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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좋은 글 .../최영미의 어떤 시 47

[해넘이의 마지막 인사]

[해넘이의 마지막 인사] 해넘이의 마지막 인사 거룩한 태양이 녹아들고 있었다. 하얀 바다 속으로 뜨겁게ㅡ 바닷가에 수도사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금발의 젊은이와 백발의 늙은이가. 늙은이는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쉬게 되리라. 이렇게 편안히ㅡ 젊은이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죽을 때도 영광의 광채가 내리기를. ㅡ 릴케 (1875 ~ 1926) (송영택 옮김) 릴케가 이런 시도 썼구나. 연약하고 낭만적인 감수성의 시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릴케의 시 세계는 바다처럼 넓고 깊다. 해가 넘어가는 황혼 무렵, 바닷가에 앉은 두 수도사를 (아마도 뒤에서) 바라보며 이런 거룩하고 심오한 생각을 하다니. 4행에 나오는 '금발의 젊은이'가 재미있다. 우리나라 시인이라면 '흑발의 젊은이'라고 했을 텐데, 유럽에서는..

[봄은 고양이로다]

[봄은 고양이로다] 봄은 고양이로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香氣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生氣 (생기)가 뛰놀아라. ㅡ 이장희 (1900 ~ 1929) 봄의 향기를 고양이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 시, 1920년대에도 이장희처럼 이미지로만 시를 쓴 시인이 있었다. 이 시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호동그란'이다. 호기심 많고 동그란 고양이의 눈이 금방 떠오르지 않나. 100여 년 전 이토록감각적이고 현대적인 시를 쓴 시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장희의 출생 연도 '1900년' 옆에 붙은 '고종 37'을 보니 그가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일러스트 = 양진경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김영랑 (1903 ~ 1950) (현대 표준어에 맞춰 수정함) 봄이 저만치 와 있다. 우리말로 쓰인 봄 노래 중에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처럼 보드라운 시가 또 있을까.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김영랑은 순수한 우리말을 살려 시를 짓는 데 뛰어난 시인이었다. '살포시' '보드레한'을 음미하노라면 마음이 밝아진다. 두 연의 1행과 2행이 '같이'로 끝나고 4행과 8행..

[이단 (李端)과의 이별]

[이단 (李端)과의 이별] / 일러스트 = 양진경 이단 (李端)과의 이별 고향 땅 여기저기 시든 풀잎이 뒤덮을 때 친구와의 헤어짐은 더없이 쓸쓸하였네 떠나는 길은 차가운 구름 너머로 이어지고 돌아올 땐 하필 저녁 눈이 흩날렸었지 어려서 부모 잃고 타향을 떠도는 신세 난리 통 겪는 중 우리 알게 됨이 너무 늦었네. 돌아보니 친구는 없고 애써 눈물을 감추니 이 풍진 세상 다시 만날 날은 언제일까 - 노윤 (盧綸 · 739 ~ 799년) ※ 류인 옮김, 원시 번역시와 다르게 행을 배치함 난리 통에 알게 된 친구는 얼마나 애틋할까. 이단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노윤의 시에 등장하는 난리는 중국 당나라를 뒤흔든 안녹산 (安祿山)과 사사명의 반란 (755 ~ 763년)을 뜻한다. 당대의 시인 두보 (杜甫)나 노윤의 시..

[맴돌다]

[맴돌다] 맴돌다 피그미 카멜레온은 죽을 때까지 평생 색깔을 바꾸려고 1제곱미터 안을 맴돌고 사하라 사막개미는 죽을 때까지 평생 먹이를 찾으려고 집에서 2밴 미터 안을 맴돈다 나는 죽을 때까지 평생 시를 찾으려고 몇 세제곱미터 안을 맴돌아야 하나 ㅡ 천양희 (1942 ~) 삶의 허무니 어쩌니 길게 말해 무엇하리. "너는 평생 몇 세제곱미터 안을 맴돌았니?"라고 물어보면 게임이 끝난다. 네가 아무리 잘난 척해도, 네 아무리 별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우리는 모두 맴돌다 가는 인생. 직업에 매인 사람이라면, 직장에 구속되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공감할 멋진 시. 피그미 카멜레온, 사하라 사막개미 그리고 인간, 서로 다른 동물들이 색깔과 먹이와 시를 찾아 각각 1제곱미터, 2백 미터, 몇 세제곱미터 안을 맴돌다..

[겨울 길을 간다]

[겨울 길을 간다] / 일러스트 = 김성규 겨울 길을 간다 겨울 길을 간다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 가을과 함께 서서히 옷을 벗으면 텅 빈 해질녘에 겨울이 오는 소리 문득 창을 열면 흰 눈 덮인 오솔길 (···) 먼 길에 목마른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길을 간다 ㅡ 이해인 (1945 ~ ) 새해를 맞이하며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을 읽었다. 성직 수녀라는 특수한 신분, 수녀원이라는 특별한 환경에서 잉태된 시들이기에 그의 시를 읽기 전에 어떤 선입견이 있었다. 간절하고 소박한 시구들을 찬찬히 음미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별다른 수식 없이 "겨울 길을 간다"로 시작되어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에 이르러 잠깐 쉬고 싶었다. 계절의 변화를 이토록 간단히 절묘하게 표현하다니. 봄날에..

[곡시 (哭詩) :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곡시 (哭詩) :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양진경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 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출생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 뭇 남자들이 다투어 그녀를 냉소하고 (···) 식민지 문단의 남류들은 죄의식 없이 한 여성을 능멸하고 따돌렸다 (···)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 (···) ㅡ 문정희 (1947년 ~)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무거운 내용을 담았으나 활달하고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문단에서 유폐되기 전에 그이의 천성은 활달하고 밝았다. 김명순을 기리는 '곡시 哭詩'를 쓴 문정희 선생도 활달하며 여성 문제에 대해 자신의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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