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6) 만약 이곳에서 …
미 10군단의 이동경로
정신없이 길을 재촉했다. 내가 길을 서둘렀던 것은 하루라도 빨리 북진해서 수풍댐을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어느덧 여름의 기운이 다 가시고, 차가운 냉기가 느껴지던 무렵의 청천강을 건너갈 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1950년 10월 북진은 실패였다, 청천강서 교두보 쳤어야 …
이곳에 머물며 청천강 방어선으로 대한민국의 전선을 형성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점이었다. 나는 국군 1사단을 이끌고 전쟁 발발 뒤 정신없이 전선을 누빈 일선 사령관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내가 6·25전쟁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던 북진과 평양 입성, 나아가 압록강으로의 진격을 전체적인 전략의 판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젊은 혈기에 힘입어 넘어서던 청천강의 강변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청천강은 한반도에서 아주 중요한 전략 지역이다. 예로부터 이곳은 북쪽을 향해 뻗으려던 한반도의 역량이 숨을 고르던 지역이다. 청천강이 서쪽으로 바다를 향해 나가는 곳에는 안주(安州)가 있었고, 원산 북방에는 안변(安邊)이라는 곳이 있다. 모두 ‘편안할 안(安)’이라는 한자를 쓴다. 고려 때 이곳에는 장수(將帥)가 머물면서 거대한 병력을 지휘했다. 말하자면 안주와 안변을 잇는 전선은 한반도의 세력이 북방으로 나아가는 매우 중요한 군사 요충이었던 것이다.
북진 당시 전선을 청천강에 형성하는 것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다. 북한군이 무너지는 것을 여러 가지 정황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 구체적인 상황이 어떤지에 대한 정보는 당시에 없었다. 그 상황을 면밀히 점검해 본 다음에 침착한 소탕 작전을 펼치는 것이 더 완벽한 승리를 위한 전제는 아니었을까하는 점이다. 청천강이 천혜(天惠)의 방어선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했다.
이 강을 넘어 북상하면 험한 산골짜기에 들어선다. 그곳에 적이 저항선을 어떻게 펼쳐놓고 있을 것인지에 대한 감은 전혀 없는 상황이다. 이 작지 않은 강에 튼튼한 방어선을 구축한 다음에 적유령과 마천령 등 험한 산골에 대한 정찰을 마치고 그에 걸맞은 작전을 펼친다면 김일성의 잔적을 더욱 철저하게 몰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도 있었다.
다 나중에 듣고 본 결과에 따른 것이지만, 1950년 10월의 북진은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북한이 의존하는 또 다른 축, 중공군의 대거 개입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魔)가 끼어든다’는 말이 있다. 일이 잘 풀릴 때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성과를 거두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반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도쿄의 유엔총사령부에서는 여러 가지 판단상의 실수가 잇따랐다.
인천에 상륙했던 미 10군단은 다시 동해안 상륙을 노렸다. 인천 상륙부대의 하나였던 미 7사단 장병이 1950년 10월 동해안으로 우회해 북한의 이원에 도착한 뒤 상륙정에서 내리고 있다. 함께 우회했던 미해병사단은 원산항의 기뢰에 묶여 10여 일 동안 상륙이 지연됐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맥아더는 제2차 세계대전의 명장이자, 신생 대한민국을 공산주의의 적화(赤化) 기도에서 건져낸 영웅이다. 그러나 그의 자신감과 주변을 모두 압도하는 카리스마는 결국 미세한 판단 착오를 불러들였고, 종국에는 전쟁의 판도가 크게 바뀌는 패착으로 나타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맥아더 장군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이상한 패착 하나를 한국전쟁의 게임 판에 둔다. 인천상륙작전 뒤 미 10군단을 바로 북상시키지 않은 점이다. 그 점은 지금의 전사(戰史) 연구가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대목이다. 대신 그는 경부선을 이용해 미 10군단 예하의 7사단을 부산으로 보냈다. 해병 사단은 인천에서 배편으로 원산을 향하게 했다.
제2의 상륙작전을 위해서다. 원산과 그 이북을 목표로 한 작전이었다. 그로써 아군의 이동은 많은 지장을 초래했다. 경부선 철로로 미 7사단이 이동하면서 후방의 인원과 물자가 평양 입성 뒤 북진을 계속하고 있던 미 8군에 원활하게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천도 미 해병대의 제2 상륙작전을 위한 후속 움직임으로 역시 물자를 제대로 내릴 수 없었다.
미 10군단이 이런 작전을 포기하고, 그대로 북상했다면 북한 수뇌부는 더 힘든 상황에 빠져들었을지 모를 일이다. 중공군의 개입이야 나중에 현실화했지만, 그때까지는 중국 측은 참전 여부를 제대로 결정하지 못했을 시점이었다.
내 입장에서 보면, 맥아더 장군이 북진을 잠시 멈추고 청천강을 주저항선으로 구축한 다음에 그 이북을 노리는 것이 더 안전하면서도 장기적인 전략에 해당됐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역사의 가정에 불과하지만, 내가 전쟁 중에 참모총장으로 취임했을 때 들었던 큰 아쉬움이다.
아마 그런 여러 가지 상황이 내 마음속에 왠지 모를 불안감으로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청천강을 넘어서면서 이상한 생각에 잠시 마음이 불편해졌던 것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군대는 명령으로 움직인다. 그 명령에 따라 살고, 또 죽어야 한다.
전 단락이었던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에서도 나는 청천강을 넘어설 때의 느낌을 말한 적이 있다. 그랬다. 청천강을 넘어 영변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나는 막연하게 가졌던 불안감이 점점 구체화하는 느낌에 빠져들었다. 길은 적막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무슨 징조일까. 10월 말에 다가가면서 느껴지곤 했던 차가운 기운, 그것은 저 높은 적유령의 되너미 고개에 빽빽하게 숨어든 중공군의 기척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피를 머금은 전쟁의 구름은 그렇게 느낌으로도 먼저 다가올 때가 있는가 보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6) 만약 이곳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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