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문화관] 07
차이나타운 中華街
이국적 정취가 숨쉬는 화교의 본거지
인천 차이나타운은 1884년 4월 청국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체결된 후로 화교들이 몰려와 생성되었습니다.
북성동, 선린동 일대의 5천 평에 청국의 영사와 학교가 설치되고, 중국의 산동반도와 정기적으로 배가 운영되면서 화교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화교들은 중국에서 가지고 온 식료잡화, 소금,곡물을 팔고 우리나라의 사금 등을 중국으로 보내어 상권을 장악하고 세력을 넓혀 나갔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청관의 상권이 마비되면서 화교들은 대만, 미국, 동남아시아로 떠나고, 일부는 요리집과 잡화상들을 운영하거나, 일부는 부두근로자로 전락하기도 했답니다.
1948년 한국정부가 수립되면서 각종 제도적 제한, 차별대우로 화교 사회는 더욱 어렵게 되었으며, 더물어 1949년 중국 정부가 설립되어 외국 이동을 금지하면서 더욱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화교 1세들은 고유 풍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중국의 큰 명절인 춘절과 원소절 (보름날) 사이의 15일 동안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으며, 집집마다 복을 기원하는 글을 빨간 종이에 써서 붙이고 색등을 걸어 놓았습니다.
해가 저물면 긴 장대 끝에 폭죽을 수 백개씩 달아 놓고 불꽃놀이를 즐겨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은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차이나타운의 미래
국내 유일의 차이나타운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이래, 중국인 거주지역이 형성되고 지금까지도 그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적인 지역을 인천국제공항, 국제해양관광단지 및 자유공원, 신포 문화의 거리, 월비도 문화의 거리와 연계하여 한국 최초의 차이나타운으로 개발하고자 추진하고 있습니다. 관광특구로 지정된 국내 유일의 차이나타운과 월미도, 신포상가, 연안부두 등의 관광지가 연간 20만명 이상의 외국인 관광객을 친절하게 맞이합니다. 또한 국내 최대의 종합해양위락단지로 개발되는 용유, 무의 국제관광단지가 인접해 있어 약 25억 달러에 이르는 미국과 프랑스의 해외자본이 투자되고 있습니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한국과 중국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으로 현재 500여 명의 화교가 거주하고 있으며, 중국과의 무역재개로 개발가치와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가진 국제 관광 기능의 중심도시로 도약하고 있습니다.
명칭 : 공자상 (孔子像)
종류 : 위인
해설 : 공자는 중국 노나라 사람으로 유학의 선구자이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패권주의에 맞서 인의를 강조하였으나,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혀 숱한 좌절을 맞보았다. 이에 공자는 제자들을 육성하고 유학을 확립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명칭 : 오호장군 (五虎將軍)
종류 : 삼국지, 중국 위인
해설 : 중국 삼국시대에 촉 (蜀) 나라 유비 (劉備) 휘하에 있던, 다섯 명의 호랑이같이 무서운 장수를 의미하며, 관우 (關羽), 장비 (張飛), 조운 (趙雲), 마초 (馬超), 황충 (黃忠) 등을 말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데, 실제로는 위연 (魏延)이 오호대장군에 포함되어 있었고, 황충 (黃忠)이 빠져 있었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는 제갈량 사후 양의와 비위가 군권의 중심에 있었던 위연의 일족을 멸족시킴과 동시에 그와 관련한 모든 기록을 수정하였다는 설과 관계가 있다.
선사시대
구석기시대
한국에서의 구석기시대 유적은 1935년 함북 동관진 지역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1960년대의 공주 석장리와 웅기 굴포리유적 발견에 이어 지금까지 유적 약 50곳이 발견되었다.
남한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공주 석장이유적과 연천 전곡리 유적을 들 수 있으며, 임진강과 한탄강 연안의 많은 유적들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어 국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신석기시대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라고 한다. 이 빗살무늬토기인들은 약 6000년 전 시베리아 몽고지역에서 한반도에 걸쳐 나타나기 시작하여 기원전 약 3000년 경에 전국적으로 그 생활터전을 확대하였다.
신석기시대 유물을 통해 이들이 이미 어로와 농경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등으로 난방시설까지 갖추고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청동기로 만든 도구들을 사용한 시대를 청동기시대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청동기유물로서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칼, 청동제 방울 등을 들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서는 고인돌을 들 수 있는데 한강을 중심으로 북쪽지역에 분포된 것을 북방식, 그리고 남쪽지역에 분포된 것을 편의상 남방식이라고 한다.
백제토기
백제토기는 중국의 한나라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기원전후 원삼국시대부터 경질 (硬質) 토기의 제작이 이루어졌고, 금강이남 지역은 기야와 신라의 영향을 받아 가야, 신라식 토기가 만들어진다.
백제토기 색상 및 경도에 따라 적갈색 연질토기, 회색토기, 회청색 경질토기로 나눌 수 있다. 백제토기는 초기에는 밑이 둥근 단지와 항아리가 많지만, 생활용기인 바리 (그릇), 대접, 잔, 접시, 합, 시루, 병 등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 또 굽다리접시 (다리가 붙은 그릇), 뚜껑접시, 세발토기 방울잔, 그릇받침 등의 의례용 토기도 있으며, 벼루, 등잔, 변기 등 특수용기도 있어 그릇 종류가 매우 다양함을 보여 준다.
김삿갓 (金炳淵) [1807 ~ 1863]
종류 : 목각 (木刻)
구입처 : 한국 전통 공예 [2008. 2. 27]
조선후기 풍자 방랑시인 속칭 김삿갓 '삿갓 립' (笠)자를 써 김립 (金笠) 본관은 안동, 자는 성심 (性深), 호는 난고 (蘭皐), 홍경래 난 때 선천 방어사로 전관되어 있다. 술에 취해 얼떨결에 항복하여 참수 당한 김익순이 조부임을 모르고 살다가 20세로 과거에 응시,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의 시제가 나오자 자신의 가족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여 서슴지 않고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답글 형식의 내용을 써 장원급제하게 되었다. 그 후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이자 자신이 그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조부를 비난하는 시로 장원 급제한 것을 수치로 여겨, 일생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단장을 벗 삼아 각지로 방랑을 했다. 독특한 풍자와 해학으로 퇴폐하여 가는 세상을 개탄했다. 그의 수많은 한문시가 구전되고 있다.
진시황릉 1호 청동마차
청동마차는 진시황의 어용마차 부대 중 "오색 어용차" 의 형상을 모방하여 제작된 것으로 진시황제가 타는 가마의 일부분을 상징하는 것이다.
규격은 실제 마차의 1 / 2로 사람, 말, 차 모두 청동을 사용하여 제작되었고 대량의 금과 은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마차가 출토된 순서에 따라 1호 마차와 2호 마차라고 칭한다.
1호 마차는 입차 (立车)라 하고, 고차 (高车) 또는 융차 (戎车)라고도 불리우는 서서 모는 호위마차이다. 바퀴 2개, 수레 1개로 구성되어 4마리의 말이 끄는 구조이며 마차에는 청동우산이 세워져 있고 청동우산 아래에는 청동어관용 (御官俑)이 서 있는 모습이다.
ㅡ 중국 위해시 경제기술개발국 기증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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