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좋은 글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수선화가 있는 달력]

드무2 2026. 2. 5.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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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가 있는 달력]

 

 

 

 

 

 

수선화가 있는 달력

 

 

나의 친구

고독사 전에도 고독했고

고독사 후에도 고독하다

애너벨 리처럼 싸늘하게 죽었다

 

그 방에 찢어진 달력이 신문지와 함께

뒹굴고 있었는데

막상 벽에 걸린 달력에는

샛노란 수선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3월, March라고 또렷하게 쓰여 있었다

 

노란 수선화

노란 프리지어

우리는 3월의 봄꽃을 좋아했지

차가운 대지를 쭗고 총알처럼 올라오는 샛노란 꽃들

냉수 속에 몸을 떠는 노란 새싹들

 

가난과 고독이 산을 이루는 동안

친구는 홀로 달력 밖으로 길을 나섰네

 

수선화는 꽃샘바람에 시달리며 피는 꽃

몰려오는 찬 바람을 두 팔로 밀치며 피어나지

영하 50도의 불꽃처럼

 

확실히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우리는

고독사한 친구의 고독을 새로 가지게 된 것이다

영하 50도의 불꽃을 지닌 수선화로 함께 피어나는 것이다

수선화가 돌을 키우는 그런 평생이 있다

 

김승희 (1952 ~)

 

 


제주에는 수선화가 피었다. 세계가 얼음의 덩어리 속에 갇혀있는 듯하지만, 언 땅 위에 돌담 아래에 수선화는 피었다. 눈보라가 벌떼처럼 휘몰아칠 때에도, 빛이 수정 (水晶)처럼 밝을 때에도 수선화는 맑고 고요한 자태로 냉기에 휩싸인 이 세계를 가만히 바라본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에 수선화를 좋아하여 “한 점의 겨울이 송이송이 동그렇게 피어나더니” 라고 읊은 뜻을 짐작할 만하다. 수선화를 들여다보니 아침에 빈 가지에 앉아 울던, 추운 새의 영롱한 울음소리가 한 번 더 들려오는 것 같다.

김승희 시인은 이 시에서 겨울 절기와도 같은 가난과 고독의 한가운데에서 핀, “총알처럼” 올라온 수선화를 노래한다. 모질게 시달렸지만 생명의 힘찬 의지로 밀치고 밀치며 불꽃처럼 피어난 수선화를 응시한다. 다른 시에서는 비록 아프더라도 “저절로 나을 때까지 아파야 그것이 봄이다” 라고 썼는데, 한기 (寒氣)가 가혹하니 이 고비가 지나면 저절로 나을 날이 올 것이다.

 

 

문태준 시인

 

 

 

[출처 : 조선일보 2026년 1월26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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