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생존]

일러스트 = 이진영
생존
촛불 하나 켜 놓는다는 것
묘비명에 꽃 한 송이 꽂는다는 것
어둠의 집을 허물고
분홍의 소리들로 가득찬 집을 짓는다는 것
방비 없이 당해버린 말과 소에
초원의 풀밭을 준다는 것
어긋나게 죽은 사랑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
헛으로 지은 슬픈 한줌의 빈 묘를 짓는다는 것
춥고 배고팠으니
묘연한 산 사람들을 위한 밥을 지어주자는 것
ㅡ 허영선 (1957 ~ )
제주 4 · 3 사건이 일어난 지 올해로 78주년을 맞았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행방불명되었다. 허영선 시인이 4 · 3 당시의 일을 기록한 시집을 최근 펴내서 요 며칠 읽었다. “천둥의 밤을 건너온 사람들” 의 증언을 담은 시집이었다. 특히 비참한 그날을 건너온 아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함께 담았는데, 일례로 조천읍 북촌의, 4 · 3으로 부모를 잃은 “10살 미만 상주들” 인 아이들이 곡 (哭)하는 소리를 내라고 하니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을 몰라서, “곡곡” 했다는 이야기는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실감하게 한다.
이 시는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추모와 진혼의 일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 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묘비에 꽃을 바치고, 이루진 못한 사랑이 이루어지길 빌고, 쌀을 씻어 흰 밥을 고이 지어서 올리는 일 등이다. 제주의 한 시인은 제주의 “사월은 가난보다 맵” 다고 썼다. 사람의 존엄과 세계의 평화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문태준시인
[출처 : 조선일보 2026년 3월 30일 자]

728x90
'詩, 좋은 글 ... >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매미가 운다] (0) | 2026.04.08 |
|---|---|
| [이슬의 하루] (0) | 2026.04.02 |
| [무량리] (0) | 2026.04.01 |
| [나의 꿈] (0) | 2026.04.01 |
| [모국어] (0) | 2026.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