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그때 그 서울 Seoul : There and then 1945 ~ 1965] 01

드무2 2024. 2. 2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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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서울 Seoul : There and then 1945 ~ 1965] 01

 

 

 

임인식 기증유물특별전

2023. 12. 15. FRI ~ 2024. 03. 10. SUN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6 · 25전쟁의 상흔 속에서도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은 서울 사람들의 이야기

 

 

 

전시를 열며--------------------------------------------------------------------------------------------------------------------------------------

서울역사박물관은 기증자의 높은 뜻을 기리고 시민들에게 기증유물을 공개하고자 매년 기증유물특별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2023년에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6 · 25전쟁 종군 기자인 임인식 작가의 사진을 전시합니다.

임인식 작가는 6 · 25전쟁을 전후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충실히 카메라에 담아 방대한 분량의 사진을 남겼습니다. 이 중에는 종군기자로서 촬영한 기록사진 외에도 서울의 거리와 분주한 시장, 고궁과 한강에서 여흥을 즐기는 사람들, 골목을 놀이터 삼아 뛰어노는 아이들 등 평범한 일상을 포착한 사진도 많습니다.

기증유물특별전 '그때 그 서울'에서는 2013년 기증받은 사진 1,003점 중 1945년부터 1965년까지 격동기 서울의 모습과 사람들의 삶, 애환을 담은 140여 점을 공개합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임인식 작가의 사진에 담긴 서울에 대한 기억과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고 공감하기를 기대합니다.

 

 

 

임인식 林寅植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종군기자로 알려진 임인식 작가는 1944년 봄 고향인 평북 정주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로 옮긴 이후 용산 삼각지 부근에서 '한미 사진 카메라' 점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울의 도시 모습들과 풍물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 2반으로 입교해 교육을 받았고, 소위로 임관했다. 6 · 25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사진대 대장으로 종군하며 전쟁의 모든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1952년에는 육군 대위로 예편한 뒤 사진전문통신사인 '대한 사진 통신사' 를 설립해 해외 언론에 사진을 제공했다. 이후 '신한관광사' 라는 일종의 사진화랑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작가 약력

1920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흥록동 출생

1937  오산중학교 졸업

1939  조선 산악회 학술조사차 묘향산과 금강산 탐방 사진촬영

1941  황해도 해주 중앙장로교회에서 김성주와 결혼

1944 ~ 45  서울로 상경, 용산 삼각지에서 한미사진 카메라점 운영

1946  조선 산악회 학술조사 촬영차 오대산과 울릉도 · 독도 탐방

1947  지리산 동계스키대회 참가

1948  대한사진예술연구회 간사

          7월, 사진문화 창간 (이동호 등과 함께 창간)

1949  육사 8기 특 2반으로 졸업

1950  6 · 25 전쟁 종군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

1952  5월, 은성 화랑무공훈장 수훈

          5월, 대한사진통신사 설립

1953  대외 육군화보 영문판 편집 촬영 제작

1955  사진인 모임 거리회 설립

1959  서울 인사동에 사진전문 화랑 개업

          신한관광사 운영

1961  한국 사진협회 창립 간사

1963  미국 이민신청 후

1987  미국 워싱턴 D. C.에 이주

1990  4월, 미국 체재 중 북한 방문 (30일간 고향인 정주를 방문)

1998  2월, 귀국

          4월 4일 서울에서 타계

 

 

주요 출간 / 주요 전시 

1995  그때 그 모습 (임인식 사진, 임정의 저) | 발언출판사

2004  세종문화회관 특별전시장

          80일간의 세계일주 그리고 서울의 기억

2008  서울 타임캡슐을 열다 (임인식 사진, 임정의 저) | 종로구

          우리가 본 한국전쟁 (임인식 사진, 임정의 저) | 눈빛출판사

2012, 2013, 2014  서울 사진축제 참여

2015  Art Space | "The Big Flow (4대전 ㅡ 임석제, 임인식, 임정의, 임준영)"

2016  The Big Flow (임석제, 임인식, 임정의, 임준영 사진, 임준영 저) | 청담아카이브

2020  라이카 코리아 "Life goes on"

2021  서울 하우징랩 "안녕 ! 오늘 서울"

2022 ~ 23  전쟁기념관 아카이브 센터 개관전 초대

2023  뮤지엄 한미 삼청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 ~ 1982 (개관전)"

 

 

 

임인식, 한국사진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다

이경민 사진아카이브연구소 한국사진사

 

임인식의 사진활동과 그가 남긴 사진기록이 갖는 의미는 첫째 '국가 표상과 사진이미지의 관계, 둘째 '한국사진사 기술에 잇어서 소외 분야에 대한 보완' 치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임인식과 그의 사진은 미군정기와 이승만 정권을 거쳐 장면 정권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표상을 위한 사진 이미지의 생산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생산된 그의 사진기록은 현대사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해방의 순간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부터 조선산악회의 제4차 국토구명사업인 '울릉도 · 독도 학술조사대' 의 일원으로 참가해 남긴 기록사진, 그리고 정훈국 사진대장으로 종군하여 남긴 한국전쟁 사진 등은 오늘날 한국현대사의 대표적 국가표상이 되었다. 특히 그는 1952년 전역 이후 대한사진통신사를 설립해 정부나 언론매체에서 필요한 보도사진을 생산했으며, 1954년부터 10여 년간 참전국 18개 나라를 대상으로 한국과 그 발전상을 소개 홍보하는 「대외육군화보」 (육군본부 보도부 발행)의 사진을 담당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의 전재 복구 및 재건운동에 보조를 맞춰가며, 지상 (도심 건축물과 생활상)과 공중 (항공사진)에서 서울의 변화상을 입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었다. 또한 1950년대 후반 촉진된 정부의 문화재 및 관광 정책에 부응하여 신한관광사를 조직했으며, 당시 해외 선전과 홍보에 필요한 '한국적인 표상의 하나로 관광사진을 생산 · 유통했던 것이다.

 

둘째로, 임인식과 그가 남긴 사진 기록은 그동안 단선적으로 기술되어 왔던 한국사진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는 아직까지 한국 사진사에서 체계적으로 연구되지 않은 소외된 분야들이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심지어 사진관 및 사진 재료상 등을 중심으로 한 물질문화사 연구를 비롯하여, 종군사진사 사진통신사, 사진단체사, 상업사진사 등에 대한 연구는 발도 떼지 못한 상태이다. 특히 해방이후부터 1961년까지의 한국사진사는 관련 자료의 부재와 소실은 이에 대한 연구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임인식과 그의 사진은 소외분야 연구뿐만 아니라 한국사진사 연구의 결락된 부분을 메울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텍스트' 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사진 재료상인 한미사진기점을 시작으로 남한 사진계에 발을 들여 놓았고, 해방공간의 서울에서 예술사진단체로서는 처음 조직된 조선사진예술연구회 (1946년)의 창립회원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한국전쟁기에는 정훈국 사진대장으로 종군했고, 전역 후에는 사진통신사를 설립해 사진의 쓰임을 사회적으로 확장해 나갔으며, 신한관광사라는 사진에이전시를 운영하면서 사무실 한편에서 사진상업화랑을 처음 시도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임인식은 1945년부터 1961년까지 사진제도 안팎에서 예술사진과 비예술 사진을 넘나들며 치열하게 활동했다. 그가 남긴 사진아카이브는 한국현대사와 사진사를 입축적으로 보여주는 시대의 창이 되었다.

 

 

 

폐허가 된 서울

서울은 6 · 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격전지 중 하나였다. 청계천 북쪽 종로, 경복궁 일대는 상대적으로 포격 피해가 적었으나 용산, 명동 등 중구 일대와 영등포 지역은 시가전으로 거의 초토화되었다. 서울 시민들은 3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피난과 귀향을 반복하였다. 처음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에는 40만여 명이 피난을 떠났으나 1 · 4후퇴 당시에는 80만여 명 이상이 피난길에 올랐다

종군기자로서 임인식은 전쟁 초기 서울 시민들이 피난길에 오르는 모습을 포함해 9 · 28 서울 수복, 1 · 4후퇴 등 전쟁의 전 과정을 기록하였다. 전쟁 직후 기차를 타려는 피난민들로 서울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9 · 28 서울 수복 이후 서울의 명동, 남대문시장, 종로 등은 전쟁 전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1 | 폐허로 변해버린 남대문시장 1950년

2 | 폭격 피해를 입은 종로2가 사진관 1953년

3 | 6 · 25전쟁으로 불탄 종로 보신각 1950년

4 | 6 · 25전쟁 직후 종로3가 거리풍경 1953년

5 | 6 · 25전쟁 피해를 입은 종로 YMCA 건물 1953년

6 | 폐허로 변한 자문통 (새문안로) 1950년

 

 

 

폐허로 변해버린 남대문시장 1950년

 

 

 

 

 

 

폭격 피해를 입은 종로2가 사진관 1953년

 

 

 

· 25전쟁으로 불탄 종로 보신각 1950년

 

 

 

 

 

 

· 25전쟁 직후 종로3가 거리풍경 1953년

 

 

 

· 25전쟁 피해를 입은 종로 YMCA 건물 1953년

 

 

 

 

 

 

폐허로 변한 자문통 (새문안로) 1950년

 

 

 

 

 

 

 

 

 

1 | 불탄 화신백화점 1950년

2 | 기둥 만이 앙상하게 남은 명동의 건물들 1952년

3 | 폐허로 변한 명동 1952년

4 | 폐허로 변한 충무로, 명동 일대 1950년

 

 

 

불탄 화신백화점 1950년

 

 

 

 

 

 

기둥 만이 앙상하게 남은 명동의 건물들 1952년

 

 

 

폐허로 변한 명동 1952년

 

 

 

 

 

 

폐허로 변한 충무로, 명동 일대 1950년

 

 

 

 

 

 

 

 

 

1 | 서울역 피난민 1950년

2 | 서울역 광장의 피난민 1950년

3 | 서울역 피난민 1950년

4 | 서울역 피난 1950년

5 | 서울역 피난민 1950년

6 | 서울역 피난민 1950년

7 | 서울역 피난 1950년

8 | 서울역 피난민 1950년

 

 

 

서울역 피난민 1950년

 

 

 

서울역 광장의 피난민 1950년

 

 

 

서울역 피난민 1950년

 

 

 

서울역 피난 1950년

 

 

 

서울역 피난민 1950년

 

 

 

서울역 피난민 1950년

 

 

 

서울역 피난 1950년

 

 

 

서울역 피난민 19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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