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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좋은 글 .../최영미의 어떤 시 47

[아담의 자손들 (Bani Adam)]

[아담의 자손들 (Bani Adam)] 아담의 자손들 (Bani Adam) 동일한 본질로부터 창조된 아담의 자식들은 서로 연결된 전체의 일부분이다. 한 구성원이 다치고 아플 때, 다른 사람들은 평화로이 지낼 수 없다.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다. ㅡ 사디 시라즈 (1210 ~ 1291 ?) 페르시아의 시인 사디가 쓴 '장미정원 (Gulistan)'에 나오는 '바니 아담 (Bani Adam)'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다지 매료되지 않았다. 인류애를 노래하는 시들은 많다. 시의 발상이 "어떤 이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는 존 던 (John Donne)의 문장을 연상시킨다. 존 던보다 350여 년 전, 인류애라는 개념이 희박하던 13세기에 페르시아 시인..

[바퀴 (The Wheel)]

[바퀴 (The Wheel)] / 일러스트=김하경 바퀴 (Wheel) 겨울이면 우리는 봄을 찾고 봄이 오면 여름을 애타게 부르며 생울타리가 이곳저곳 둘러쳐질 때면 겨울이 최고라고 선언한다 ; 그다음에는 좋은 것이 없다 왜냐하면 봄이 오지 않았기에ㅡ 우리의 피를 휘저어 놓는 건 무덤에 대한 갈망뿐임을 알지 못한다. ㅡ 예이츠 (1865 ~ 1939) 인생의 바퀴, 자연의 순환을 암시하는 '바퀴'라는 제목이 절묘하다. 봄과 여름 그리고 겨울이라는 단어는 있지만 '가을'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더 좋은 상태를 바라며 생을 보내다 갑자기 우리는 깨닫는다. 그때 우리가 가진 것이 최고였다는 사실을. 가을이 되어서야 부족해 보였던 봄과 여름이 나름 찬란했음을 아프게 깨달으리. '우리의 피를 ..

[장 소부 (張少府)에게 회답하다]

[장 소부 (張少府)에게 회답하다] / 일러스트=김성규 장 소부 (張少府)에게 회답하다 늘그막에 조용한 것만 좋아하게 되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어졌네. 돌이켜 보면 특별한 방책이 없다 보니 고향 산림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 불어오는 솔바람에 허리띠를 풀고 달빛 비치는 산 위에서 거문고 타네. 그대 곤궁에 달관하는 이치를 묻는가 강어귀 깊숙한 곳 어부 노래 들어보게 ㅡ 왕유 (701 ~ 761) (류인 옮김) 이백, 두보와 더불어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왕유가 그의 친구인 장 소부 (소부는 현령을 보좌하는 벼슬아치)에게 쓴 답시. 달빛 비치는 산 위에서 거문고를 타는 시인은 그다지 곤궁해 보이지 않는다. 왕유는 시만 아니라 그림과 음악에도 능한 예술가였다. 5행과 6행의 빼어난 자연 묘사는 한..

[봄에 꽃들은 세 번씩 핀다]

[봄에 꽃들은 세 번씩 핀다] 봄에 꽃들은 세 번씩 핀다 필 때 한 번 흩날릴 때 한 번 떨어져서 한 번 나뭇가지에서 한 번 허공에서 한 번 바닥에서 밑바닥에서도 한 번 더 봄 한 번에 나무들은 세 번씩 꽃 핀다 ㅡ 김경미 (1959 ~) 앙증맞고 순발력이 뛰어난 시. 꽃이 피어났다 흩날리다 떨어지는 찰나를 잡아서 언어의 꽃을 피웟다. 언어를 다루는 오랜 관록에서 우러난 군더더기없이 깔끔한 솜씨가 돋보인다. 피는가 싶었는데 벌써 지려고 시들시들···. 어떤 꽃을 보고 이런 예쁜 시를 썼을까? 목련은 아닌 것 같고 개나리도 진달래도 아니고, 벚꽃이 눈앞에 하늘거린다. 비처럼 허공에 휘날리는 벚꽃이 절정으로 치닫는 요즘 , 슬픔 없이 봄을 음미할 수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다. '봄에 꽃들은 세 번씩 핀다'는 ..

[저녁 식사]

[저녁 식사] / 일러스트=김성규 저녁 식사 교도소로 가야 합니다 남자에게 통역하고 법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 백화점에 들러 가다랑어 다타키를 사서 전철에 뛰어올라 좁은 자리에 엉덩이를 밀어 넣었다 오늘 맡은 사람은 생각보다 담담했나 (···) 집에 들어와 바로 쌀을 씻는다 반성하고 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남자의 말들이 질끔질끔 쌀뜨물을 타고 흘러 내려간다 (···) 갓 지은 흰쌀밥의 고소한 김을 맡고 (···) 교도소로 가야 합니다 남자에게 통역한 말 따위는 차가운 맥주를 목 뒤로 넘기면서 완벽하게 잊은 것처럼 들이켰다 ㅡ 정해옥 (丁海玉 · 1960 ~) (손유리 옮김) 정해옥은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 시인이다.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80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해 역사를 공..

[봄 (Spring)]

[봄 (Spring)] / 일러스트=양진경 봄 (Spring) 무슨 목적으로, 4월이여 너는 다시 돌아오는가? 아름다움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 크로커스의 뾰족한 끝을 지켜보는 나의 목덜미에 닿는 햇살이 뜨겁다. 흙 냄새가 좋다. 죽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사람의 뇌는 땅 속에서만 구더기에 먹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그 자체가 무 (無), 빈 술잔, 주단 깔지 않은 층계. 해마다, 이 언덕 아래로, 4월이 재잘거리며, 꽃 뿌리며 백치처럼 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ㅡ 빈센트 밀레이 (1892 ~ 1950) (최승자 옮김) 나는 햇살만으로 충분한데, 빈센트 밀레이는 욕심이 많네. 꽃 뿌리며 백치처럼 오는 4월. 우리 생애 이처럼 화창한 봄날이 다시 또 올..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담뱃대를 물고 들에 나가시니, 궂은 날도 곱게 개이고, 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입고 들에 나가시니, 가문 말도 비가 오시네. ㅡ 정지용 (1902 ~ ?) 외래어는 하나도 쓰지 않고, 한자어도 없이 순수한 우리말로만 쓴 아름답고 재미난 동시. '도롱이' 대신 우산을 쓰며 우리가 잃어버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생각한다. "하늘이 시커머니 어째 비가 올 것 같다"고 말하던, 귀신처럼 정확했던 그분들의 일기예보가 그립다.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정지용은 서구의 모더니즘을 받아들여 참신한 이미지와 정제된 언어가 돋보이는 시를 썼다. 일제강점기에 이토록 향토색이 진한 서정시를 쓴 시인이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정지용은 6 · 25 전쟁이 터진 뒤 피란하지 못..

[스팸메일]

[스팸메일] 스팸메일 소금에 절여진 혀가 죽음을 핥는다 (···) 통조림에 꾸역꾸역 채워 넣은 분홍빛 주검 (···) 오키나와에 집중된 통조림 스팸 소비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 진절머리 나는 전쟁의 맛 (···) 나도 보낼 테다 스팸메일을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에게 끝내 이름조차 알지 못할 사람에게 바로 스팸메일을 보내버릴 테다 인간의 어떤 본질이 선명하게 어린 메일을 대량으로 받아 보겠지 진절머리 나는 군용식품의 참을 수 없는 질문 같은 메일을 ㅡ 사가와 아키 (1954 ~) (한성례 옮김) 스팸 햄을 먹으며 통조림에 채워 넣은 분홍빛 주검을 떠올리고, 전쟁시의 비상 분쇄육 식품에서 '시대의 식도 (食道)'를 읽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전해준..

[지극한 즐거움을 읊어 성중에게 보이다]

[지극한 즐거움을 읊어 성중에게 보이다] 지극한 즐거움을 읊어 성중에게 보이다 뜰의 꽃 흐드러져도 보고 싶지 않고 음악 소리 쟁쟁 울려도 아무 관심 없네 좋은 술과 예쁜 자태에도 흥미 없으니 참으로 맛있는 것은 책 속에 있다네 ㅡ유희춘 (1513 ~ 1577) (강혜선 옮김) 차운하다 (次韻) 봄바람 아름다운 경치는 예부터 보던 것이요 달 아래 거문고 타는 것도 한 가지 한가로움이지요. 술 또한 근심을 잊게 하여 마음을 호탕하게 하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유독 책에만 빠져 있나요? ㅡ송덕봉 (1521 ~ 1578) (강혜선 옮김) (원시 번역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성중 (成仲)'은 이 시를 지은 선조 시대 문인인 유희춘의 부인 송덕봉의 다른 이름이다. 인생의 지극한 즐거움은 책에 있다고 자랑하는 남편의..

[구름과 목화]

[구름과 목화] / 일러스트=양진경 구름과 목화 몽실몽실 피어나는 구름을 보고 할머니는 "저것이 모두 다 목화였으면" 포실포실 일어나는 구름을 보고 아기는 "저것이 모두 다 솜사탕이었으면" 할머니와 아기가 양지에 앉아 구름 보고 서로 각각 생각합니다. ㅡ권태응 (1918 ~ 1951)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백하고 고운 동시. 할머니와 아기가 양지에 앉아 흰 구름을 바라보는 풍경을 상상만 해도 머리가 깨끗해진다. 3행이 1연을 이루며 각 연의 1행과 2행의 글자 수가 같고 서로 대구를 이루는, 단순하면서도 정교하게 짜인 구성. 구름을 바라보는 할머니와 아기를 보고 시인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이렇게 입체적이며 철학적인 시가 나왔다. 어느 날 어느 때 똑같은 사물을 보고 우리는 각자의 처지와 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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