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기념관 등

[화교역사관] 01

드무2 2024. 2. 8.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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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역사관] 01

 

 

 

 

 

 

 

 

 

 

 

 

니하오 ! 나의 살던 고향은

 

화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882년으로, 임오군란 때 한국에 파견된 군대를 따라 40여 명의 상인이 입국하였는데 이들이 한국화교의 시초이다. 그해 '상민수륙무역장정 (商民水陸貿易章程)' 을 체결하고 1884년 인천, 1887년 부산, 1889년 원산에 화상조계지 (華商租界地)가 설치됨에 따라 당시 화교 수는 인천에만 1,000명을 넘었다. 세계 어느 곳이든 화교들이 살고 있는 마을 앞에는 패루를 세웠다. 이것은 마을의 영역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마을 외부로부터 나쁜 것을 막아주는 벽사의 의미를 지녔다. 인천 차이나타운에도 중국 산동성에서 기와와 재료를 가져와 지었던 인천역 앞 제1패루 외에도 한중문화관 앞에 제2패루 (인화문),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곳에 있는 제3패루 (선린문)가 세워져 있다. 한국 화교는 19세기 말부터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에 건너온 중국인과 그 후손들이며, 국적은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이다.

화교는 크게 세 부류로 구분되는데, 화인 (華人)과 화교 (華僑)로 나뉜다. 화인은 현지의 국적을 취득하여 중국 국적을 지니지 않은 집단을 지칭하고, 화교는 중국의 국적을 그대로 유지한 집단을 말한다. 화예는 자신을 현지교민사회의 일원으로 인식하지는 않지만 단지 문화적으로 자신들의 부계 조상이 중국으로부터 건너왔다고 생각하는 집단을 말한다. 한국 화교는 계속 감소 추세에 있어 현재 약 2만 여 명에 불과하지만 뚜렷한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한 채 위상을 지키고 있다. 한국 화교의 고향은 산동성 출신이 90%를 차지한다. 가족 단위의 집단 이민 대신 주로 가장이나 아들을 중심으로 개별적이며 한시적인 이주를 선호했는데, 초기부터 남성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이었고 한국인 여성과의 결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인천 화교의 발자취

 

 

 

1882년 ~ 1899년

 

ㅡ 화교 사회의 형성 ㅡ

 

1882년 ㅡ 조선ㅡ청 무역 협정 체결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1882년 ㅡ 임오군란 (壬午軍亂) 당시, 청국군인 군수보급품을 위한 40여 명의 상인 국내 입국

1883년 ㅡ 인천 개항

1884년 ㅡ 인천구화상지계장정

             ㅡ 청국조계지 (淸國租界地) 설정

             ㅡ 청국영사관 건립

1893년 ㅡ 위안스카이 조선으로 부임하여 통상업무 시작

1893년 ㅡ 의선당 (義善堂) 건립

1894년 ㅡ 갑오농민전쟁, 청일전쟁 발발

1895년 ㅡ 을미사변

1896년 ㅡ 아관파천, 독립협회 창건

1899년 ㅡ 경인선 개통

 

 

 

 

 

 

 

 

 

경극 공연을 위한 모자

현대      인천화교협회

 

 

 

1900년 ~ 1937년

 

ㅡ 화교 사회의 정착과 변동 ㅡ

 

1900년 ㅡ 의화단 (義和團) 사건 발발

1901년 ㅡ 의화단 운동 (의화단의 근거지인 산동성의 전란을 피해 조선으로 대거 피난)

1902년 ㅡ 인천화교소학교 (現 仁川華僑 中山學校) 개교

1908년 ㅡ 청 광서제 붕어, 선통위 즉위

1910년 ㅡ 일본 강점통치 시작

1911년 ㅡ 신해혁명

1912년 ㅡ 청 멸망, 쑨원 중화민국 건국

1912년 ㅡ 중화민국 건국, 공화춘 개업

1913년 ㅡ 인천, 부산, 원산의 중화민국 조계 폐지

1917년 ㅡ 인천중화기독교회 건립

1918년 ㅡ 중화루 (中華樓) 개업 (대불호텔 인수)

1919년 ㅡ 3 · 1운동, 5 · 4운동. 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 수립

1921년 ㅡ 중국 공산당 창립

1925년 ㅡ 쑨원 병사, 장제스 후계자 계승

1931년 ㅡ 만주사변, 만보산 사건 발발

1934년 ㅡ 인천중산중학교 개교

1936년 ㅡ 서안사변과 2차 국공합작

1937년 ㅡ 중일전쟁 발발

 

 

 

 

 

 

1940년 ~ 1980년

 

ㅡ 화교사회의 시련과 변화 ㅡ

 

1945년 ㅡ 8 · 15 일본 항복

1945년 ㅡ 11월 중국 국공내전 시작

1947년 ㅡ 중국 공산당 만주에서 인민정부 수립

1948년 ㅡ 5월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 취임

             ㅡ 12월 베이징이 중국 공산당의 손에 들어감

1948년 ㅡ 8 · 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민 규제 정책

1949년 ㅡ 10 · 1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및 한중 국교 단절

             ㅡ 12월 중화민국 대만으로 이전

1950년 ㅡ 6 · 25 전쟁 발발, 중국 개입

1957년 ㅡ 인천화교학교, 중고등학교 과정 신설

1961년 ㅡ 외국인 토지소유에 관한 법령 발표

1962년 ㅡ 제2차 화폐개혁

1964년 ㅡ 화교 소학교 고중부 (高中部) 증설

             ㅡ 인천 화교중산소학교 (仁川華僑中山小學校) 설립

1968년 ㅡ 외국인 토지 소유금지 완화

1971년 ㅡ 중국 UN 가입

1975년 ㅡ 4월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 사망

1976년 ㅡ 1월 저우언라이 사망, 9월 마오쩌뚱 사망

1979년 ㅡ 미 · 중 국교 정상화

 

 

 

 

 

 

경극 공연을 위한 모자

현대    인천화교협회

 

 

 

1990년 ~ 2005년

 

ㅡ 청관 (靑官)에서 차이나타운으로의 도약 ㅡ

 

1992년 ㅡ 한중 국교 수립

1997년 ㅡ 덩 샤오핑 사망, 홍콩의 주권을 회복

1998년 ㅡ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 해제

1999년 ㅡ 마카오의 주권을 회복

2000년 ㅡ 차이나타운 활성화 계획 수립

2001년 ㅡ 월미관광특구 지정 (인천 차이나타운 본격적 개발)

2002년 ㅡ 화교의 영주권 인정

2005년 ㅡ 한중문화관 (韓中文化館) 개관

             ㅡ 제8차 화상대회 개최 (서울)

 

 

2006년 ~ 현재

 

ㅡ 다문화의 상징, '중국인 마을' 로 성장 ㅡ

 

2006년 ㅡ 5 · 31 지방선거 화교 첫 투표

             ㅡ 차이나타운 지역 특화발전 특구지정

2007년 ㅡ 한중수교 15주년 기념 '한중교류의 해' 거행

2008년 ㅡ 베이징 올림픽

2012년 ㅡ 짜장면 박물관 개관

 

 

 

 

 

 

 

 

 

왜 인천으로 모였을까요?

 

한국 역사에서 바다를 통한 중국과의 교류는 인천의 능허대 (凌虛臺)에서 처음으로 시작됐다. 백제 근초고왕 때 (372년)의 일로 지금부터 약 1,600여 년 전의 일이다. 그 후 100여 년간 인천 지역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중요한 관문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인천의 영종도에 경원정 (慶源亭)이라는 객관을 세워 중국 사신을 접대했다. 인천에서 출발하여 덕적도와 옹진반도를 거쳐 중국 산동반도의 등주에 이르는 항로는 2 ~ 3일 정도에 횡단할 수 있는 가장 짧은 거리라는 이점이 있었다.

1883년 인천과 상하이의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1달에 한번 배가 들어오는 상황을 계기로 인천에 중국인들이 내항했다. 1년 뒤 선린동 일대의 구릉지대 약 5천 평 규모의 청국 조계가 설정되면서 화교의 이주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중국인의 출입 관리를 위해 청국영사관 등을 위시한 관리들이 인천에 거주하였고 이러한 상황에 인천의 청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1900년 의화단 (義和團)의 북청사변 (北淸事變)으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일대 중국인들이 피난차 가까운 한국으로 대거 건너오기 시작하였는데, 주로 인천을 자신들의 집결지로 삼았기 때문에 인천은 부지불식간에 화교들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서울과 함께 화교들의 양대 세력권이 되었다.

 

 

 

화교들의 이발도구 체도

근대    소장자 : 최웅규

 

 

 

개항기 개척의 상징 싼바다오 (三把刀)

 

싼바다오는 채도 (菜刀 · 식칼), 전도 (剪刀 · 재단칼), 체도 (剃刀 · 면도칼)의 세 종류 칼로서 각각 요리, 재봉, 이발 기술을 의미한다. 노동자로 왔다가 돈을 조금 모은 사람들은 이 업종들에서 좀 더 안정적이고 수입 좋은 일자리를 찾았고, 무역상을 하다가 일본 상인에게 밀려 망한 사람들도 이 업종들을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화교의 직업은 크게 무역 및 상점을 운영하는 상인, 도시 주변에서 야채를 재배하는 농민과 '쿨리' 라 불리는 부두 노동자들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만보산사건 (萬寶山事件, 1931), 중일전쟁 (1937) 등으로 화교들의 활동가 입지가 위축되기도 했고, 광복 후 1948년 한국 정부가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고, 6 · 25전쟁이 발발하면서 화교들의 사회활동은 감소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햇다. 때문에 대다수 농업에 종사하던 화교들은 손쉽게 시작할 수 있고 경쟁력을 갖춘 중화요리 사업에 주력하였는데, 1970년대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지속되면서 신흥재벌이나 경제 및 정치계 인사 등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중화요리점이 번성하였다.

 

 

 

비단 천과 재단 가위

근현대    소장자 : 최웅규

 

 

 

요리용 칼과 프라이팬

근대    소장자 : 최웅규

 

 

 

청국 조계지의 형성

 

1883년 인천이 개항하자 가장 먼저 일본이 거류지를 조성햇고, 중국은 그 다음 해인 1884년 4월 조계지를 마련하였다. 중국 조계는 처음에 선린동 일대 5,000여 평에 자리잡은 뒤 3차례 확장해 현 (現) 차이나타운의 기원을 이루게 되었다.

중국 조계지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하자 위축되어 점차 잡거지가 되기도 했고, 일제강점시에는 인천부 지나정 (支那町)으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중국인들과 옛날과 같은 친선관계를 유지하자는 뜻에서 선린동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1977년 행정동인 북성동과 합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련의 시기를 지나다

 

1920년대에 이르러 인천화교의 인구는 1,800여 명으로 증가하고 중국 무역액의 8할을 좌우하였다. 이는 화교상들이 중국과의 무역에서 인천항을 본거지로 활용한 데에 따른 것이었다. 이는 화교상들이 중국과의 무역에서 인천항을 본거지로 활용한 데에 따른 것이었다. 인천의 청요리집이었던 공화춘, 중화루가 서울 장안에까지 회자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이곳은 흰 벽과 붉은 기둥이 옹기종기하고 청요리집이 즐비했으며, 다양한 계층의 손님이 경인철도를 타고 이곳에 와서 한잔 마시고 가는 것이 당시 서울 멋쟁이들의 풍류였다. 특히 설 명절 때의 청관놀이는 대단했는데 집집마다 긴 장대에다 폭죽을 수백 개씩 매달아 연쇄 폭발시켜 눈과 귀를 현란케하고 높은 나무 다리를 타고 삼국지나 서유기의 인물탈을 쓴 가장행렬은 인천에서 자란 사람들의 가장 인상적인 추억거리였다고 향토의 원로들은 말하고 있다.

1920년대의 호황기를 거쳐 1930년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이후 이곳은 한때 쇠락했으나 광복 후 선린동 (善隣洞)으로 동명을 개정하고 옛날과 같은 친선교류를 지속했다. 그러나 1950년대 6 · 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독 피해가 극심한 지역이 되었고 1960년대 이후 우리 정부가 화교의 경제권 확장을 제한하는 정책을 폄으로써 화교의 외환거래규제, 무역규제, 거주자격 심사 등을 강화했다. 청관은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 되어 버렸고, 이곳의 경제적 활동은 빠르게 위축 · 쇠퇴하게 되었다.

 

 

 

다시 일어서려는 노력

 

1990년대 세계화 추세와 한중 수교를 계기로 인천은 대중국 교류의 중심도시로 성장하였다. 물론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보아 가장 전통이 있는 인천의 차이나타운이다. 또한 개항장 지역의 역사와 근대 문화유적이 재조명되면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관광명소로서 뿐만 아니라 중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한국 속의 작은 중국 차이나타운으로 탈바꿈했다. 곳곳에 세워진 중국식 패루 (牌樓), 붉은 등과 기둥, 금박 입힌 용조형물 등이 한눈에도 차이나타운 임을 말해 준다. 여기에 중국식 전통공원, 중국 문화체험시설, 삼국지 벽화거리, 중국어마을, 짜장면 박물관 등의 건립은 인천 차이나타운을 찾고 싶은 명소가 되게 하였다. 이러한 문화가 지속되어 품격 있는 중국 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장소로 변모할 것이다.

 

 

 

전 세계로 뻗어나간 화교

 

한국에서 취업 등의 생업을 이어나가는 데에 제도적 제약에 부딪힌 화교들은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생업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던 1 · 2세대와는 달리 대부분의 화교 3세대들은 제도적 제약에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부모를 보며성장하였다. 이후 더 이상 제도적 불이익에 구속받지 않게 된 이들은 본인의 미래에 대한 선택의 기회가 다양해졌으며 이러한 이유로 화교 3세대들은 중국이나 일본, 미국 등 해외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게 되었다.

 

 

 

 

 

 

(좌) 중국 전통의상과 보관용 궤            (우) 귀중품 보관용 금고

근현대    기증자 : 한정화                      근대    기증자 : 우립기

 

 

 

 

 

 

중의사로서의 삶

 

 

 

요리사로서의 삶

 

 

 

(좌) 요리용 화로                              (우) 술통

근대    기탁자 : 서학보                    근현대    기증자 : 왕덕능

 

 

 

화교학교 교사로서의 삶

 

 

 

인천화교 중산중학교사 발령장

1988년    기증자 왕덕능

 

 

 

왕덕능 교장의 명함과 사진

1970 ~ 80년대    기증자 : 왕덕능

 

 

 

왕덕능 교장의 교무일지와 졸업식 준비 메모

1980년대    기증자 : 왕덕능

 

 

 

인천 화교소학교와 중산중학교

 

 

 

국문, 영문, 식물학 교과서

1970 ~ 80년대

 

 

 

인천 화교소학교 졸업장

1973년    기증자 : 우립기

 

 

 

중산중학 졸업앨범

1992년

 

 

 

화교들의 생활풍속

 

 

 

화장대

근현대    기증자 : 강수생

 

 

 

위패와 위패함

근대    기증자 : 초복성

 

 

 

정혼 (약혼) 증서

1970년    기증자 : 한정화

 

 

 

청첩장

현대    기증자 : 왕덕능

 

 

 

결혼증서

1976년    기증자 : 한정화

 

 

 

아기수첩과 결혼예단

근현대    기증자 : 한정화

 

 

 

 

 

 

관우화상 및 제단

근현대    기증자 : 우립기

 

 

 

화교의 전통놀이문화

 

 

 

경극 공연을 위한 모자와 의상

현대    인천화교협회

 

 

 

전통악기

현대    인천화교협회

 

 

 

용춤 공연용 탈

현대    인천화교협회

 

 

 

(좌) 동순동 금전출납부       (중) 저축예금 통장                 (우) 붉은색 봉투에 돈을 넣어주며 받는 사람을 축복하는 "홍빠오"

현대    기증자 : 한정화        현대    기증자 : 한정화           현대

 

 

 

인천화교협회의 화겨단체 교류활동

 

 

 

재운을 기원하는 장식소품과 족자들

현대

 

 

 

한중수교와 새로운 물결

 

한국 화교들은 많은 부분 한국 문화에 동화되어 스스로를 한화 (韓華)라고 일컬으면서 한화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1990년대부터는 한국 화교의 지위가 회복되고, 토지소유제한 규정이 풀리는 등 각종 규정 및 차별적인 제한들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대기업 사원, 전문직, 사업가, 유학생 등으로 이루어진 신화교들의 숫자는 날로 늘어 그 수는 이미 구화교의 5밴에 이르렀다.

2002년 5월부터 영주권을 부여받게 되었고 2005년 8월 선거법이 개정되어 한국의 화교들에게 지방선거권이 생겨 2006년 5월 31일 지방선거부터 화교들이 지방참정권을 행사하면서 화교사회의 활력소가 되었다. 이렇게 날로 증가하는 한국 화교들은 세계 속에서 정치, 금융, 첨단기술 등의 전문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중국, 동남아시아 등에 영화, 드라마, 게임 등의 콘텐츠를 수출하여 한류와 우리나라 경제에 이바지하고 있다.

 

 

 

(좌) 부동산매매계약서            (중) 취득세 영수증                   (우) 임대차계약서

1947년    기증자 : 왕덕능        1973년    기증자 : 왕덕능        1971년    기증자 : 왕덕능

 

 

 

(좌) 중화민국 출국허가증          (중) 화교여권                              (우) 인천화교협회 발행 수수료 영수증

1979년    기증자 : 한정화           1968년    기증자 : 왕덕능           현대     기증자 : 왕덕능

 

 

 

 

 

 

 

신나는 놀이 한마당, 한중문화축제

 

한중문화축제는 한 · 중 수교 10주년을 맞아 차이나타운의 활성화, 양국의 우호증진 등을 위해 2002년부터 열렸다. 행사기간 동안 차이나타운에서는 중국문화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전통공연 등의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된다.

한중문화축제는 중국의 3대 명절 (춘절, 노동절, 국경절) 중 하나인 중국 노동절 (4월 30일 ~ 5월 2일)에 맞춰 개최되며 양국간 문화협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세계화상대회 WCEC

 

세계화상대회의 출범은 화교기업의 세계화 과정에서 '경제원리'와 '문화적 동질성의 결합' 이 토대가 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세계화상대회는 대표적인 화교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성공한 화교계 정치가, 저명한 학자 등을 초청해 강연 및 연구발표를 하는 독특한 성격의 회의이다. 이의 지속적인 개최는 화교기업의 다국적화에 있어서 순수한 경제적 원리보다는 문화적인 공유를 토대로 이루어진 네트워크가 한층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믿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동남아 지역에서 탈피하여 미주와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 지역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려는 화상들에게 세계적인 화교 네트워크의 형성이 절실했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최근 과학기술 분야의 급속한 발전은 화교 네트워크를 강화시켰고, 인터넷 홈페이지 (www.wcbn.com.sg)를 구축하여 정보화시대에 부응하는 화상의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화교 네트워크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화교들은 2년에 한 번씩 한 자리에 모인다. 많은 화교 네트워크가 있지만 가장 영향력 있고 주목받는 화교 네트워크는 바로 세계화상대회이다. 처음 싱가포르에서세계화상대회를 주최했을 때는 화상들이 모이는 사교모임이었지만, 화교자본이 모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2005년 제8차 세계화상대회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되었는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화교단체의 협력에 힘입어 영쟁국이었던 일본과 필리핀을 제치고 유치할 수 있었고 화상 (華商)과 한상 (韓商) 사이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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