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25전쟁 60년/서울 거쳐 평양으로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8) “미군 공습이 너무 무서웠다”

드무2 2021. 6. 28.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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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8) “미군 공습이 너무 무서웠다”

 

 

 

2009년 10월 북한을 공식 방문한 원자바오 중국 총리(오른쪽)가 평안남도 회창군의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묘’를 방문해 마오안잉의 흉상에 헌화하고 있다. [회창군 AP=연합]

 

 

 

내가 전쟁 중에 만난 중국인이 있다. 차이청원(柴成文)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중국의 주 북한 대사관 초대 참사였다. 그러나 출신은 군인이었다. 나와의 인연은 1951년에 시작한 휴전회담에서였다. 그는 당시 휴전회담 중국 대표단의 비서장 신분으로 나를 먼발치에서 지켜봤다고 했다.


미군 공습 공포 … 김일성도 탄광으로, 농가로 숨어다녀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나는 6·25전쟁 휴전회담의 첫 한국 대표다. 강원도 강릉에서 국군 1군단장을 하고 있던 내게 그 임무가 맡겨진 것이다.



차이는 6·25전쟁의 막전막후(幕前幕後)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중국이 전쟁에 참전하기로 했다는 중국 지도부의 결정 사항을 가져와 김일성에게 처음 전해준 인물이다. 그는 “김일성이 그때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고 말했다.



전쟁 중에 총부리를 겨누고 마주했던 적진(敵陣)의 중요 인물과 전쟁을 끝낸 뒤 다시 만난다는 것은 여러 가지 감회에 젖게 한다. 그는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어떤 생각으로 전쟁을 치렀고, 그들이 받은 상처는 또 얼마나 클 것인가. 이런 궁금함이 다른 어떤 생각보다 앞서는 경우일 것이다.



그는 나와 서울과 베이징에서 두 차례 만났다. 나는 70대에 막 들어섰고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그는 이미 70대 중반이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 해군의 급강하 폭격기인 AD-3가 1950년 11월 압록강변의 신의주 쪽을 폭격하고 있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한결같이 미군의 공습을 가장 두려워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그는 개성에서 휴전회담에 참석했을 때의 일화를 내게 들려줬다. 그의 부인이 전쟁 중의 남편을 만나기 위해 개성으로 왔다고 했다. 오랜만에 이뤄진 상봉의 기쁨도 잠시였다. 그의 부인이 자국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미군의 공습을 받아 허리를 크게 다쳤다고 했다. 하늘에서 반짝거리면서 나타난 미군의 공군기가 순식간에 다가와 퍼부은 기총 소사와 폭격에 쓰러진 뒤 급히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미군의 공습은 정말 무서웠다”고 회고했다. 그는 전쟁 중에 북한 지도부를 따라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을 피해 평안북도 산골짜기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고 전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가슴을 졸였던 것이 미군의 공습이라고 했다. 그는 “아예 우리는 낮이 되면 길에서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거대한 병력의 중공군을 한국 전선에 직접 보낸 마오쩌둥(毛澤東)도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을 공군의 폭격으로 잃었다. 그는 평북 대유동에 있던 중공군 총사령부에서 당시 병력을 총지휘했던 펑더화이(彭德懷)와 함께 있었다. 폭격을 맞던 날 마오안잉은 자신이 거처하던 동굴에서 나와 미 공군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이동하려다 동굴에 두고 온 문서를 가지러 다시 그 속에 들어간 뒤 폭격을 받았다. 미 공군기에서 발사된 네이팜탄인가가 동굴을 파고들었고, 마오는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 또한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으로 압록강을 향해 쫓겨갈 때 이런 미군의 공습에 매번 마음을 졸여야 했다. 기차를 탄 채 철도터널에 들어가 미군기를 피했고, 때로는 탄광의 깊숙한 곳에 숨어들어 무서운 공습을 피해야 했다. 특히 김일성은 일반 농가를 자주 찾아 들어갔다고 했다.



평양도 나중에 잿더미가 된다. 2층 이상의 건물은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미 공군의 공습에 처절하게 무너진다. 북한 지도부는 그 때문에 미군의 공습에 거의 노이로제 상태였다. 그만큼 미군 공습은 저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미 공군기는 가끔 상공에서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대공포판(對空布板)을 지고 다녔다. 빨강색과 흰색으로 양면을 칠한 헝겊을 둘둘 말아서 다니다가 작전 지역에 들어가면 이를 펼쳐 등 위에 걸고 다녀야 했다. 지금 군대에서도 이 대공포판은 중요한 물건이다. 특수 도료(塗料)를 칠해 상공의 아군 공군기가 우리를 알아보게 하는 표지물이다.



1950년 11월 이후의 전쟁에서 북한군은 실종됐다. 모든 전선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전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동부 전선과 서해안에서 잠깐씩 출몰한 게 전부다. 그 다음부터의 전쟁에서 적의 주력은 중공군이었다. 그들은 막강했다. 특히 병력 면에서 압도적인 우월함을 과시했다. 힘겨운 전쟁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그 점에서 미 공군기의 공습이 상징하는 미군은 우리가 의지하면서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될 힘의 원천이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출처: 중앙일보] [6 · 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8) “미군 공습이 너무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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