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⑩ 11월 말 공격 그리고 후퇴, 후퇴

드무2 2021. 5. 2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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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⑩ 11월 말 공격 그리고 후퇴, 후퇴

 

 

 

국군 1사단이 1950년 10월 평양으로 진격할 당시 백선엽 사단장(가운데)이 미 공군연락장교로 와 있던 윌리엄 메듀스 대위(오른쪽)와 작전을 논의하고 있다. 박천에서 중공군의 저격을 당했던 메듀스 대위는 후일 미 공군참모차장(대장)에 올랐다. [백선엽 장군 제공]

 

 

 

갑자기 총탄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직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옆에 있던 미군 공군연락장교 윌리엄 메듀스 대위가 가슴을 부여안더니 쓰러졌다. 1950년 11월 하순의 일이다.


“밀리면 끝” 단내 나도록 독려 … 뚫릴 뻔한 전선 사흘간 버텨

 

 

평안남도 입석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전력까지 보충했던 국군1사단 병력을 이끌고 청천강을 건너 평안북도 남부의 박천을 지나 태천을 향해 다시 북진하던 중이었다. 박천과 태천 사이에 우리 사단의 2개 연대가 올라가 있었고 나는 그 인근의 작은 구릉에 만든 전방지휘소에서 전선 병력을 지휘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날아온 총탄에 메듀스 대위가 쓰러지자 나는 얼른 내 지프를 불러 그를 후송토록 했다. 피투성이가 된 그는 평양의 미군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다. 흉부 관통상이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그는 나중에 미 공군 대장까지 올랐다.



입석에서 태천을 향해 다시 진군을 시작한 것은 11월 24일이다. 총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미 1군단은 여전히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담당했다. 담당지역에 변화가 있었다. 미 1군단 동쪽인 영변과 개천에서는 남쪽에서 올라온 미 9군단 휘하의 2사단과 25사단이 공격을 담당했다. 그 동쪽인 덕천과 영원에서는 국군 2군단이 작전을 맡았다.



국군1사단이 태천을 향해 진군할 때에는 적의 저항이 거의 없었다. 이 상태로라면 공격 최종 목표지점인 수풍까지 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박천을 지나는 도중 매복해 있던 중공군이 내가 있던 쪽을 향해 사격을 가한 것이다.



중공군의 공격은 이튿날 불을 뿜었다. 전면적으로 치고 내려오는 대규모 공세였다. 전방이 다급해졌다. 전선을 담당한 2개 연대가 조금씩 밀리는 기색을 보이더니 점차 무너져가는 양상까지 드러냈다. 작전 중 지휘관이 반드시 피해야 할 게 있다. 분산(分散)이다. 부대가 흩어져 전력을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다. 일단 분산되기 시작한 부대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일사천리(一瀉千里)’라는 말이 있다. 한 번 물꼬를 넘어 흐르기 시작한 물이 거센 흐름을 형성하며 둑을 무너뜨리고 천리까지 그 기세를 한꺼번에 확장하는 것과 같다. 1사단의 상황이 거센 물길 앞에 선 작은 모래 더미처럼 보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구릉과 구릉 사이로 연대와 대대 등이 작전을 펼치고 있는 지점에서 1사단 병력 일부가 다급히 후퇴를 하는 장면이 내 눈에 들어왔다. 분산의 뚜렷한 징조였다. 나는 뛰었다. 구릉이라서 지프를 몰 수도 없는 지형이었다. 당시 상황이 하도 다급해 지금은 어느 연대가 앞에 섰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연대본부와 대대본부 등을 닥치는 대로 찾아다니면서 지휘관들을 다그쳤다. “당신들 이러면 못 써.” “이러면 우린 끝이야.” “야, 이 사람아 밀리면 안 돼.” “빨리 앞으로 나가!” 내 입에서 나왔던 말들이다. 정신없이 반나절을 뛰어다녔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숨을 헉헉거리면서 부대와 부대 사이를 오가며 독전을 했다.



다행히 뒤로 밀리는 상황이 멈췄다. 전선의 두 연대가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입석에서 정비한 탄약과 무기를 사용해 적의 공세를 막아내기 시작했다. 후방에 포진한 윌리엄 헤닉의 미 10고사포단이 해주는 지원 사격도 충분히 몫을 했다. 이렇게 사흘인가를 버텼다.



11월 24일 취한 아군의 공격은 이른바 ‘크리스마스 대공세’의 일환이었다. 도쿄에서 한국전을 총지휘하는 유엔군 사령부는 이번 공세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 연합군과 미군 모두 1950년의 크리스마스를 고향에 돌아가 맞을 수 있다는 믿음에 차 있었다. 그렇기에 미군과 연합군의 상황 대처는 곳곳에서 허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충분히 적전(敵前) 상황을 침착하게 헤아리기에는 마음이 너무 들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방심은 참화(慘禍)로 이어진다. 우리 앞에 곧 닥칠 참담한 결과를 확인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마음을 풀어헤쳐 상황을 그릇되게 판단하는 자에게 닥치는 운명은 매우 가혹했다.



국군1사단이 배속된 미 1군단의 상황은 괜찮았다. 1사단은 박천에서 후퇴해 영유란 곳에 도착해 엄호부대(covering force) 역할을 하고, 박천과 태천 사이의 전선은 미 24사단이 다시 침착하게 방어를 하면서 차츰 아래쪽으로 후퇴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지연과 후퇴를 번갈아 하는 식이었다. 미 1군단은 이 덕분에 전 병력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 후퇴할 수 있었다. 문제는 1군단의 동쪽, 한 달 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운산의 바로 남쪽에 있던 영변 교두보였다. 불길한 적막감이 감돌았던 그 운산의 남쪽에서는 벌써 피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계속>

[출처: 중앙일보]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⑩ 11월 말 공격 그리고 후퇴, 후퇴

 

 

 

[전쟁사 돋보기] 파비우스 전술

 

 

 

1950년 11월 국군과 유엔군이 평안북도에서 중공군을 맞아 사용한 전술은 지연전이었다. 30만 병력의 중공군 남하를 최대한 지연시키는 전법이었다. 군사작전에서는 지연전을 후퇴작전의 한 종류로 친다. 후퇴작전은 다음의 작전을 위해 부대를 후방으로 이동시키거나 적의 앞에서 조직적으로 벗어나는 행동이다. 후퇴작전에는 ‘지연전’ 외에 ‘철수’와 ‘철퇴’가 있다. 적과 마주친 상태에서 뒤로 빠져나가는 것을 철수라고 한다. 적과 대면하지 않은 상황인 후방 지역에서 후퇴하는 것을 철퇴라고 한다. 후퇴 때 모두 군기와 사기를 확실하게 유지해야 한다. 적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하게 후퇴하는 것도 필수다. 지연전술은 기원전 3세기에 벌어졌던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의 장군이자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처음 사용했다. 지금도 지연전을 가리켜 ‘파비우스 전술’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로마서 처음 사용된 지연전
중공군 남하 두 달간 막아
20만명 흥남철수 성공시켜

 

 

6·25전쟁 때인 1950년 10월 15일∼12월 15일 사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지연전으로 중공군의 공세를 막았다. 이 지연전에서 중공군은 2만5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유엔군은 2500여 명 전사 했다. 그 덕분에 아군 10만 명과 피란민 10만 명의 흥남부두 철수가 가능했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출처: 중앙일보] [전쟁사 돋보기] 파비우스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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