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낙동강 혈전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㊽ 김일성의 조바심

드무2 2021. 6. 9. 12:37
728x90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㊽ 김일성의 조바심

 

 

 

1950년 여름 낙동강 전선 상황은 험악했다. 미 24사단의 방어를 뚫고 내려온 북한군 3사단(사단장 이영호)이 우리의 정면을 공격해 들어왔다. 전반적으로 다부동을 압박하는 적의 주공(主攻)이었다. 이화령과 조령을 넘어온 적 15사단(사단장 박성철)과 13사단(사단장 최용진)도 여기에 가세했다. 이들을 맞는 국군 1사단은 후퇴하면서 합쳤던 5사단 병력까지 모두 포함해도 9000명이 채 안 됐다. 정규적인 1개 사단 병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3개 사단에 전차와 대포로 무장한 적을 맞았던 것이다.


“8·15까지 부산 점령하라” 김일성 수안보까지 내려와 독려

 

 

김일성의 발이 바빠지고 있었다. 그는 개전 초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얼마 안 있다 대한민국 수도에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나 국군의 지연전이 펼쳐지고, 미군의 개입이 본격화하면서 조바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전쟁을 일으키면 남한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면서 북한군을 맞아들일 것으로 착각했다. 아울러 미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혈기가 방장했지만, 그는 아직 젊고 미숙했다. 거대한 침략 전쟁을 일으키면서 정작 그것이 무엇을 몰고 올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서울에서 잠시 체류한 뒤 소련제 지프 가즈(Gaz)-67에 올라타고서 경부(京釜) 축선을 따라 충청북도 수안보까지 내려왔다.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가 수안보에 내려온 시점은 7월 20일이다. 국군과 미군 등이 낙동강 전선으로 밀리기 직전이었다.



김일성은 강건 인민군 총참모장을 대동하고 그곳에 내려와 전선 회의를 주재했다.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해 통일 전쟁을 끝내라”고 지시했다. “올해 광복절을 남조선 해방 축제일로 만들라”고까지 했다. 김일성은 더 구체적인 작전 지도를 했다. 정면으로만 공격할 것이 아니라 산길이나 산등성이를 따라 우회해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을 시도하라고 지시했다.



북한군의 공세를 일선에서 총지휘했던 김책은 그 뒤 김천까지 내려왔다. 그곳에서 김일성의 지시 사항을 실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적은 전선 부대를 계속 앞으로 내모는 독전대(督戰隊)까지 동원했다. 등 뒤에 총구를 겨누고 후퇴하는 병사에게는 무조건 사격을 해대는 독전대의 가혹함 때문에 앞에 섰던 북한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 쪽으로 계속 전진해 왔다.

 

 

 

남침을 주도한 김일성(앞줄 오른쪽)이 6 · 25 전쟁에 참전했다가 1차로 귀국하는 중공군 부대 송별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김일성은 개전 초반의 승세에도 불구하고 국군의 지연전, 미군의 참전 등으로 조바심을 보여 1950년 7월 20일 충북 수안보까지 내려와 독전했다. [중국 해방군 화보사]

 

 

 

역사의 씨줄과 날줄을 이리저리 펼치다 보면 나는 김일성과 여기저기서 부닥친다. 내가 태어난 평안남도 강서(江西)군에 바로 붙은 대동(大同)군이 김일성의 고향이다. 젊었을 때 그를 가까이서 접촉하기도 했다. 평양에서 해방 뒤 그가 처음 얼굴을 드러냈던 연설장에 내가 서 있었고, 민족 지도자 조만식 선생의 비서실에서 근무할 때 그곳을 드나들던 젊은 김일성을 두어 차례 본 적이 있다.



김일성은 활달하면서 언변이 좋다는 인상을 풍기는 인물이었다. 그가 6·25전쟁을 일으켜 남한을 침공한 뒤 서울에 잠시 체류했을 때, 이상하게도 이승만 대통령이 거주하던 경무대는 파손하지 않았다. 건물도 그대로 뒀고 그 안의 집기류 등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나중에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한 1·4 후퇴 당시 경무대가 많이 손상된 점을 보면 이는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그는 왜 경무대를 그대로 보존하도록 했을까.



전시에 북한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유물(遺物)들을 잘 보관했다고 들었다. 북한은 국군과 미군 등의 반격에 밀려 평양을 내주고 쫓겨갈 때도 고문서와 도자기·불상 등 과거 왕조시대 유물들을 잘 챙겨 강계(옛 중강진)까지 옮겼다. 그들은 스스로 그 과정을 가리켜 “일시적이면서 조직적이고, 전략적인 후퇴”라며 자랑하고 있다.



역사가 남기는 유물을 존중한다는 마음이 김일성에게 있었을까. 그래서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거처인 경무대를 파손하지 않고 그대로 뒀던 것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설령 그런 마음이 있었을지라도 그는 어쨌든 역사의 죄인이다. 6·25전쟁을 일으킴으로써 한민족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조상의 문화유산도 수없이 사라졌다. 천고(千古)에 남을 역사적 죄인인 셈이다.



우리가 다부동에 포진하고 본격적인 방어에 나선 8월 초순에 김일성의 조바심은 극에 달했다. 1사단이 맡은 방어 전면에서 붙잡힌 북한군 포로는 “8월 15일까지 부산마저 점령한다는 계획은 어긋났다. 대구만이라도 그때까지 점령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실토했다. 독전대의 총구 앞에 선 북한군과 남한 지역에서 강제로 징집한 ‘의용군(義勇軍)’의 집요한 공세가 시작되고 있었다. 고려를 세웠던 왕건은 팔공산과 수암산 등지에서 후백제 세력과 맞붙었다. 견훤을 상대로 왕건이 벌였던 같은 민족끼리의 싸움이 옛날의 바로 그 무대에서 다시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김책=함경북도 학성군 출생으로 1903년생이다. 어린 시절 중국 옌지(延吉)로 이주했으며, 1940년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과 만나 같이 행동했다. 36년에는 조국광복회를 조직하는 데 가담했다. 동북항일연군이 소련에 들어가 재편된 소련 극동군 88국제여단에서도 김일성과 함께 있었다. 당시에는 김과 동급의 대우를 받았다. 나중에 북한이 정부를 수립한 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부수상 겸 산업상을 지내는 등 북한 정권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6·25전쟁을 맞았으며, 전선사령관을 겸하다가 51년 1월 30일 평양에서 심근경색으로 급사했다. 사후에 ‘공화국 영웅’으로 추서돼 김책(옛 성진)시와 김책제철소,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㊽ 김일성의 조바심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