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기념관 등

[대한민국역사박물관 ㅡ 역사관] 04

드무2 2023. 3. 15.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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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 ㅡ 역사관] 04

 

 

 

 

 

 

 

해외 민족운동

 

 

 

 

 

 

해외 이주와 민족운동

많은 한국인이 고국을 떠났다. 가난과 차별, 억압과 모멸 그리고 동경과 희망 등 자신 만의 사연을 안고 낯선 곳에 정착해 살아갔다. 조국을 잃어 보호 받지 못하였으나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며 새로운 삶을 개척해 갔다. 또한 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고,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길러 냈다.

 

 

 

 

 

 

 

 

 

 

 

 

강용흘의 시민권 취득을 위한 편지

강용흘의 미국시민권 취득 청원위원회 참가자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931년 미국에서 출판된 강용흘의 소설 '초당'은 10개 국어로 번역되어 한국의 역사와 전통, 일제의 폭력성과 한국인의 저항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안재창, 안유순의 미국 거주 한인 증명서

태평양전쟁 시기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외견상 일본인과 구분되지 않는 한인을 보호하기 위해 발급한 증명서이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1941년 미주 한인 단체들의 연합으로 결성되었다. 안유순은 안재창의 부인이다.

 

 

 

 

 

 

 

 

 

 

 

 

 

 

 

 

 

 

김기원, 노영재, 김덕목의 충칭시 신분증

등록문화재 데550호

 

중화민국 충칭시에서 발급한 신분증이다. 김기원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김봉준의 또 다른 이름이다. 노영재와 김덕목은 그의 부인과 아들이다. 직업 칸에 김기원은 한국독립운동으로, 김덕목은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로 적혀 있다.

 

 

 

 

 

 

 

 

 

 

 

 

 

 

 

만주국 거주증명서

강덕 11년, 곧 1944년 만주국 영길현 풍만경찰서장이 국본복남에게 발급한 거주증명서이다. 강덕은 만주국이 사용한 연호이다. 국본복남은 창씨명으로 보이고, 그의 본적 또는 출생지는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면 해전리이다.

 

 

 

 

 

 

마츠모토 나가오카의 신분증명서

1941년 전라북도 정읍경찰서에서 발급한 신분증명서이다. 마츠모토 나가오카는 박판술의 창씨명이다. '도쿄 호세이대학 공업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도항함'이라는 문구를 볼 때 일본으로 건너갈 때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 만주 ●

남자현 1872년 12월 7일 ~ 1933년 8월 22일 (음력)

3 · 1운동 이후 서간도 류히현 삼원보로 망명해 서로군정서에 참여하고, 이후 정의부에서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 후원 그리고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33년 주만 일본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 육군대장을 폭살하려다가 체포되어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 몽골 ●

이태준 1883년 11월 21일 ~ 1921년 2월

1911년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허고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어의로 활동하였다.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는 김규식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가 제공한 독립운동 자금을 운반하다가 러시아 반혁명군에 피살되었다.

 

 

 

 

 

 

● 유럽 ●

서영해 1902년 ~ ?

1929년 프랑스 파리에 고려 통신사를 설립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주프랑스 특파위원, 파리통신원, 주프랑스 예정대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국제연맹회의, 만국평화회의 등에 참가해 한인의 항일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독립을 호소하였다.

 

 

 

 

 

 

● 중국 ●

이동녕 1869년 10월 6일 ~ 1940년 3월 13일

1897년 독립협회, 1907년 신민회에 참여하였고, 1910년대 서간도와 북간도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활동하였다. 1919년 만주에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40년 사망하기까지 활동하였다.

 

 

 

 

 

 

● 대만 ●

조명하 1905년 4월 8일 ~ 1928년 10월 10일 (음력)

타이완의 타이중으로 이주하여 찻집에서 일하던 중 1928년 5월 타이중에 온 육군대장 쿠니노미야 쿠니히코를 처단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 일본 ●

김문준 1894년 2월 10일 ~ 1936년 2월 22일

일본에서 1929년 신간회 오사카지회 검사위원장으로,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 산하 오사카조선노동조합에서 활동하며 한인 노동자의 권익 향상에 힘쓰다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민중시보』를 발간해 한인 노동자의 계몽과 생활권 보장을 위해 활동하였다.

 

 

 

 

 

 

● 연해주 ●

최재형 1860년 8월 15일 ~ 1920년 4월 7일

노비 출신으로 러시아에 귀화한 뒤 1880년부터 1920년까지 연해주 지역 한인을 도와준 페치카, 곧 난로와 같은 인물이다. 동의회의 설립자, 권업회의 총재, 대한민국의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였다.

 

 

 

 

 

 

● 연해주 ●

문창범 1870년 ~ 1934년 10월 10일

연해주에서 교육과 언론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1911년 권업회를 조직해 한인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였다. 1917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 회장, 1919년 대한민국의회의 의장에 선임되었다. 임시정부의 통합 그리고 변혁을 위해 활동하였다.

 

 

 

 

 

 

● 연해주 ●

김 알렉산드라 1885년 2월 22일 ~ 1918년 9월

1910년대 한인노동자의 권익 보호에 노력하였으며, 이동휘 등과 함께 최초의 한인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하였다. 연해주에 출병한 일본군 병사를 상대로 반제반전 사업을 전개하고, 러시아 반혁명군과 투쟁하다가 사망하였다.

 

 

 

 

 

 

● 미주 ●

임천택 1903년 3월 19일 ~ 1985년 9월 6일

멕시코와 쿠바로 이민하여 살면서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한인에 대한 교육활동에 힘썼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제공하였다. 그의 아들 임은조 (헤르니모)는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에 참여하였다.

 

 

 

 

 

 

● 미주 ●

차인재 1895년 4월 26일 ~ 1971년 4월 7일

1919년 3 · 1운동 후 수원에서 혈복단과 구국민단을 조직하였다. 1920년 도미하여 캘리포니아주 맥스웰과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와 대한여자애국간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자금의 모집과 민족의식 고취 등을 위해 활동하였다.

 

 

 

 

 

 

독립신문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 역할을 한 신문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1919년부터 1926년까지 국한문으로 발간된 신문 가운데 일부 기사를 선택해 원문과 풀어쓴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상해판 독립신문 창간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 역할을 한 신문으로 1919년 8월 21일 창간하여 1926년 11월 30일 198호까지 국한문으로 발행되었다. 독립협회의 독립신문과 구분하기 위해 상해판 독립신문이라고도 부른다. 신문의 제호는 '獨立 독립'에서 '獨立新聞 독립신문', '독립신문'으로 변경되었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조선인 교육은 조선인 본위 本位!!!

산업은 조선인 본위 本位로!!!

6 · 10투쟁특별위원회의 전단에서, 1926년

 

 

 

근우회 창립 총회 YMCA

 

 

 

 

 

 

우리의 앞길이 여하히 험악할지라도

우리는 일천만 자매의 힘으로써

우리의 역사적 임무를 이행하려 한다.

여성은 벌써 약자가 아니다.

여성은 스스로 해방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자.

근우회 선언 중에서, 1927년 7월

 

 

 

신간회 창립 1주년 기념 신의주 지회 / 신간회기념사업회

 

 

 

 

 

 

우리는 정치적 ·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신간회 강령, 1927년 1월 발표

 

 

 

순종 국장 행렬 <순종국장기념사진첩>

 

 

 

국내의 민족운동

3 · 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통치의 안정을 위해 제한적으로 언론 · 출판 · 집회 ·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한국인은 검열과 삭제, 집회 해산과 불허가 반복되는 가운데 체포와 고문으로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의열투쟁과 대중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에서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한글과 한국사 연구를 힘겹게 이어갔다.

 

 

 

 

 

 

 

 

 

전조선청년당대회 대표자 출석기념

1923년 3월 24일부터 29까지 열린 청년대회 사진이다. 좌우 망라의 93개 조직 260명 대표가 참가해 여성, 교육, 종교, 경제, 노동, 사회, 청년회, 민족 문제에 대해 결의했으나, 조선총독부는 곧 대회를 해산시켰다.

 

 

 

 

 

 

 

 

 

조선청년총동맹 창립 기념

1924년 4월 21일 223개 단체가 참여한 창립총회 사진이다. 조선청년총동맹의 설립은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사회주의자들이 청년운동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했음을 보여준다. 총독부는 창립과 동시에 집회를 금지시켰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훈시

3 · 1운동을 계기로 부임한 3대 총독이 처음으로 한 훈시 내용이다. '일시동인' 곧 한국인의 일본인화를 통치방침으로 밝히고 있다. 이른바 문화통치의 시작이었다.

 

 

 

 

 

 

 

 

 

나석주 폭탄투척 기사

의열단원 나석주가 1926년 12월 28일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총격을 가한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이다. 조선총독부의 보도 통제로 다음해 1월 13일에야 기사화되었으나 이 마저도 일부 기사가 검열로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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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재판 기사

조선공산당 1차, 2차 검거 관련자 99명의 예심 종결에 관한 1927년 4월 3일 자 기사이다. 이들의 혐의는 '제국의 기반 이탈과 사유재산제도 부인'이었다. 옥중에서 고문으로 4명이 사망했고, 피고인들이 이를 폭로하며 고문 경찰을 고소하지만 불기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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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청년단체 합동선언

대구청년단체 합동 전권위원회가 1927년 7월 24일 합동대회 개최를 알리고 있다. 대회에서 대구청년회, 아구청년동맹, 무산청년동맹, 청년동맹의 합동으로 대구청년동맹이 결성되고 당시 대구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해 갔다.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총회 안내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준비위원회가 대구지회 설립총회를 알리고 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1927년 2월 설립한 신간회는 각 지역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아 같은 해 말에 지회 100개 설립을 돌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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