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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혈전 14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㊿ 구름처럼 몰려오는 위기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㊿ 구름처럼 몰려오는 위기 방어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미군과의 연결점을 제대로 이었지만, 막대한 병력과 화력을 앞세우고 강렬한 기세로 몰려오는 적 앞에서 왜관~포항을 잇는 Y축선 서쪽 끝의 국군 1사단 방어선은 여지없이 흔들릴 기세였다. 미군이 건넨 3.5인치 로켓포 … 더이상 탱크가 두렵지 않았다 경북 상주에서 다부동, 그리고 대구를 잇는 간선로는 적이 집중적으로 노린 공격선이다. Y선 동쪽 지역의 국군 방어선도 적의 강한 공세를 받고 있었지만, 1사단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나는 15연대를 좌익, 12연대를 가운데, 11연대를 우익에 배치했다. 방어 전면은 21㎞였다. 사단의 예비 병력을 별도로 두지 않고 3개 연대를 모두 전선에 세운 것이다. 적의 공격에 한..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㊾ 한데 묶인 국군과 미군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㊾ 한데 묶인 국군과 미군 1950년 8월 12일이다. 북한군의 공세가 계속 거세지면서 우리 1사단이 연대별로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대구에 있는 미 8군 사령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사단 사령부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303고지’에 나가 보라는 것이었다. 우리 사단의 15연대가 방어를 맡고 있던 지역이었다. 왜관 X-Y축 꼭짓점에서 180㎞ 낙동강 방어선이 완성됐다 미 8군은 “사단장이 직접 나가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왜관 지역을 방어하는 미 1기병사단과 접촉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15연대장 최영희 대령과 참모를 대동하고 303 고지 쪽으로 갔다. 미군들이 나와 있었다. 미 1기병 사단 8기병 연대 2대대장 해럴드 존슨 중령(사..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㊽ 김일성의 조바심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㊽ 김일성의 조바심 1950년 여름 낙동강 전선 상황은 험악했다. 미 24사단의 방어를 뚫고 내려온 북한군 3사단(사단장 이영호)이 우리의 정면을 공격해 들어왔다. 전반적으로 다부동을 압박하는 적의 주공(主攻)이었다. 이화령과 조령을 넘어온 적 15사단(사단장 박성철)과 13사단(사단장 최용진)도 여기에 가세했다. 이들을 맞는 국군 1사단은 후퇴하면서 합쳤던 5사단 병력까지 모두 포함해도 9000명이 채 안 됐다. 정규적인 1개 사단 병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3개 사단에 전차와 대포로 무장한 적을 맞았던 것이다. “8·15까지 부산 점령하라” 김일성 수안보까지 내려와 독려 김일성의 발이 바빠지고 있었다. 그는 개전 초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얼마 안 있..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㊼ 최후의 방어선에 도달하다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㊼ 최후의 방어선에 도달하다 나는 광범위한 낙동강 41㎞ 전선에서 가까스로 적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각 연대 예비 병력으로 야간에 치고 들어온 적군을 역습함으로써 주요 거점을 지킬 수 있었던 게 한 요인이다. 미군의 공중 지원도 큰 역할을 했다. 미 공군은 우리가 지원 요청을 하면 일본 후쿠오카(福岡)의 이타즈케(板付) 공군기지에서 폭격기를 발진시켜 30분 이내에 아군 상공으로 날아왔다. 이들은 한 차례 비행에서 두어 시간씩 폭격을 퍼부었다. 적군은 전차와 야포 및 주력 부대를 현지의 수많은 사과밭이나 야산에 숨겨 뒀다가 어두운 밤을 이용해 공격해 왔다. 이곳 다부동마저 뚫리면, 대한민국은 지도에서 사라진다 국군 1사단 작전처 소속이었던 남성인 중위는 공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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