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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 주자성리학의 천국에 천주교 상륙

드무2 2021. 8. 28.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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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 주자성리학의 천국에 천주교 상륙

 

 

 

 

 

 

『한국 사람 만들기』  I, II, III         함재봉 著

 

 

 

2020년 1월 18일 방송

 

 

 

천주교의 도전

 

● 천주교가 종교로서 받아들여진 것은 1779년 겨울에 경기도 광주에 있는 천진암에서 권철신의 제자인 이벽,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권일신 등을 중심으로 천주교 서적 강학회가 열린게 시초

● 이벽은 1783년(정조 8년) 이승훈이 계묘년(1783)에 부친을 따라 베이징에 가게 되자 세례를 받고 올 것을 부탁

 

"이벽이 비밀리에 부탁하며 말하기를 베이징에는 천주당이 있고, 천주당에는 서양전도사가 있을 것이네. 자네가 방문해서 신경(信經)한 부를 달라고 하고 세례 받기를 청하면, 전도사는 아주 사랑해줄 것일세. 진귀한 물건을 많이 받아 필히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네."

 

- 황서영 백서

 

 

 

이승훈의 세례

 

우리는 신의 영광을 입었을 한 남성의 개종 사실을 위안의 말로 보고한다. 그 남성의 나라는 아직 선교사가 방문한 적이 없는 조선이라는 곳인데 중국 동쪽에 잇는 반도이다. 이 나라는 매년 종주국인 중국에 사절을 파견한다. (···) 작년 말에 사절이 입경했는데 일행이 우리를 방문했기에 포교서를 나누어주었다. 일행 중 대관의 자식으로 아주 학식 있고 쾌활한 27세의 그 청년은 정말 마음으로부터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세례 전에 우리는 그가 만족할 때까지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또 우리는 국왕이 그의 행위를 죄악시하여 국법에 저촉된다고 하였을 경우의 결심을 확인했는데, 그는 결연히 진리라고 확신하는 종교를 위해서는 어떠한 고통도 죽음도 참고 견디겠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종법의 순결을 설명하고 다처제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는데, 그는 한 명의 정부인만을 두고 앞으로는 첩을 두는 일을 결코 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결국 귀국 직전에 교부의 허가를 얻어 그라몽 사제가 대부가 되고 베드로라는 성명을 주어 세례를 마쳤다.

 

 

 

청과 교황청의 제례논쟁

 

교황 클레멘트 11세

 

1715년 3월 19일의 칙령 : 제사금지

 

 

 

강희제

 

"이 포고령을 읽고 보니 이 야만스러운 서양인들이 어떻게 중국의 위대한 철학적, 도덕적 원칙들에 대해 감히 언급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 그들의 주장과 논리는 우스꽝스럽다. 이 포고령을 보니 나는 이들의 교리가 불교나 도교와 같이 형편없는 이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 이들은 너무나도 앞뒤가 안 맞는다. 나는 지금부터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교리를 중국 내에서 선교하는 것을 금한다. 그래야 앞으로 골치 아픈 일들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사대부의 제사 거부

 

서양의 간특한 설이 언제부터 나왔으며 누구를 통해 전해진 것인지 모르겠으나,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속이며 윤리와 강상을 없애고 어지럽히는 것이 어찌 진산의 원상연 윤지충 양적과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제사를 폐지하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위패를 불태우고 조문을 거절하는 것으로도 그치지 않고 그 부모의 시신을 내버렸으니, 그 죄악을 따져보자면 어찌 하루라도 이 하늘과 땅 사이에 그대로 용납해 둘 수 있겠습니까?

 

- 사헌부 지평 한영규의 상소 중에서 -

 

 

 

"우리는 저 방대한 제국의 정치체제를 무신론으로 비난하는 바로 그 행위와 함께 그들을 우상숭배로 비난할 만큼 경박했다. 이것은 자체 모순이다. 중국인들의 전례에 대한 커다란 오해는 우리 자신의 관습을 기준으로 그들의 관습을 판단함으로써 야기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편견과 언쟁하기 좋아하는 정신을 가지고서 극동에까지 갔다. 중국인들 사이에 일상적인 인사인, 무릎 꿇고 하는 절을 우리는 경배 행위로 간주한다." (볼테르, 1694~1778)

 

 

 

신유박해(1801)

 

황사영 백서(1801)

 

 

 

기해박해(1839)와 프랑스함대의 출현

 

세실 제독

(Jean-Baptiste Cécille, 1787~1873)

 

 

 

조선의 이념적 통합성 붕괴 시작

 

- 유례없는 "자기포교" / "자기선교"

- 주자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의 이념적 합의와 기초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사상적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계기

 

 

 

베이징 함락의 충격

 

아편전쟁(1차 : 1839~1842, 2차 : 1856~1860)

 

일본개국(1854)

 

 

 

이항로의 서양관과 척사사상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 / 정조 6~고종 5)

 

"서양을 천지 대세로 말하면 서극의 숙살한 편기요, 수국의 인갑과 동일한 유이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성품은 생을 가벼이 하고 죽음을 즐거워하며 그들의 음은 利를 좋아하고 義理를 어둡게 하며, 그들의 術은 환영을 기뻐하고 常道를 싫어한다."

 

"北虜(북노 : 북쪽 오랑캐)는 이적인지라 오히려 말할 수나 있지만 西洋은 금수인지라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華西集』

 

함재봉, 『한국 사람 만들기 I』, (서울 : 아산서원, 2017), p. 340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년 8월 20일 ~ 30일)

 

 

대동강변 제너럴 셔먼호가 격침되었던 자리에 전시된 푸에블로호 : 1968년 1월 23일 원산 인근 공해상에서 납북됨

 

 

 

신미양요(1871)

 

광성보 전투에서 수거한 조선장수 깃발 "수자기"를 걸어 놓고 기념 촬영한 미 해군

 

USS 콜로라도호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장교들

 

전멸한 광성보의 조선군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서양의 오랑캐가 침범해 오매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맺자는 것이요. 화친을 맺자는 것은 곧 매국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1820~1898 / 집권 : 1863~1873)

 

척화비

 

양헌수 승전비(1873)

 

 

 

왕도정치 대 부국강병론

 

● 왕도정치란 무엇인가?

● 부국강병론이란 무엇인가?

 

 

 

위정척사파의 승리와 대원군의 하야

 

● 청전 유통금지와 조정 재정의 파탄

● 1876년 강화도조약 : 위정척사파와 고종의 결별

 

 

 

https://www.youtube.com/watch?v=ZEZ7DAfGr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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