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역사박물관 ㅡ 역사관] 05
검열받은 중외일보
1907년 신문지법에 의해 검열당국은 신문발행 전에 신문사가 제출한 내용을 검열하였다. 왼쪽 검열본에는 검열의 흔적이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 신문은 검열 후 발행된 것으로 기사 삭제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어학회 표준어 사정위원 / 한글학회
조선인은 차선적인 최선,
아니 최선의 차선책으로···
조선문화운동에로!
조선문화에 정진하자!
조선학을 천명하자!
안재홍, "조선과 문화운동", <신조선> (1935)에서
마친보람
초기 한글학회의 교육기관인 한글배곧에서 고등과를 졸업한 황선운에게 준 증서이다. 한글학자 주시경의 영향으로 한글의 초 · 중 · 종성을 모아쓰지 않고 가로로 풀어 쓰고 있다.
<한글> 창간호
우리말과 글에 대한 연구와 교육, 보급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어학회의 기관지이다. 1932년 창간되었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조선어학회는 해방 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용계수법>
동아일보사가 '브나로드 운동'을 위해 1934년 발행한 산수 교재이다. 동아일보사가 내건 브나로드는 '농민 속으로'라는 뜻이고, 1930년대 초반 문자 보급을 중심으로 진행된 농촌계몽운동이다.
<조선사론 · 조선사연구초>
신채호가 감옥에서 쓴 '조선사'의 총론을 사후인 1946년에 발행한 책이다. 뒤에 덧붙여 제본된 <조선사연구초>는 감옥에 있던 1929년에 발간되었다. 신채호는 독립운동이 어려울 때마다 한국사 연구에 더욱 매진했다고 한다.
<조선사연구>
정인보가 1935년과 1936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1946년에 간행한 책이다. 일본의 식민지 학술 활동에 대항해 1930년대 전개된 조선학 운동에서 정인보는 안재홍과 함께 주도적 역할을 했다.
경제 구조의 변화와 민의 삶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 지배와 팽창을 위해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고 식민 도시를 확대하였다. 또한 자금을 동원하고 배분하여 처음에는 농업을, 이후에는 공업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책과 시장의 변화에 잘 적응한 지주와 기업은 성장해 갔다. 반면 대다수 한국인은 소작인과 노동자로서 궁핍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13
미국 포드자동차 이동조립 공정으로 대량생산 체제 구축
1913
독일 질소비료 대량 생산 공정 개발
1918
일본 쌀값 폭등으로 폭동 발생
1919
1918년부터 스페인 독감 대유행으로 세계 전역에서 5천만 명 사망
1928
소련 국가 주도 경제개발 제1차 5개년 계획 착수
1929
주가 대폭락으로 미국 대공황 시작
1933
미국 대공황 극복을 위한 뉴딜 정책 시작
식민 도시의 등장
식민 도시가 부상하면서 전통 도시의 위상은 떨어졌다. 식민지 지배와 팽창을 위해 일본과 한국 그리고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항구와 철도 및 도로가 건설되고 군사기지가 설치되었다. 일본인은 그 연결망의 거점에 이주해 도시를 성장시켰다. 도시 안에서도 일본인이 모여 사는 곳에 행정기관이 설치되고 개발이 선행되면서 차별적인 식민 도시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조선교통전도
경술 국치 직후인 1910년 10월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가 발행한 지도이다. 일본인이 거주하는 주요 시가지 지도가 배치되어 있다. 좌측에 평양, 경성, 용산, 인천, 우측에 원산, 목포, 진남포, 부산의 시가지이다.
일본 철도노선도 부채
부채의 가운데에 일본의 철도노선이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다. 그 주변에 일본의 식민지인 대만, 조선, 사할린 그리고 만주의 철도노선이 검은 색으로 그려져 있다.
조선철도 시간표
조선총독부 교통국에서 1944년 발행한 조선철도 시간표이다.
금강산 여행안내 소책자
조선총독부 철도국 발행으로 요시다 하츠사부로의 조감도가 실려 있다. 그는 식민지를 조감도로 그릴 때 일본을 함께 표현하여 일본의 식민지 임을 드러냈다. 금강산 조감도에서도 좌측 상단에 시모노세키 下關가 그려져 있다.
전통도시 읍치
조선은 지방행정 중심지인 읍치 (邑治)에 바탕을 두고 전국을 통치하였다. 조선 팔도의 명칭도 각 지방의 대표 읍치 두 곳을 합쳐 만들어진 것이다. 읍치는 풍수지리상의 요지에 입지하여 배산임수의 읍치는 풍수지리상의 요지에 입지하여 배산임수의 지형적 특성을 띠고 있었고, 읍성을 두고 있었다. 조선 팔도의 교통망은 한성에서 팔도의 각 읍치를 연결하여 이뤄졌다. 하지만 전국의 읍성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거의 모두 헐렸고, 지금은 성내리, 성내동 같은 마을 지명으로만 흔적이 남아 있다.
일제 식민 도시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지방 중심 도시를 전면 개편하였다. 일제는 철도망과 항로를 통해 대륙과 열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를 새로운 지역 거점지로 개발하기 위해 가급적 토착 조선인들의 전통도시를 배제하고 일본인 이주민들이 주도하는 신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 서울, 평양, 대구만 조선 시대 행정 중심지를 이어 갔고, 아홉개 도시가 신흥 항구도시로 개발되었다. 한 도시 안에서도 옛 중심지 인근에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신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중심과 주변이 역전되었다. 1930년대 일제는 병참기지화 전략에 따라 전국 곳곳에 공업도시와 군사도시를 지역별로 확대하였다.
초기 식민 도시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도시체계는 일제의 식민화 전략에 따라 개편되었다. 식민화 초기인 1914년 전국에 오늘날의 '시'에 해당하는 부 (府)가 12개 지정되엇다. 이들 중 전통도시, 곧 읍치에 해당하는 것은 단 3개 (경성, 대구, 평양) 뿐이고, 9개 (인천, 군산, 목포, 마산, 부산, 원산, 청진, 신의주, 진남포)는 신도시이자 항구도시였다. 이는 일제가 조선시대 지역 중심지는 가급적 배제하고 일본인 주도하에 새롭게 형성괸 지역을 도시로 발전시켰음을 보여준다. 이밖에 진해, 나남과 같이 군사도시로 개발된 곳도 있었다.
용산 일본군병영
용산 주차군사령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일의정서에 따라 용산에 일본군 기지를 만들었다. 용산 일본군 기지는 1906 ~ 1908년에 지어졌으며, 조선에 주둔한 조선군의 사령부와 20사단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위 사진은 조선군 사령부 건물로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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