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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43

[아침 식사]

[아침 식사] 일러스트 = 이철원 아침 식사 그이는 잔에 커피를 담았지 그이는 커피잔에 우유를 넣었지 (···) 그이는 커피를 마셨지 그리고 그이는 잔을 내려놓았지 (···) 그이는 일어났지 그이는 머리에 모자를 썼지 그이는 비옷을 입었지 비가 오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이는 빗속으로 가버렸지 말 한 마디 없이, 나는 보지도 않고 그래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어 버렸지. ㅡ 자크 프레베르 (1900 ~ 1977) (김화영 옮김) 때는 아침, 장소는 카페인가 가정집인가? 적당히 붐비는 카페는 헤어지기 좋은 장소이다. 짧게 끊긴 문장들이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시나리오 같은 시. 한 행의 길이가 아주 짧다. 커피를 마시고 빗속으로 떠난 남자의 몇 분간을 카메라처럼 담담하게 묘사했다. 자크 프레베르 (1900..

[행복 2]

[행복 2] 일러스트 = 이지원 행복 2 저녁에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ㅡ 나태주 (1945~)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집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삶의 질은 너무 다르다. 집은 쉬는 곳이다. 쉬어야 인간은 산다. 내 집이 있다면,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도 외로울 때 혼자 부를 노래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시를 언제 쓰셨을까? ‘행복 1′ 보다 나중에 썼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행복 1′ 을 찾아보았다. “딸아이의 머리를 빗겨주는 / 뚱뚱한 아내를 바라볼 때 / 잠시 나는 행복하다 / (…) / 꿈꾸는 듯 귀여운 작은 숙녀 / 딸아이를 바라볼 때 / 나는 잠시 더 행..

[장마]

[장마] 장마 내 머리칼에 젖은 비 어깨에서 허리께로 줄달음치는 비 맥없이 늘어진 손바닥에도 억수로 비가 내리지 않느냐, 비여 나를 사랑해 다오. 저녁이라 하긴 어둠 이슥한 심야 (深夜)라 하긴 무슨 빛 감도는 이 한밤의 골목 어귀를 온몸에 비를 맞으며 내가 가지 않느냐, 비여 나를 용서해 다오. ㅡ 천상병 (1930 ~ 1993) 천상병 시인이 서른 살이던 1961년에 발표한 시. 어이하여 그처럼 젊은 나이에 용서를 알게 되었나. 그의 인생 역정을 내가 다 알까마는, 내려치는 비를 우산도 없이 맞으며 ‘용서’ 를 빌 만큼 시인이 부모나 가족, 친구들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을까. 가난이 죄였겠지. 우리 몸의 아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어떤 시는 우리를 치유하고, 순진무구한 어떤 시는 종교의 경지에 이르기도..

[우산]

[우산] 우산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흰 척추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ㅡ 박연준 (1980 ~) 우산을 소재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애정을 가지고 살펴보면 우리 주위의 모든 사물이 시의 재료가 될 수 있다. 깜찍하고 발랄하고 감각적인 언어에서 젊음이 느껴진다. 시인은 우산이 되어, 비를 기다리는 우산의 마음을 헤아린다. 비가 오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

[꿈같은 이야기]

[꿈같은 이야기] 일러스트=박상훈 꿈같은 이야기 내가 뭔가 말하면 모두가 바로 웃으며 달려들어 "꿈같은 이야기는 하지 마" 해서 나조차도 그런가 싶어진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어서 그 꿈같은 이야기를 진심으로 꿈꾸려 한다 그런 터라 이제 친구들은 놀리지도 않는다 "또 그 이야기야!" 하는 투다 그런데도 꿈을 버리지 못해서 나 홀로 쩔쩔매고 있다. ㅡ 김시종 (1929 ~) (곽형덕 옮김) 나도 내 꿈을 여태 버리지 못해서 홀로 쩔쩔매고 있다. 버릴 수 있다면 꿈이 아니겠지. 꿈이 없다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라고 어느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지평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네가 서 있는 그곳이 지평이다” 라는 묵직한 서문으로 시작하는 재일(在日) 시인 김시종의 시집 ‘지평선’..

[주먹]

[주먹] 주먹 나보다 부자인 친구에게 동정받아서 혹은 나보다 강한 친구에게 놀림당해서 울컥 화가 나 주먹을 휘둘렀을 때, 화나지 않는 또 하나의 마음이 죄인처럼 공손히 그 성난 마음 한편 구석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ㅡ 미덥지 못함. 아아, 그 미덥지 못함. 하는 짓이 곤란한 주먹을 가지고, 너는 누구를 칠 것인가. 친구인가 너 자신인가, 그렇지 않으면 또 죄 없는 옆의 기둥인가. ㅡ 이시카와 다쿠보쿠 (1886 ~ 1912) (손순옥 옮김) 다쿠보쿠의 시에서 내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치밀한 묘사, 자신을 치열하게 들여다보는 눈이다. 친구에게 화가 나 주먹을 휘두른 뒤 자신을 반성하고 분석하는 눈, 현대인의 고독한 눈, 그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시인이 화를 참지 못해 주..

[6월의 밤 (June Night)]

[6월의 밤 (June Night)] 6월의 밤 (June Night) 오 대지여, 너는 오늘밤 너무 사랑스러워 비의 향기가 여기저기 떠돌고 멀리 바다의 깊은 목소리가 땅에게 말을 걸고 있는데 내 어떻게 잠들 수 있으리오? 오 대지여, 너는 내게 모든 것을 주었지, 널 사랑해, 사랑해ㅡㅡ 오 나는 무엇을 가졌나? 너의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줄 수 있는 건ㅡ 내가 죽은 뒤 나의 육신밖에 없네. ㅡ 사라 티즈데일 (1884 ~ 1933) 가슴을 찌르는 마지막 행이 없다면 그렇고 그런 밋밋한 시가 되었을 텐데, 역시 사라 티즈테일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아말휘의 밤 노래 (Night Song at Amalfi)' 를 읽은 뒤 그녀의 시에 매료되어 아말휘 바닷가를 찾아갔던 젊은 날이 떠오른다. 사라..

[무화과 숲]

[무화과 숲] 일러스트 = 박상훈 무화과 숲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ㅡ 황인찬 (1988 ~)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 신선해 보고 또 보았다. 시인이 젊으니까, 뭘해서 가끔 혼나기도 하는 나이니까 이런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나. 사랑해서, 혹은 사랑하지 않아서 혼이 난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아침에 아침을 먹고 저녁에 저녁을 먹듯 사랑이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젊음의 치기가 느껴지는 시. 젊지만 노련한 '쌀' 로 시작해 '꿈이었다' 로 끝나는 정교한 작품이다. 무화과는 내가 좋아하는 과일. 겉은 거칠게 생겼지만 안은..

[가는 봄이여 /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 소리]

[가는 봄이여 /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 소리] / 일러스트 = 박상훈 가는 봄이여 가는 봄이여 새 울고 물고기의 눈에는 눈물 ㅡ 마쓰오 바쇼 (1644 ~ 1694) (김정례 옮김) 하이쿠 (일본의 짧은 정형시)가 촘촘히 박혀있는 바쇼의 기행문 '오쿠로 가는 작은 길' 을 다시 읽었다. 친하게 지내던 이들과 헤어져 여행을 떠나는 감회를 적은 '가는 봄이여' 에서 가장 뜨거운 단어는 '눈물' 이다. 바쇼의 글에는 '눈물'이 자주 나온다. 눈물이 많아지는 나이 46세에 제자 소라와 함께 에도 (도쿄)를 떠난 바쇼는 2400킬로미터 먼 길을 걸어서 여행했다. '눈물'은 하급무사 출신 방랑시인 바쇼의 서민적 성정을 드러내는 특징일 수도 있다. '새 울고'로 자신의 울음을 감추고 얼마나 슬프면 물고기의 눈에서 눈..

[아담의 자손들 (Bani Adam)]

[아담의 자손들 (Bani Adam)] 아담의 자손들 (Bani Adam) 동일한 본질로부터 창조된 아담의 자식들은 서로 연결된 전체의 일부분이다. 한 구성원이 다치고 아플 때, 다른 사람들은 평화로이 지낼 수 없다.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다. ㅡ 사디 시라즈 (1210 ~ 1291 ?) 페르시아의 시인 사디가 쓴 '장미정원 (Gulistan)'에 나오는 '바니 아담 (Bani Adam)'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다지 매료되지 않았다. 인류애를 노래하는 시들은 많다. 시의 발상이 "어떤 이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는 존 던 (John Donne)의 문장을 연상시킨다. 존 던보다 350여 년 전, 인류애라는 개념이 희박하던 13세기에 페르시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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