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농업박물관] 02
초기 농경의 시작
신석기시대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신석기시대부터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면서 식량을 직접 생산하였으며 물과 먹을 것이 풍부한 바닷가나 강가에 움집을 짓고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기원전 4,000년 무렵에는 평양 남경, 황해도 지탑리 등 중서부 지방을 중심으로 조, 수수와 같은 잡곡의 재배가 시작되었다. 돌괭이나 돌보습 등 간석기로 만든 농기구로 땅을 일구고 씨를 뿌려 원시적인 밭농사를 지었다. 당시에는 산이나 들에 불을 지른 뒤 땅을 개갠하는 화전 火田 위주의 농사였다. 여전히 사냥과 채집이 생계를 위한 주된 활동이었으나 자연환경 변화에 적응하며 이전의 생활방식에서 직접 생산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초기 농경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이 시대에는 화덕시설을 이용하여 음식을 조리하고 토기를 만들어 식량을 저장 · 운반하기도 하였다. 빗살무늬 토기는 한반도 전역에 고루 나타나는 대표적인 토기이다.
사냥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창, 활, 화살을 개발하여 사용함으로써 더욱 많은 사냥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은 멧돼지 등 동물모양 흙인형을 만들어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하기도 하였다.
채집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참나무와 밤나무 같은 활엽수들이 넓게 분포하게 되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도토리와 밤 등의 열매를 따서 먹거나, 강가나 해안가의 조개 등 어패류를 채집하였다.
고기잡이
빙하기가 끝난 후 수온과 해수면이 상승함에 따라 수산자원이 풍부해져 고기잡이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당시 고기잡이에는 작살, 낚싯바늘, 그물추 등의 도구가 사용되었다.
가축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개나 돼지를 가축으로 사용하면서 동물성 식재료를 보다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전국에 분포한 신석기시대의 생활유적에서 많은 개 뼈와 돼지 뼈가 출토되고 있다.
곡물을 저장하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수확한 곡물이나 액체를 저장할 때 흙을 빚어 만든 토기를 사용하였다. 야외에서 채집한 열매 외에도 경작을 통해 다양한 곡물들을 수확하게 되면서 가죽이나 식물을 엮어서 만든 그릇보다 더 단단하고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토기를 만들어 저장하였다. 그리고 저장 · 조리 등 그 쓰임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다른 여러 종류의 토기를 사용하였다.
갈판과 갈돌
구연문토기 (좌), 도토리 (우)
빗살무늬토기
곡식을 거두다
신석기시대에는 돌을 갈아 만든 칼을 사용하여 곡물을 수확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야생에서 재배한 조, 수수, 기장 등의 곡물을 주로 먹었는데, 돌칼처럼 손에 쥐기 편리한 작은 도구를 사용해서 다 익은 곡식을 여러 번에 걸쳐 수확하였다. 드물지만 멧돼지의 뾰족한 송곳니를 예리하게 갈아서 만든 낫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반달모양돌칼
덧무늬토기
땅을 일구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돌괭이, 돌보습, 뿔괭이 등 돌이나 나무, 동물의 뼈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여 땅을 일구었다. 날카롭게 다듬은 납작한 돌에 나무 손잡이를 부착해 만든 돌괭이와 돌보습으로 흙을 부드럽게 하거나 땅을 파 뒤집었다. 그리고 사슴뿔 등으로 만든 뿔괭이로 야생식물의 뿌리를 캐거나 씨앗을 심을 구멍을 파기도 하였다.
돌보습
갈판과 갈돌
곡물을 가공하다
야생에서 수확한 곡물은 갈판과 갈돌, 돌절구 등을 이용하여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만든 후 조리하여 먹었다. 갈판 위에 곡물을 놓고 갈돌을 앞뒤로 굴려 가공하기도 하고, 절구의 움푹파인 확 부분에 곡물을 넣고 공이로 찧어 가공하기도 하였다. 가공한 곡물은 작은 그릇에 물과 함께 담고 불을 사용해 익혀 먹었다.
돌공이
뿔괭이
돌괭이
정착농경의 시작
청동기 시대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부터 벼농사가 시작되었으며 신석기부터 계속된 조 · 수수 · 팥 같은 잡곡 농사는 더욱 발달하였다. 벼농사가 점차 본격화되면서 논의 개간과 유지, 물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수리시설의 축조 등과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가 시행되었다. 이는 당시 사회가 이미 지배자를 중심으로 상당한 수준의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농기구는 여전히 간석기와 나무로 만들었으며 청동기는 무기나 의례용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농업이 본격화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고 사유재산이 생기면서 사회 분화를 더욱 촉진시켰다. 생산체계를 유지하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 망루와 같은 방어시설을 갖춘 마을이 형성되었다. 고조선은 이러한 청동기시대 문화를 바탕으로 등장하였다.
조 Millet
조는 가장 이른 시기부터 재배된 곡물이며, 이후에도 중요한 식량원으로서 여러 가지 곡물 중 가장 많이 재배되었다.
기장 Proso Millet
기장은 기원전 5천년 경 신석기시대 중기의 매우 이른 시기부터 재배되었던 곡물로서, 그 이후에도 중요한 식량원으로 널리 재배되었다.
보리 Barley
보리는 신석기시대 중기의 충북 옥천 대천리 집자리와 신석기시대 후기의 경남 진주 상촌리 유적 등에서 조, 피 등과ㅏ 함께 출토되었다.
밀 Wheat
밀은 신석기시대 중기의 충북 옥천 대천리 유적과 후기의 경남 진주 상촌리 유적에서 출토되었으며, 조나 기장처럼 보편적으로 재배되지는 않았다.
간 돌칼
청동기시대
농경마을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은 여러 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 중 특히 충청남도 논산시 마전리에서 발굴된 마을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농사 모습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손꼽히고 있다. 마전리 마을 유적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살던 집터부터 무덤, 논, 수로, 우물, 곡물저장구덩이 등 다양한 생활공간이 확인되었다. 특히 마을 주변에 만들어진 논밭은 당시로서는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잇어 매우 발달된 농경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마을 내에도 거주공간, 무덤공간, 곡물저장공간, 토기생산공간 등을 모두 분리해 두어, 당시 사람들이 매우 계획적으로 마을을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민무늬토기 (위) / 새모양 조각품 (왼쪽) / 도끼자루 (오른쪽)
돌낫
돌낫은 반달모양돌칼과 함께 다 익은 곡식의 이삭을 따는 수확도구이다. 당시 사용된 돌낫은 갈아서 만든 것으로 요즘의 낫과 같은 모양이다. 돌낫은 남부지방에서 반달모양돌칼과 함께 출토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통해 남부지방으로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전역으로 퍼져나갔음을 알 수 있다.
점토띠토기
돌낫
돌자귀 (왼쪽) / 돌도끼 (오른쪽)
민무늬토기
반달모양돌칼
다 익은 곡식의 이삭을 따는 데 사용했던 반달모양돌칼은 등 쪽에 뚫은 구멍에 끈을 꿰고, 끈에 손을 걸어 잡고 사용하였다. 반달모양돌칼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거의 빠짐없이 출토되고 있는 대표적인 농경도구로 당시 생산 활동 중에서 벼농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반달모양돌칼
곰배괭이
신석기시대는 물론, 철이 귀하던 시대에 자루를 달아 괭이나 호미처럼 쓴 연장이다. 잘 닳지 않는 돌을 쪼아 곰배 모양의 날을 만들고 이를 ㄱ자 모양의 나무자루에 좁은 쪽의 머리를 끼워 사용한다.
구멍무늬토기
돌보습 (왼쪽) / 곰배괭이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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