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㊿ 구름처럼 몰려오는 위기
방어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미군과의 연결점을 제대로 이었지만, 막대한 병력과 화력을 앞세우고 강렬한 기세로 몰려오는 적 앞에서 왜관~포항을 잇는 Y축선 서쪽 끝의 국군 1사단 방어선은 여지없이 흔들릴 기세였다.
미군이 건넨 3.5인치 로켓포 … 더이상 탱크가 두렵지 않았다
경북 상주에서 다부동, 그리고 대구를 잇는 간선로는 적이 집중적으로 노린 공격선이다. Y선 동쪽 지역의 국군 방어선도 적의 강한 공세를 받고 있었지만, 1사단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나는 15연대를 좌익, 12연대를 가운데, 11연대를 우익에 배치했다. 방어 전면은 21㎞였다. 사단의 예비 병력을 별도로 두지 않고 3개 연대를 모두 전선에 세운 것이다. 적의 공격에 한 지점이 뚫릴 경우 그를 막기 위해 동원할 예비 병력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1950년 8월 초 다부동 남쪽 동명초등학교에 CP를 차린 뒤 위기 상황이 점점 깊어졌다. 8월 10일을 넘으면서 전황(戰況)이 더 악화하고 있었다.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고, 사상(死傷) 병력이 점차 늘어났다. 중순을 넘으면서 매일 평균 700명이 다치거나 전사하고 있었다. 이를 알려주는 사단 참모의 보고를 들을 때마다 입술이 타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8월 13일에는 사단 좌측의 미 1기병 사단을 공격하던 북한군 3사단이 우리 사단의 15연대로 돌아 들어와 공격을 시작했다. 유학산(遊鶴山) 일대에는 적 15사단, 우익인 11연대 정면에서는 적 13사단이 공격해 들어왔다. 아군 1개 연대가 적 1개 사단을 맞아 싸우는 형국이었다.
고지(高地)를 선점하기 위한 싸움이 불붙고 있었다. 먼저, 높은 곳에 올라 아래쪽에 있는 적을 내려다보면서 대응하는 ‘감제(瞰制)’의 유리함을 얻기 위해서는 고지를 차지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다부동 일대의 고지들은 이를 뺏고 지키려는 아군과 적군의 공방으로 짙은 피 냄새를 풍겨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위안은 있었다. 전황이 하루가 다르게 악화하면서 고민이 깊어질 때였다. 미군 스리쿼터(짐을 싣는 자동차로 지프와 트럭의 중간급) 한 대가 사단 CP인 동명초등학교 정문을 들어섰다. 먼지를 휘날리면서 들어선 스리쿼터 뒤에는 짐이 무겁게 보일 정도로 실려 있었다. 차에서 미군 장교와 하사관 두 명이 내렸다.
경황이 없었던지 지금은 그 장교의 이름과 계급도 기억하지 못한다. 미군 장교는 “사단장께 직접 말씀 드려야 할 사안”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새로 만든 무기를 가지고 왔는데, 사단장께 전해 드리고 다짐을 받을 게 있다”고 강조했다. 아주 진지하기만 한 그의 표정을 보고 나니까 ‘도대체 뭘 가져왔기에 이 정도일까’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6 · 25전쟁 개전 초기 국군에게 ‘공포의 무기’였던 소련제 T-34 전차는 미군이 3.5인치 로켓포를 들여오면서 맥을 추지 못했다. 새로 지급받은 3.5인치 로켓포로 사격을 준비하고 있는 미군. [미 육군부 자료]
장교는 하사관들에게 짐칸에서 뭔가를 내리게 했다. 처음 보는 길고 큰 로켓포였다. 순간 내 마음속으로 ‘참 근사하게 생긴 로켓포구나’라는 감탄이 터지고 말았다. 우리가 전쟁이 벌어지면서 지녔던 로켓포는 2.35인치짜리다. 그것에 비해 훨씬 큰 3.5인치 로켓포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성능을 물었다. 그 장교는 “적군 탱크 철갑을 충분히 뚫을 만큼 성능이 좋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정말 적의 탱크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냐”고 내가 거듭 물었다. 그는 “그 점에서는 절대 걱정하지 마시라”고 확실하게 대답했다.
나는 호기심이 더 일었다. “포탄을 좀 보자”고 요구했더니, “저 뒤에 실어 놓았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래도 포탄을 가져와 보여 달라는 말에 “안전 문제 때문에 포탄은 사단장 옆에 갖다 놓을 수 없다”고 했다. 장교는 대신 “이 로켓포를 절대 적군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며 “그 점을 분명히 약속 받고 싶다. 철저히 관리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들이 돌아간 뒤 나는 5문의 로켓포를 배분했다. 15·12연대에 각 2문, 11연대에 1문을 보냈다. 12연대의 연대장은 당시 둘이었다. 김점곤 대령과 박기병 대령이다. 1사단이 지연전을 펼치며 내려오다가 5사단 병력을 우리 사단에 받아 합쳤기 때문이다. 박기병 대령의 병사가 이 로켓포로 곧 전과를 올렸다. 낙동강 연안으로 진출한 12연대의 사병이 적 전차 4대를 잡은 것이다. 그중 1대는 완전 파괴하지 않고 포획했다. 이 전차는 훗날 대구에 전시했다가 현재는 육군사관학교에서 보관 중이다.
아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북한군 탱크의 모습. [미 육군부 자료]
우리는 이 전선에서 새로 보급된 3.5인치 로켓포로 적 전차 10대가량을 부쉈다.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았다. 6·25가 벌어지면서 국군은 적군의 전차에 맥을 못 췄다. 소련제 T-34 전차는 북한군 화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2.35인치 로켓포로는 그 탱크를 잡지 못했다. 이제 그 북한군 화력의 상징인 전차를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새 무기를 손에 넣은 것이다.
적의 공세가 치열해지는 와중에 도착한 미군의 새 무기다. 이로써 모종의 전기(轉機)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생겨났다. 물론 그 무기 하나로 큰 전기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의 거센 공격 앞에서 노심초사하던 내 마음에는 이 무기가 작지만 강한 위안이었던 점만은 분명했다.
백선엽 장군
[출처: 중앙일보] [6·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㊿ 구름처럼 몰려오는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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