한은 국군이나 미군 포로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총을 들이댔던 것이다.
피는 반드시 피를 부른다. 민간에서 그런 일은 자주 벌어졌다. 남한이나 북한 전역에서 가족과 친지를 잃은 사람들이 상대에게 들이대는 저주와 폭력은 다반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통제돼야 한다. 정부와 군대 등 공권력은 그것을 통제하면서 체계적으로 포로와 죄수 등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 그래야 부질없이 사람의 목숨을 없애버리는 반(反)인류적 범죄를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무고한 생명을 빼앗는 일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권력을 지닌 정부와 군대는 그런 점에 하시라도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 특히 무기를 동원해 전쟁을 치르는 군대로서는 그런 점에 엄정한 군기(軍紀)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럼에도 북한의 정부와 군대는 이렇게 포로와 정치범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것이다. 그들의 속성에서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막상 평양형무소의 참상을 목격하고 나니 끝 모를 분노가 솟아올랐다.
그런 상념에만 빠져 있을 수 없었다. 전날 우리 1사단은 다시 평남 순천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평양에는 앞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반을 비롯한 고위 관계자, 그리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미군과 연합군의 고위층들이 방문할 것이다. 그와 관련된 모든 사항은 부사단장인 최영희 준장이 맡아서 처리할 예정이었다. 이곳을 찾는 한국 정부의 고위층에 대한 경호 문제와 행정적인 여러 가지 사항들은 모두 그의 손에 맡겼다. 사단장인 나는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미군은 공수부대를 그쪽에 투하한다는 계획이었다. 도주하는 적의 퇴로를 끊어 그들에게 붙잡힌 수많은 포로와 남한 인사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다. 우리 1사단은 그 뒤를 받쳐 줘야 한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미군 공수부대를 육상으로 치고 올라가 받쳐주면서 퇴로가 끊긴 적을 협공(挾攻)해야 하는 것이다. 그 작전이 성공하면 적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면서 그들에게 붙잡혀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아군 포로들을 구출할 수 있다. 길을 서둘러야 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4) 처참한 평양 형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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