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제주도

[제34회 五賢人의 날 참석차 제주여행] 18

드무2 2023. 10. 26.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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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五賢人의 날 참석차 제주여행] 18

 

 

 

 

 

 

 

 

 

 

 

 

삼별초와 항파두리성

제주도에 거점을 둔 삼별초는 김통정 金通精 장군을 중심으로 항파두리에 성을 쌓고 항전하였으나 1273년 (원종 14) 결국 여몽 연합군에 항복하였습니다. 원 元은 삼별초를 평정한 후 일본 원정에 대비히여 제주에 탐라총관부 耽羅摠管府를 설치하고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최근의 발굴조사로 항파두리성의 내 · 외성 구조와 축성 築城 방식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 안에서 20여 기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갑옷을 비롯하여 청자, 청동 그릇, 기와류 등을 발견하였습니다.

 

 

 

 

 

 

1. 고누놀이판  2. 청자 베개  3. 청자 여지무늬 대접

 

 

 

4 ~ 10. 연꽃무늬 수막새  11. 넝쿨무늬 암막새

 

 

 

12 ~ 15. 청자 꽃모양 접시  16. 청자 접시  17, 18. 백자 접시 (원 元)  19. 청자 연꽃잎무늬 대접 (원 元)

 

 

 

항파두리성 터 출토품

고려

제주시 고성리 항파두리성 터

2010 · 2011년 발굴

 

 

 

1. 고누놀이판  2. 청자 베개  3. 청자 여지무늬 대접  4 ~ 10. 연꽃무늬 수막새  11. 넝쿨무늬 암막새  12 ~ 15. 청자 꽃모양 접시  16. 청자 접시  17, 18. 백자 접시 (원 元)  19. 청자 연꽃잎무늬 대접 (원 元)

 

 

 

 

 

 

항아리 (몽골병)

중국

제주도

 

고려시대 몽골 군인들이 주로 사용하였다고 해서 몽골병이라고도 부른다. 항아리에는 두 개 또는 네 개의 귀가 달려있는데, 구멍에 끈을 꿰어서 들더나 매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신안 앞바다에 난파되어 침몰한 중국 원나라의 무역선에서도 나온 바 있으며, 항파두리성 외에 제주 한림리 등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항파두리성

 

 

 

 

 

 

 

 

 

 

 

 

 

 

 

 

 

 

 

 

 

 

 

 

 

 

 

 

 

 

https://youtu.be/Tc90fPmhE7E

 

 

 

 

 

 

 

 

 

 

 

 

 

 

 

 

 

 

 

 

 

 

 

 

제주목 관아 터 발굴

제주목 관아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제주목을 다스리기 위해 건립하였습니다. 제주 행정을 주관하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관아 건물터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조사 결과 불에 타서 다시 지은 흔적, 건물 시설, 담장, 초석 등 조선시대 관아 건물터 외에 탐라시대 문화층도 확인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제주

조선시대 제주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고 중앙집권적인 왕도정치를 지향한 주선의 지방통치제도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거친 풍토 風土와 지속적으로 찾아오는 자연재해, 끊임없는 왜구 倭寇의 침입으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게다가 감귤과 말, 전복 등 토산품의 과중한 공납 貢納과 200년 동안 지속된 제주 사람의 섬 밖 이동금지는 제주의 경제와 문화 발전을 더디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제주에 부임한 관리 사화 士禍나 당쟁 黨爭 등으로 유배 流配온 학자나 정치인, 표류 漂流로 인해 밖ㅌ세상은 경험하고 온 사람들은 제주 사람들에게 정치 · 사회 · 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주의 3읍

조선은 지방통치를 위해 전국 8도에 관찰사 觀察使를 파견하고, 그 아래 330여 개 부 府 · 목 牧 · 군 郡 · 현 縣에는 수령을 내려 보냈습니다. 1393년 (태조 2) 여의손 呂義孫 (? ~ ?)이 첫번째 제주 목사로 부임하였습니다. 1416년 (태종 16)에는 제주목사 오식 吳湜 (1370 ~ 1426)이 남쪽의 토착 세력을 통제하고 한라산 북쪽에만 관아 官衙가 있는 불편을 덜기 위해 현감 縣監 2명을 파견해 달라고 건의합니다. 이후 제주목 濟州牧, 정의현 旌義縣, 대정현 大靜縣의 3읍 체제가 되었습니다.

 

 

 

 

 

 

 

 

 

탐라지

김종현 (1875 ~ 1916)

1912년

제주기 11, 2002년 김계연 기증

 

1912년 이전까지 간행된 제주 읍지 邑誌를 참고하여 발간한 것이다. 제주의 연혁 沿革, 성씨 姓氏, 풍속 風俗, 천정 泉井, 도서 島嶼, 토산 土産 등을 기존 읍지의 형식대로 정리하였다. 김종현이 편집하여 김두봉이 간행하였고, 서문은 이응호 李膺鎬가 썼다. 각 시대별 제주 읍지를 통해 변화한 제주도의 모습을 비교하여 살펴볼 수 있다.

 

 

 

 

 

 

탐라지

박장복 (1778 ~ ?) 간행

조선 19세기

제주기 12, 2002년 김계연 기증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원진 李元鎭 (1594 ~ 1665)이 제주도 관련 자료를 모아 편찬한 『탐라지』를 제주 목사 박장복이 다시 간행한 것이다.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으로 나누어 연혁과 관원, 풍속, 토산, 인물 등 17세기 제주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와 상세한 내용을 담았다. 박장복은 1834년 (순조 34) ~ 1836년 (헌종 2)까지 제주목사를 지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8

조선 1530년

국립중앙도서관

복제품

 

1530년 (중종 25)에 편찬한 지리지로 임진왜란 이전 조선 전기 각 군현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이 지리지에는 조선 전도인 팔도 총도와 도별 지도를 삽입하여 기존의 인문지리적 지식을 공간적으로 파악하도록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총 5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전라도에 속한 제주는 38권에 수록하였다.

 

 

 

 

 

 

 

 

 

한라장촉

『탐라순력도』 첫 장에 수록된 제주도와 주변 지형이 그려진 지도로 「한라장촉」은 '한라산 주변의 장대한 경관을 바라본다' 는 뜻이다. 지도의 위쪽이 남쪽이고 아래쪽이 북쪽으로 한양에 있는 임금이 내려다보는 방향에서 그렸다. 그래서 제주목의 동쪽이 '좌면 左面', 서쪽이 '우면 右面' 이다. 제주의 오름과 마을 이름을 비롯하여 방어 시설의 위치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삼읍을 점검하다

1702년 (숙종 29)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남긴 『탐라순력도』 41점 가운데 「제주조점」, 「정의조점」, 「대정조점」은 각 고을을 정검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아래쪽에는 무관직, 백성 人民, 논과 밭, 성정군, 창고의 곡식 수량을 공통적으로 기록하였다. 제주목과 달리 정의현과 대정현에는 목자 牧子와 보인 保人, 말과 검은 소의 수량을 더 기록하였다. 세 읍 모두 문묘와 제기, 제복, 서책, 군기와 잡물 등도 점검하였다. 이 그림을 통해 제주 목사가 제주목 뿐만 아니라 정의현과 대정현을 아울러 감독 관할하였던 것도 살펴볼 수 있다.

 

구분 제주조점 대정조점 정의조점
조점일 11월 15일 11월 초 11일 11월 초 2일
현감 1인 1인
성장 * 4인 2인 2인
치총 ** 8인 4인 4인
만호 / 인민 7,319호 797호 1,436호
논밭 3,357결 *** 149결 140결
성정군 1,263명 224명 664명
목자 · 보인 123명 190명
849필 1,178필
흑우 228마리 228마리
창고곡식 30,040섬 1,950섬 4,250섬
참고 제주사회
제주전최
제주양로
대정배전
대정양로
정의양로
정의강사

* 성정 : 성을 지키는 장수

** 치총 : 네 개의 성문에 배치한 우두머리 장령

*** 결 : 1결은 1동의 10배로 넓이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름

 

 

 

 

 

 

 

 

 

왜구의 침입, 제주의 방어체제

한반도 남쪽 바닷가 지역을 빈번하게 침범하던 왜구는 제주에도 침입해 마을을 불사르며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제주목사는 강력한 군사권한을 가지고 방어체제를 정비해 나갔습니다. 제주목 濟州牧, 정의현 旌義縣, 대정현 大靜縣에 읍성 邑城을 쌓고 왜구의 피해가 잦은 지역에 9개 (화북 · 조천 · 별방 · 수산 · 서귀 · 모슬 · 차귀 · 명월 · 애월)의 방어진 防禦鎭을 두었습니다. 왜구를 감시하고 횃불과 연기로 위급상황을 알리기 위해서 25개의 봉수 烽燧와 38개의 연대 煙臺도 설치하였습니다.

 

 

 

<탐라제군사명기> 복제품은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 특별전 "섬나라 탐라 ㅡ 잃어버린 천년을 깨우다" 에 출품 중입니다.

 

출품기간 : 2023. 7. 18. ~ 11. 26.

재전시일 : 2023. 12. 5. (예정)

 

 

 

 

 

 

'탐라제군사명' 기 耽羅諸軍司命旗

조선 19세기

개인 소장

복제품

 

이원조 李源祚 (1792 ~ 1872)가 1841년 (현종 7) 제주목사로 부임할 때 받은 깃발이다. 사명기는 조선시대 각 영 營의 우두머리가 휘하의 군대를 지휘할 때 쓰던 깃발로 각 대장의 방위에 따라 바탕색이 달랐다 아랫부분에는 황 (黃 : 중앙), 청 (靑 : 동방), 백 (白 : 서방), 적 (赤 : 남방), 흑 (黑 : 북방)의 오방색 술이 달려 있다. 부임할 때 교지와 함께 이 깃발을 받아 사용하였는데 목사의 존재와 위엄을 드러내 주었다. 『탐라순력도』에는 목사가 행렬할 때 진행 방향 앞에 깃발을 높이 매달아 목사의 행차를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탐라지도병서

조선 1709년

국립중앙박물관

덕수 5304, 1915년 구입

 

1709년 (숙종 35)에 만들어진 제주 지도이다. 그 뒤에 만들어진 제주 지도는 이 지도를 활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대형으로 위와 아래에는 각 고을의 연혁, 도리 道里, 인구, 군사, 재정, 명승 고적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였고 가운데에 지도를 넣었다. 오름과 수풀은 음각으로 새겨 흑색으로, 촌락과 포구는 양각으로 새겨 백색으로 보이게 하였다. 특히 목장을 자세하게 묘사하였는데, 목장의 경계가 되는 돌담과 출입문 門의 명칭까지 표기하였다. 지도의 방위는 한양에서 바라보는 시각으로 그렸기 때문에 남쪽이 지도의 윗부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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