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5) 청천강의 차가운 강바람
1950년 10월 20일 평양 북방 숙천과 순천에 나타난 C-119 수송기에서 미군 공수부대원들이 낙하하고 있다. 김포에서 이륙해 평양 북방까지 날아온 미군의 C-119와 C-47 수송기는 4000여 명의 병력과 600t의 장비·보급품 등을 투하했다. C-119는 일명 ‘날아다니는 유개화물차’라는 뜻의 ‘플라잉 박스카’로 불렸다. 병력과 물자를 단시간 안에 지상으로 투하할 수 있도록 뒷부분에 문을 달았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제공]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의 첫 반격을 이끌어 낸 김점곤 12연대장에게 미군과의 연계작전이라는 중책을 맡겼다. 시간을 잘 맞춰야 하고 변하는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는 과감하면서도 통솔력이 매우 뛰어난 지휘관이다. 그 점에서 김점곤 연대장이 이번 연계작전의 적임자였다. 그를 앞세우고 우리는 평안남도 순천을 향해 진군할 준비를 마쳤다. 사단 사령부는 평안북도 영변의 농업학교에 세우기로 했다. 길을 재촉했다.
김포 → 평양 북방 공수작전 … 미군 4000명 북녘 하늘을 덮다
그러면서 언뜻 전쟁 포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평양에 입성하던 날인 1950년 10월 19일, 나는 우연한 장면을 목격했다. 우리 1사단 12연대가 막바지 공세를 펼치면서 평양 대동교 앞의 선교리 로터리에 진입할 때였다. 당시 상황은 급하게 돌아갔다. 적이 후퇴하고 있었지만, 잔여 적군 병력은 시내 곳곳의 건물 등에서 시가전으로 아군을 괴롭히고 있었다.
내 눈앞에서 부대를 지휘하던 소대장 하나가 갑자기 쓰러졌다. 저 멀리 있던 2층 건물 속에서 적군이 숨어서 쏜 총탄을 맞은 것이다. 대열이 갑자기 흩어졌다. 나도 긴장해야 했다. 시가전은 워낙 위험해 가려진 건물 속 어디에서 총탄이 날아들지 전혀 짐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부대원들은 신속하게 대응했다. 총탄이 날아온 곳을 향해 맹렬하게 반격을 퍼부었다.
소대장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병들은 흥분을 자제하지 못했다. 반격에 밀린 적군 병사들이 그 건물 속에서 투항하겠다는 뜻으로 손을 들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흥분한 아군 병사들은, 그러나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적군 병사들은 한두 명씩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있었다.
막강한 포병을 이끌고 우리 1사단을 지원하던 윌리엄 헤닉 제10고사포단장이 이 광경을 보고 있다가 막 소리를 쳐댔다. 내게 외치는 고함이었다. “백 사단장, 투항하는 적들에게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만약 이런 식으로 싸운다면 나는 한국군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그가 강력하게 항의했다.
투항하는 적은 보호해야 한다. 나는 내 휘하의 소대장이 적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상황에서 잠시 그 점을 잊었던 것 같다. 헤닉의 지적은 천 번, 만 번 강조해도 틀리지 않았다. 나는 급히 부대원들을 제지했다. “사격을 멈추라”고 명령했다. 총격은 멎었다. 그러나 사병들의 얼굴에는 원망과 불만이 가득했다. 어느 한 병사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사단장님, 저놈들이 우리 소대장을 쐈는데 그만 놔두라는 겁니까”라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그를 감독하는 사람은 없다. 억울하면 억울한 대로 그 정서를 표출하는 경우가 많다. 총을 쥔 사람에게, 더구나 억울함이 가득한 병사에게 자제를 권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살릴 수 있는 생명을 그저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만행(蠻行)에 다름 아니다. 나는 그 점을 다시 깨달았다. 헤닉의 지적이 있었던 그 현장에서 나는 전 부대원들에게 “투항하는 적에게는 절대 사격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는 순천으로 향하는 길에서 수많은 적군 포로를 봤다. 아군 트럭이 올라가 신원을 확인한 뒤 데리고 오는 북한군 포로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빈 트럭으로 올라간 아군 트럭은 짐칸 전체 가득 북한군 포로들을 싣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왔다. 다른 저항도 없었다. 민간 복장으로 갈아입은 포로들은 한결같이 전투를 모두 포기하고, 그곳에 도착한 아군 트럭에 아무 말 없이 올라타 남쪽으로 내려왔다.
김일성의 군대는 그렇게 완전히 붕괴하고 있었다. 전의(戰意)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북한군 포로들이었다. 그렇게 많이 밀려드는 북한군 포로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면서 수용소가 있는 곳으로 보내는 게 내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10월 20일 정오에 김포 비행장을 떠난 미군의 공정(空挺)부대는 두 시간 후에 평양 북방 56㎞인 평남 숙천과 서북방 60㎞인 순천에 4000여 명의 대원을 투하했다. 새카맣게 떨어지는 공정부대원들의 낙하산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작전에는 90㎜ 대전차포, 105㎜ 포 17문과 1000여 발의 포탄까지 투하했다. 105㎜ 포를 낙하산으로 투하한 것은 세계 최초라고 들었다.
순천으로 진군한 우리 1사단과 숙천으로 올라간 영국 27여단은 때맞춰 연계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예상했던 적군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전과는 미미했다. 적이 미처 데려가지 못한 미군 포로들을 다수 구출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숙천 쪽에서는 영국 27여단이 연대 규모의 적군을 만나 완전히 소탕했다고 들었다.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사단 CP가 차려진 영변 농업학교에 도착했다. 빨리 북진하는 게 목표였다. 목표는 수풍댐이었다. 그곳으로 진출하면 김일성과 그 군대를 이 땅에서 쫓아낼 수 있는 것이다.
사단 CP가 있는 영변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 1사단 선두 병력은 길고 긴 트럭 행렬에 올라타 강을 넘었다. 청천강이었다. 저녁이 다가오는 무렵이었다. 한기(寒氣)가 느껴졌다. 이 강을 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곧 북진 작전을 완수해 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을까. 평양에 입성해 잠을 못 이루던 첫날 밤의 생각이 떠올랐다. 북한군은 이렇게 무너져 사라지는 것일까. 뭔가 개운치 않은 생각,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청천강의 차가운 기운과 함께 나를 엄습해 왔다.
정리=유광종 기자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5) 청천강의 차가운 강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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