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제주도

[제34회 五賢人의 날 참석차 제주여행] 19

드무2 2023. 10. 26.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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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五賢人의 날 참석차 제주여행] 19

 

 

 

 

 

 

 

 

 

제주의 교육과 인물

유교 이념을 지방에 보급하고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 국가에서 운영하는 향교가 1392년 (태조 원년) 제주에 설치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서원과 서당 등의 사설 교육기관이 세워져 제주의 유학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제주 출신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도 있지만 제주를 떠나지 않은 채 좋은 환경의 제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한편, 중앙에서 온 명망과 학식을 갖춘 유배인들은 제주에서 교육 활동을 펼치며 제주도 지식인의 학문과 이념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주인의 과거와 출사

조선시대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는 것은 입신양명 立身揚名의 첫 관문이었습니다. 제주인의 문과 文科와 무과 武科 향시 鄕試는 행정구역상 전라도에서 치러졌는데, 바다 건너 과거를 보러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제주의 지리적 특수성을 감안하여 중앙에서는 별견어사 別遣御史를 내려 보내 별시 別試를 시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제주 출신 문과 급제자 수는 60명이 채 안되었습니다.

 

 

 

 

 

 

조선의 과거제도

조선시대 인재 선발을 위한 과거 시험은 소과 小科 · 잡과 雜科 · 무과 武科 · 문과 文科가 있었다. 시험은 3ㄴ녀 마다 정기적으로 보는 식년시 式年試와 비정기적인 증광시 增廣試 · 별시 別試 · 알성시 謁聖試 등이 있었다. 소과는 초시 ㅡ 복시 2단계이며, 합격자는 성균관 입학자격을 얻거나 하급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고위관직까지 진출하려면, 관리 선발 시험인 문과 시험에 합격해야만 했다. 대과는 초시 ㅡ 복시 ㅡ 전시 3단계를 거쳤다.

 

 

 

 

 

 

승보시사 陞補試士 (『탐라순력도 耽羅巡歷圖』)

조선 1703년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보물 652ㅡ6호, 복제품

 

1702년 윤6월 17일 제주목 관아 관덕정 앞에서 승보시 陞補試 를 실시하는 장면이다. 『탐라순력도 耽羅巡歷圖』 중 제주목사 업무의 첫 장면으로 실려 있다. 승보시는 본래 사학 四學의 유생들이 치르는 소과 小科 초시 初試에 해당하는 시험으로 지방에서는 개성, 제주, 수원에서 시행되었다. 제주에서는 1639년 (인조 17)부터 실시하였는데 매년 2명을 뽑아서 서울에서 치러지는 소과 복시 覆試인 생원시 生員試와 진사시 進士試에 응시자격을 주었다. 이날 승보시에서는 이형상 목사가 시관 試官, 제주 판관 濟州判官 이태현 李泰顯이 부시관 副試官, 대정현감 大靜縣監 최동제 崔東濟가 참시관 參試官으로 참여하였다. 3일간 치러진 시험에서 모두 12명이 응시해 최종적으로 시 詩와 부 賦에 각 1인씩 2명의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진정서 陳情書

조선 18 ~ 19세기

제주기 1469, 2013년 오문복 기증

 

병술년에 제주 유생 양처윤 梁處允 등이 제주목사에게 향교 鄕校 이전을 건의한 문서다. 광양 光陽 땅에 70년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향교가 많이 허물어지고, 주변에 무덤도 많아 성묘 聖廟 (공자의 사당, 즉 대성전)를 모시기에는 적당하지 않으니, 향교를 이전해 줄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목사는 일이 매우 중대하여 목사가 감히 결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탐라빈흥록>은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

특별전 "섬나라 탐라 ㅡ

잃어버린 천년을 깨우다"

출품 중입니다.

 

출품기간 : 2023. 7. 18. ~ 11. 26.

재전시일 : 2023. 12. 5. (예정)

 

 

 

 

 

 

탐라빈흥록

조선 1794년

제주기 13, 2002년 김계연 기증

 

제주도에서 시행한 별시인 빈흥과 賓興科 관련 글을 모은 것이다. 1793년 (정조 17) 겨울, 정조는 심낙수 沈樂洙 (1739 ~ 1799)를 어사 御使로 제주에 파견하여 제주 유생만 참여하는 과거를 치르게 했다. 『탐라빈흥록』은 이듬해 규장각에서 간행하여 정조가 직접 하사한 것으로 빈흥과를 시행하는 목적과 경과, 시험문제와 답안지, 우수자의 명단과 합격자 명부 등이 실려 있다.

 

"아, 너희 탐라의 높고 낮은 백성들아! ··· (중략) ... 귤 꾸러미가 소반에 올라오면 수고스럽게 재배한 너희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고, 말 떼가 궁궐 뜰에 오게 되면 분주하게 목축한 너희들의 고초를 상상하게 된다. 언제나 북풍이 휘몰아치고 눈꽃이 펄펄 날릴 때면 공물을 바치는 배가 염려되어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며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너희들을 잊지 못해 하는 나의 이런 마음을 알기나 하느냐"

 

「탐라빈흥록 (耽羅賓興錄)」에 실린 정조의 윤음 綸音

 

 

 

 

 

 

 

 

 

청원서 請願書

조선 18 ~ 19세기

제주기 1462, 2013년 오문복 기증

 

기묘년 4월 제주도 유생 오기권 등이 의정부 議政府에 올린 문서이다. 그 내용은 제주도 유생들이 제주도에 부임한 목사가 선정을 베풀었으니 유임시켜 달라고 하였는데, 이를 의정부가 허락하자 감사를 표한 것이다. 당시 제주 · 정의 · 대정의 유생 각 10명과 대표 오기권을 포함하여 총 31인이 문서를 올렸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올리는 문서를 등장 等狀이라고도 한다.

 

 

 

 

 

 

첩 帖

조선 1841년

제주기 1456, 2016년 오문복 기증

 

제주목사가 향교 (제주, 정의, 대정), 서원 (귤림서원, 송죽서원), 서당 (삼천서당, 삼성사, 정의서당, 대정서당)의 유생들에게 내려 보낸 첩문이다. 제주 지역 학문 진흥을 위하여 유생들이 새로운 규칙을 정한 것을 제주목사가 허가한 문서이다. '제주 목사 지인 濟州牧使之印' 이 11군데 찍혀 있다.

 

 

 

 

 

 

 

 

 

 

 

 

제주의 교육기관

중앙정부는 제주의 유학 교육을 위한 향교를 제주목 · 정의현 · 대정현 세 곳에 설치하였습니다. 향교는 유교 성현 聖賢을 모시고 유교적 교양을 갖춘 인재를 기르며 인 仁 · 의 義 · 예 禮 · 지 智에 의한 도덕적인 교육을 중시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향교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사학 私學으로 귤림서원 橘林書院과 삼천서당 三泉書堂을 비롯하여 우학당 右學堂, 좌학당 左學堂 등이 세워져 제주 유학 교육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제주지역 학교와 문과급제자 분포

 

 

 

 

 

 

진정서

조선 1798년

제주기 1460, 2013년 오문복 기증

 

1798년 (정조 22) 12월에 제주 유생 양경천 梁擎天이 제주목사에게 올린 진정서이다. 양경천은 향교 학생 명단 중 잘못 들어간 학생이 있으니 바로 잡아달라고 목사에게 요구했다. 목사는 이번 일을 다시 논의해 보자는 답변을 하였다.

 

 

 

 

 

 

첩 帖

조선 1891년

제주 15998, 2011년 구입

 

1891년에 작성된 첩문으로 향교에서 추천한 귀일면 훈장을 방어사가 임명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첩 帖

1933년

제주 15997, 2011년 구입

 

계유년 (1933)에 작성된 첩으로 향교에서 고평문 高平文을 귀일면 (현 애월읍 하귀1리 일대) 훈장으로 추천하여 임명하는 문서이다.

 

 

 

 

 

 

제주향교

 

 

 

대정향교

 

 

 

제주향교 계성사

 

 

 

정의향교

 

 

 

 

 

 

제주향교 계성사 상량문 濟州鄕校啓聖祠上樑文

조선 1854년

제주기 1469, 2016년 오문복 기증

 

1854년 (철종 5) 제주향교 안에 있는 계성사 啓聖祠를 건립하면서 건립 배경과 일시 등을 적은 문서이다. 계성사는 유교의 다섯 성인 (五賢, 공자 · 맹자 · 안자 · 증자 · 자사)의 아버지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청원서 請願書

조선 1774년

제주기 1466, 2013년 오문복 기증

 

1774년 (갑오년) 10월 제주 유생이 어사 御使에게 올린 청원서이다. 제주도에 온 어사에게 계성사 啓聖祠를 짓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사는 일이 중대하니 천천히 상의하라고 하였다.

 

 

 

 

 

 

정의강사 旌義講射 (『탐라순력도 耽羅巡歷圖』)

조선 1703년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보물 652ㅡ6호, 복제품

 

1702년 11월 초4일 이형상 목사가 정의현에 머물면서 유생들이 글을 외워 말하는 시험과 활쏘기 시험을 치르는 장면이다. 도훈장 都訓長인 유학 幼學 고세웅 高世雄, 각 면 面의 훈장 訓長 5명, 교사장 敎射長 7명, 유학 儒學을 공부하는 사람 166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활쏘기 시험에는 87명이 응시하였다. 유생들은 붉은 단령을 입고 유건 儒巾을 쓴 채 글을 외우기 위해 앉아 있거나 객사 밖에서 대기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관아 오른쪽에는 활을 쏘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대정감사 大靜講射 (『탐라순력도 耽羅巡歷圖』)

조선 1703년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보물 652ㅡ6호, 복제품

1702년 11월 12일 대정현에서 열린 글을 외워 말하는 시험과 활쏘기 시험을 치르는 장면이다. 대정현 성 너머 파군산 破軍山에는 문묘 文廟라 표시된 대정향교가 보인다.

 

 

 

 

 

 

 

 

 

 

 

 

제주의 성과 관아 터

제주의 세 고을에서는 성을 쌓고 관아를 지어 방어와 행정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제주목 濟州牧은 둘레가 약 2.5㎞에 이르는 성을 쌓았습니다. 제주목 관아 터 발굴에서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銘瓦와 백자 白磁, 분청사기 粉靑沙器 등 많은 양의 유물들이 출토되어 제주목 관아의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 정의현 旌義縣은 제주 동남쪽 지역을 다스렸던 고을입니다. 현재 성읍민속마을이 그 중심지로 사라진 객사를 발굴하고 복원하였습니다. 제주의 서남쪽을 관할했던 대정현 大靜縣에도 둘레가 약 1,614m, 높이가 5.1m에 이르는 읍성이 세워졌는데, 현재 서귀포시 대정읍 일대에 그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제주읍성 성문 밖 돌하르방> 조선총독부 유리건판 사진, 1915

 

 

 

 

 

 

<제주읍성 성벽 일부> 조선총독부 유리건판 사진, 1915

 

 

 

<해안가에서 본 제주읍성 내 전경> 조선총독부 유리건판 사진, 1915

 

 

 

<제주 산지천과 망루> 조선총독부 유리건판 사진, 1915

 

 

 

 

 

 

옛 그림과 사진에 담긴 제주의 성과 관아

 

 

 

 

 

 

<관덕정 앞에서의 입춘굿놀이> 조선총독부 유리건판 사진, 1615

 

 

 

 

 

 

 

 

 

 

 

 

 

 

 

제주지도 (전라여지도) 濟州地圖 (全羅輿地圖)

조선 18세기

영남대학교박물관

복제품

 

전라여지도 가운데 제주지도이다. 과수원 果園은 작게 둥근 원으로, 25개의 봉수대는 횃불로, 방호소 防護小는 둥근 큰 원으로 표시하였다. 제주목은 가장 크게, 대정현은 그 다음 크기로, 정의현은 작게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지도 주변에는 일본 류큐 (오키나와)와 쓰시마, 일본, 전남 해안지방을 표현하였다.

 

 

 

 

 

 

제주읍성도 濟州邑城圖

조선 18세기

제주 3008, 2008년 구입

 

1702년에 건립된 삼성묘 三姓廟가 동문 안쪽에 있고, 1755년에 광양으로 이전된 향교가 성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제주성의 모습을 담은 지도로 추정된다. 도식적인 선으로 그려진 한라산과 읍성 모습이 이전의 다른 지도와 구별된다.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에서 이어진 하천이 남수각 南水閣을 통과하여 북수문 北水門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상단에는 한라산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적었다.

 

 

 

 

 

 

 

 

 

제주목 관아 터 출토품

조선 16 ~ 19세기

제주시 상도동 제주목 관아 터

제주 996 등, 1991 ~ 1998년 발굴

 

1991년부터 1998년까지 관아터를 발굴조사한 결과, 이곳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글자를 새긴 도자기와 기와 편들이 발굴되었다. 이 글자는 그릇을 바치거나 만든 사람의 이름 (대납, 초복, 막개 등), 관직명 (별관상) 등으로 보인다. 특히 "내섬" 은 "내섬시 內贍寺" 를 말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각 궁 宮과 전 殿에 공급하는 물품, 2품 二品 이상 관원에게 내리는 술, 일본과 여진에 보내는 음식물과 직조물 織造物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서였다.

 

 

 

 

 

 

정의현 관아 터 출토품

조선 15 ~ 17세기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제주 646 등, 2008 ~ 2009년 발굴

 

정의현은 지금의 성산읍과 표선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현성 안에는 객사를 중심으로 관아시설이 들어서 있으며 발굴조사 결과, 15 ~ 17세기의 도자기와 기와 등이 확인되었다. 1423년 (세종 5) 축조 당시의 성 둘레는 2,980척, 높이는 24척이었다고 한다. 치 雉 7개소, 문지 동 · 서 · 남 3개소, 정의향교와 향청인 일관헌 日觀軒 등과 성문 앞 돌하르방이 난아 있다.

 

 

 

 

 

 

대정현성 터 출토품

조선 16 ~ 19세기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제주 646 등, 2008년 발굴

 

대정현은 조선 1416년 (태종 16)에 제주도의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세워졌으며 2년 후에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성벽의 둘레는 약 1,614m, 높이 5.1m이며 대정읍 보성리 · 안성리 지역이 이에 속하고 제주 서남부지역의 정치 · 행정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성문은 동 · 서 · 남문 3개가 설치되어 있으며 『탐라순력도』에 의하면 성 안에 관아, 관청, 향청, 군기고, 객사 등의 건물과 우마를 가두웠던 축사가 표시되어 있어 그 규모를 가능할 수 있다. 지금은 성벽이 복원되어 있으며 성문 자리 앞에 성을 수호하고 지역의 경계를 알리는 돌하르방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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