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제주도

[제34회 五賢人의 날 참석차 제주여행] 20

드무2 2023. 10. 30.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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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五賢人의 날 참석차 제주여행] 20

 

 

 

 

 

 

 

 

 

절해고도

조선시대 제주도는 임금이 있는 한양에서 가장 먼 지역이었습니다. 게다가 '섬' 이라는 고립성과 폐쇄성이 더해지면서 추방과 격리라는 형벌을 내리는 최적의 장소로 원악도 遠惡島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고려시대 원나라가 제주에 죄수들을 보내며 시작된 유배지로서 제주는 조선시대에 정치적인 죄인을 보내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절도안치 絶島安置의 유배지가 되었습니다.

 

 

 

 

 

 

許國何曾歎獨賢    나라에 몸 허락하고도 어찌 일찍이 홀로 현명함을 탄식했었나?

南州去往却依然    남쪽 고을로 떠나가면서도 내 마음 오히려 의연하건만,

魂迷峽口千重樹    혼은 협곡 어귀 천 겹의 나무들에 어지럽다가

路入滄波萬里天    여정은 만리 푸른 파도의 하늘로 들어가네.

塵世卽今無好事    풍진 세상, 지금에야 좋은 일 없으나

仙山宿苔有因綠    신선의 산, 묵은 이끼라도 인연이 있어야 하지.

遙知別後相思處    멀리서도 헤어진 뒤 서로 그리워하는 곳 알기에

兩地分明片月懸    형님과 저가 있는 곳, 틀림없이 조각달이 뜨겠죠.

 

辛卯初秋錫爾拜    신묘년 초가을에 석이 (이경억)가 절하고 드립니다.

 

 

 

 

 

 

 

 

탐라신행시첩 耽羅贐行詩帖

이경휘 李慶徽 (1617 ~ 1669) 등

조선 1651년 

국립중앙박물관 / 본관 5032, 1917년 구입

 

1651년 이경억 李慶億 (1620 ~ 1673)이 제주 안핵어사로 떠날 때 그의 가족과 문인들이 쓴 송별시와 글을 모은 서첩이다. 『효종실록』에 의하면 이경억은 전 제주목사 김수익 金壽翼과 정의현감 旌義縣監 안집 安緝 사이의 분쟁을 조사하기 위하여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이 서첩의 서문은 이만웅 李萬雄이 썼고 민정중 閔鼎重 · 윤문거 尹文擧 · 형 이경휘 李慶徽 등 20여 명의 글을 담고 있다. 주로 탐라에 대한 인상을 피력하거나 어사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고 서울 집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내용이 쓰여 있다. 특히 형 이경휘와 동생 이경억이 주고 받은 이별시는 절해고도인 제주에 대한 당시 문인들의 감성이 잘 나타난다.

 

 

贈別錫爾耽羅之行    석이 (동생 이경억)의 탐라 행차를 보내며 드림

 

耽羅御史要才賢    탐라 어사는 재능과 현명함이 요구되는데

上相知名豈遇然    성상께서 이름을 알아 준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聖化百年流絶域    백년의 교화가 먼 땅까지 흘러들었으니

仙槎八月泛秋天    팔월 가을, 탐라로 사신가는 배 띄우네.

孤忠許國寧辭險    외로운 충성 나라에 허락했으니, 어찌 길 험하다고 사양하랴?

壯歲深奇亦有緣    장년의 나이에 기이한 탐방이니, 역시 인연이 있어야 하는 일.

今日風波宜得力    오늘 풍파에 마땅히 힘을 얻어야 하니

莫須臨別淚雙懸    이별하며 두 줄기 눈물 흘리지 마시게.

 

辛卯秋日春田居士    신묘년 가을날에 춘전거사 (이경억의 큰 형, 이경휘의 호).

 

 

 

 

 

 

 

 

 

 

 

제주지도 (대동여지도)

김정호 (? ~ ?)

조선 1861년

국립중앙박물관 / 신수 521, 1962년 구입

 

김정호가 1861년에 제작, 간행한 「대동여지도」의 제주 지도와 달리 실제 지형을 반영하였고 군사 · 행정적으로 중요한 항목도 간결히 표시하였다. 이전 지도에서 오름을 단일 봉우리처럼 그린 것을 이어진 산맥처럼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해좌전도

조선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 M12

 

목판 인쇄 지도로 조선 8도의 지세와 산줄기, 하천, 호수, 교통로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제주지도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삼읍을 표시하였고, 전라도 완도를 거쳐 제주에 이르는 항로를 묘사하였다. 아울러 제주의 연혁과 토산품에 대해서도 간략히 기록하였다.

 

 

 

 

 

 

 

 

 

동여비고

조선 17세기 후반

개인소장

보물 1596호 / 복제품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전국 지도책이다. 전국의 군현도와 함께 고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역사지도와 한양의 모습을 그린 도성도 등이 실려 있다. 제주도를 단독으로 그린 지도로서는 이른 시기의 예로 중요하다. 제주 해안선의 모습이 타원형보다는 원형에 가깝게 표현되었다. 제주, 정의, 대정 삼읍과 한라산과 주요 오름이 표시되었다.

 

 

 

 

 

 

 

 

 

제주목사 濟州牧使

제주목사는 제주목의 업무뿐만 아니라 전라도 관찰사를 대신하여 대정현 大靜縣과 정의현 旌義縣을 감독하는 등 다른 고을의 수령보다 권한이 컸습니다. 외적 방어를 위해 절제사 節制使나 방어사 防禦使 등의 군직 軍職도 함께 맡았습니다. 제주목사는 형옥 刑獄, 소송, 세금 징수, 삼강 三綱의 모범이 되는 사람 발굴 등 수령의 일반적인 업무 외에도 나라에 중요한 물품인 귤과 제주말 진상 進上을 위해 과수원 橘園과 목장 관리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야계유고 冶溪遺稿

이익태 李益泰 (1633 ~ 1704)

조선 17세기

제주기 620, 2002년 이완희 기증

 

이익태는 1694 ~ 1696년까지 제주목사를 지냈다. 야계 冶溪는 그의 호이다. 62세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그는 연무정 演武亭과 운주당 運籌堂, 관덕정, 우연당, 향교 등을 중창하고 송시열을 귤림서원에 배향하는 등 제주목을 정비하고 학문을 장려하였다. 또한 한학 漢學 · 왜학 倭學의 역생 譯生 등의 호적을 보관하는 삼학청 三學廳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그밖에 자신이 제주목사로 부임하기까지의 과정과 제주에 있는 동안의 업무, 제주 관련 역사자료 등을 기록한 『지영록 知瀛錄』을 남겼다. 이 책은 그가 쓴 글을 모아 놓은 것으로 총 5책이며 시 386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익태 초상 李益泰 肖像

조선 17세기 후반

비단에 색

제주기 536, 2002년 이완희 기증

 

이익태의 초상화로 17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정면상과 높게 그려진 사모는 17세기 후반 공신도상의 특징이다. 그러나 승려 초상에서 보이는 손을 표현한 점, 다리를 올려 놓은 대 臺를 화려하게 채색한 점, 의자 다리가 다소 어색하게 표현된 점 등은 당시 공신상의 일반적인 양식과 차이를 보인다.

 

 

 

 

 

 

이익태의 교지 李益泰敎旨

조선 1694년

제주기 550, 2002년 이완희 기증

 

1694년 (숙종 20) 이익태 李益泰가 제주목사로 임명될 때 받은 교지이다. 교지에는 국새 '시명지보 施命之寶' 가 찍혀 있다.

 

 

 

 

 

 

 

 

 

 

 

 

 

 

 

 

제주목의 행정

제주목에는 목사 牧使 (정3품)를 파견하였고 행정 실무는 중앙의 6조 六曹 체제를 따라 이 吏 · 호 戶 · 예 禮 · 병 兵 · 형 刑 · 공 工 6방 六房으로 나누어 하였습니다. 제주목사를 보좌하는 관리로 판관 判官 (종5품)이 함께 부임하여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제주목 관아 官衙는 이러한 제주 행정 운영의 중심지로 제주인의 삶 전반에 관련된 일을 총괄하였습니다.

 

 

 

 

제주목 행정구조

 

 

 

 

 

 

호적대장 戶籍臺帳

조선 16세기 후반

제주기 256, 2002년 김계연 기증

 

제주도에서 16세기 후반에 작성된 호적대장의 일부로 보인다. 김진용 金晉鎔의 손자 김집 金集이 호주로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교생 계고 繼高, 할아버지 진용, 증조는 학생 경봉 景鳳으로 나온다. 호적대장은 1636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에서 호적대장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 매우 드문 자료이다.

 

 

 

 

 

 

 

호구 자료 戶籍

조선 1620 ~ 1630년

제주기 341, 2002년 김계연 기증

 

제주목 22 ~ 43통의 각 호의 정보를 담은 호구 자료이다. 호주의 작역, 이름, 나이 동거하는 남자 형제나 아들의 이름과 나이 등 거주하는 남성의 정보를 기재한 것으로 보아 노역 勞役이나 군역 軍役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지 所志

조선 19세기

제주기 1464, 2013년 김계연

 

신우면 하귀에 거처하는 진사 김준현 金俊鉉이 갑오년에 찰리사 察理使에게 올린 상서이다. 육지로 나가는 일과 관련한 비난을 시정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찰리사는 마땅히 조사하여 조치해야 할 것이라 응답했다.

 

 

 

 

 

 

 

 

 

 

소지 所志

조선 19세기

제주기 257, 2002년 김계연

 

정묘년 3월에 제주 이도리 二徒里에 사는 김광숙 金光淑이 제주목사에게 올린 청원서이다. 소지 所志란 조선시대에 개인에게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 관청에 제출하는 일종의 진정서이다. 김광숙은 4 ~ 50량의 가치가 있는 말 馬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이방 吏房인 인원 仁沅이 사또가 좋은 말을 필요로 한다고 하면서 끌고 가버린 후 1년이 지나서야 겨우 20량을 보냈다. 김광숙이 이방에게 말값이 적다고 하자, 이방은 말을 원주인에게 돌려주고는 오히려 그동안 말을 먹인 사료 값으로 105량을 내라고 하였다. 이후 이방이 쫓겨나게 되자, 김광숙이 제주목사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제주목사는 30년이나 된 일을 다시 거론하지 말라고 판결을 내렸다.

 

 

 

 

 

 

 

 

 

 

제주목사

조선시대 제주목사는 284명이었으며 그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1년 8개월 정도로 다른 고을 수령의 임기에 비해 짧았습니다. 뚜렷한 활동 없이 떠나거나 폭정 暴政으로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제주목사의 임무에 충실하고 제주의 지리와 역사, 삶과 생활을 기록으로 남긴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형상 李衡祥 (1653 ~ 1733)은 1702년 3월에 부임하여 1년 여 동안 제주목사로 재직하면서 각 고을을 순회하고 주요 행사 장면들을 그린 『탐라순력도 耽羅巡歷圖』를 제작하였습니다. 1891년부터 1894년까지 3년동안 제주목사를 지낸 이규원 李奎遠 (1833 ~ 1901)은 국방을 정비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등 바르고 어진 정치를 했다고 전합니다.

 

 

 

 

 

 

『탐라순력도 耽羅巡歷圖』

조선 1703년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보물

복제품

 

1702년 (숙종 29)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 李衡祥 (1653 ~ 1733)은 제주 방어와 군민의 풍속을 살피기 위해 순력 巡歷을 실시하고, 재임기간 중이 있었던 중요한 일을 담아 『탐라순력도』를 제작하였다. 순력은 각 도의 관찰사가 정기적으로 도내 각 고을의 풍속과 민생을 살피기 위해 돌아보는 것으로 제주에서는 섬이라는 특성상 군사 직책도 겸한 제주목사가 이를 수행하였다. 『탐라순력도』는 제주지도 1면에 행사 장면 39면, 완성한 뒤 새로 추가한 그림 1면을 포함하여 모두 41개의 그림과 서문 2면 등 총 43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면마다 상단에 제목, 중간에 그림, 하단에 일시, 장소, 이름, 수치 정보들을 넣었다. 이러한 3단 구성은 조선시대 관료들의 모임을 그린 계회도 契會圖의 영향으로 보인다. 1702년 10월 29일부터 11월 19일까지 21일 동안에 걸쳐 실시했던 순력 장면이 22면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이밖에도 명승지를 탐방하거나 양로잔치 및 활쏘기 대회를 거행하는 등 다양한 행사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서문을 쓴 일자가 1703년 음력 5월 13일로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화첩의 제작시기는 순력 행사가 있었던 1702년 이듬해인 1703년 5월 초순경으로 추측된다. 그림은 화공 김남길이 그렸는데 그의 다른 그림은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규원의 교지

조선 1891년

제주기 359, 2002년 이혜은 기증

 

이규원 李奎遠 (1833 ~ 1901)을 1891년 (고종 28) 7월 가의대부행제주목사 嘉義大夫行濟州牧使로 임명하는 임명장이다. 가의대부는 종2품으로서 제주목사에 임명된 것은 품계보다 낮은 관직에 임명된 것이었기 때문에 제주목사 앞에 '행 行' 자가 들어가게 되었다. 이규원은 1891년 ~ 1894년까지 3년 동안 제주목사로 있었다. 그는 1891년 정의현에서 이완평 李完平 등이 일으킨 민란 (1891년)과 일본인이 제주 연안을 무단 침탈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고종이 그를 불러 특별히 군사 양성과 국방대책을 세울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또한 재임 중에 오현단 五賢壇을 귤림서원 橘林書院 옛 터에 세웠으며 운주당 運籌堂을 중수하였다.

 

 

 

 

 

 

이규원의 교지

조선 1891년

제주기 358, 2002년 이혜은 기증

 

이규원 李奎遠 (1833 ~ 1901)을 1891년 (고종 28) 8월 가의대부 찰리사 겸 제주목사로 임명하는 임명장이다. 이 교지는 제주목사에게 찰리사 察理使를 겸하게 하여 제주의 군사 통제권을 부여한 것이다.

 

 

 

 

 

 

유서 諭書

조선 1891년

제주기 372, 2002년 이혜은 기증

 

1891년 (고종 28) 고종이 이규원 李奎遠 (1833 ~ 1901)을 찰리사 겸 제주목사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명령서이다. 제주를 방어하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제주목사는 찰리사 察理使, 절제사 節制使, 방어사 防御使라는 군사적 직책도 아울러 맡았다. 유서를 내릴 때에는 밀부 密符를 함께 내려 비상시 병력 동원에 사용하게 하였다. 비상 명령이 내려지면 관원이 간직하고 있던 반쪽의 부와 왕이 보낸 반쪽의 부를 맞추도록 하여 군사 동원에 신증을 기하였다. 유서에는 국새 가운데 하나인 '유서지보 諭書之寶' 가 5번 찍혀있다.

 

가의대부 찰리사 겸 제주진의 병마수군절제사 전라도수군방어사 이규원에게 명령한다. 경은 한 지방의 책임을 맡았다. 맡은 책임이 가벼운 것이 아니다. 무릇 병사를 움직일 때는 임기응변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적을 제압할 것이며, 평상시의 일에는 스스로 옛 제도가 있으니 일을 자세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만약 짐과 경만이 독단으로 처리하여야 할 일이 잇으면 일부가 아니면 시행하지 말라. 또 뜻밖의 간사한 모략을 미리 방지해야 하니 만약 비상한 명령이 잇으면 부절 (밀부)을 합치시켜 보고 의심이 없는지 확인하고 마땅히 명을 받들어야 할 것이다. 갑 제25절의 부절을 주는 바이니 경은 그것을 받들라. 이를 명령한다.

 

광서 17년 (1891) 8월 20일

 

 

 

 

 

 

 

 

 

 

 

 

 

 

 

 

 

 

해동역대명가필보 海東歷代名家筆譜

한남서림 간행

1926년

제주기 608, 2002년 이완희 기증

 

삼국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역대 필적 700점을 모아 한남서림에서 발행한 책이다. 표제 表題는 오세창 吳世昌 (1864 ~ 1953)이 썼고, 책 머리에는 김규진 金奎鎭 (1868 ~ 1933)의 글씨가 있다. 한남서림의 대표 백두용 白斗鏞은 "우리 역사 4000년간의 고급명가의 필적 700점을 모아 6권으로 편집하여 '해동명가필보' 라 한다" 고 발간 경위를 밝혔다. 이 책에는 목판으로 찍은 최부가 쓴 편지글이 있다. 여행 중인 상대에 대한 안부를 묻고 자신이 시제 時祭를 지내지 못한 사연을 말하며 곧 시제를 지낼 것임을 알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기증문화재

국립제주박물관은 뜻있는 지역 주민과 관심있는 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꾸준히 문화재를 기증받고 있습니다. 현재 소장하고 있는 기증문화재는 고고, 역사, 민속, 예술품 등 다양합니다. 이러한 기증문화재는 국립제주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으로 거듭나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서안 書案

19세기

김순이 1009, 2001년 김순이 기증

 

서안은 우리 전통 가옥에서 책상의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좌식 坐式 생활에 맞도록 높이가 낮고, 책을 펼 수 있는 정도의 작은 크기로 만들어졌다. 사랑방에서 손님을 마주대할 때 주인의 위치를 정해주는 역할도 하였다. 주인의 취향에 따라 재질이나 형태가 다양하지만 선비들의 품격에 맞게 대부분 윗널과 다리로 구성된 단순한 모양에 장식을 최대한 절제하여 담백한 멋을 풍기고 있다.

 

 

 

 

 

 

등잔걸이 燈架

19세기

김순이 1167, 2001년 김순이 기증

 

등잔걸이는 등잔을 걸어놓는 기구로 나무로 만들었다. 하단은 6각형인데 재떨이를 겸해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나뭇결을 살려 소박하면서도 단순 간결한 아름다움이 있다.

 

 

 

 

 

 

옹기 연적 · 자라병

19세기

김순이 1417, 2001년 김순이 기증

 

제주 옹기로 만든 연적과 자라병이다. 제주에서는 허벅에서부터 문방구까지 다양한 옹기가 제작되었다. 연적은 붓글씨를 쓸 때 먹을 갈기 위해 필요한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문방구의 일종이다. 모양이 자라와 비슷하다 하여 이름이 붙여진 자라병은 주로 야외에 나들이 갈 때 술 등을 넣던 병으로 어깨에 멜 수 있도록 병의 양 옆에 실을 꿸 수 있는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이묘자 기증 사진 <돌, 바람 그리고 나>

2015년 기증

 

 

 

 

 

 

 

 

 

 

 

 

 

 

 

 

 

 

현중화 행장 玄中和 行狀

오문복 吳文福이 짓고 (2000년)

판잉치 潘英棋가 쓰다 (2003년)

제주기 892, 2007년 서귀포소묵회 기증

 

현중화 (1907 ~ 1997)는 서귀포시 법환동 출신으로 한국 서예계에서 선구자적 작가로 평가받는 서예가이다. 1924년 1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마치고 31세 때 일본의 서예가 마츠모토 호스이 松本芳翠 (1893 ~ 1971)와 츠지모토 시유 辻本史邑 (1895 ~ 1957)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1955년 귀국하여 국전 國展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타계할 때까지 제주에 머무르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서체를 완성하였다.

이 행장은 오문복이 짓고 중국인 판잉치 潘英棋가 쓴 것이다. 오문복은 행장에서 "서구의 바람과 어지러운 습속이 온 나라에 퍼져 돈에 머리를 숙이는 꼴이 되어도, 오직 선생은 한복을 입으시고 옛 예도 禮度를 따르며 이득 쫓는 것을 멀리하고 일생을 서법을 펴는 데에 다 바쳐 깨끗한 삶을 드리워 뒷사람의 본보기가 되었다." 라고 평가하였다.

 

 

 

 

 

 

백번 익히면 실은 능히 희어지고 百練絲能百

현중화 玄中和 (1907 ~ 1997)

제주기 900, 2007년 오문복

 

경오년 (1990년) 겨울철 소농 素農 오문복 선생에게 써 준 작품이다.

"백 번 삶으면 실은 능히 희어지고 천 번 갈면 거울은 비로소 맑아진다. 배움이 뒤지면 항상 옛것에 부끄러워해야 하고 교유가 생겨도 타인을 원망하지 말아야하리."

 

 

 

 

 

 

난초인듯 하나 알 수 없다 蘭然不知

현중화 玄中和 (1907 ~ 1997)

1987년

제주기 943, 2007년 오문복 기증

 

 

 

산꽃이 비단 같은 긴긴 봄 山花如錦春長在

현중화 玄中和 (1907 ~ 1997)

1986년

제주기 958, 2007년 허민자 기증

 

 

 

맑은 바람 淸風

현중화 玄中和 (1907 ~ 1997)

20세기 후반

제주기 945, 2007년 오문복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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